단번에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성도와 그 사실에 관한 확신 하나로 수시로 가족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대부분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성도 중 누가 천국에 들어갈 것 같은가? 제자들을 포함한 예수님의 청중은 대부분 후자에 속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이 택하신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 법 없는 자들인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이 친히 주신 율법을 간직하며 지키는 의인이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운명은 절대로 자기 운명이 될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매우 놀랍고 충격적이기까지 한 세 편의 천국 비유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적용될 천국의 원리를 각각 가르치셨다. 성전 붕괴를 예언하신 주님께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물은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날의 징조와 그날을 준비하는 자들을 위한 교훈으로 답하시고(24장), 이어서 주가 오셔서 다스리실 그 나라에서 그들이 맞닥뜨리게 될 현실이 무엇인지 세 가지 비유를 통하여 분명히 알려주셨다(25장).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를 가리켜 “본향 찾는 자”라고 불렀다(히 11:14). 우리의 본향, 천국을 사모하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천국의 원리를 예수님의 천국 비유를 통하여 마음에 깊이 새기자. 그리고 본향에 이르는 그날까지 그 원리대로 힘껏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천국 비유(1-12절)
이 말씀은 예수님을 배척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마 24:3). 그들은 또한 오순절 이후 교회를 이룬 첫 성도들이었다. 주님은 지금 교회에 천국의 원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1절). “마치~와 같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주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비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놓칠 수 있는 “그때에 천국은 마치~와 같다 하리니”라는 미래형 설명에 주목하라. 제자들이 물었던 ‘주가 임하셔서 세상을 끝내고 자기 왕국(천국)을 세우실 그때’, 제자들이(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현실이 이 비유와 같을 것이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비유는 오늘날 결혼 문화에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유대)문화였을 것이다. 유대인은 보통 일 년의 약혼 기간동안 신부는 정결을 입증하고 신랑은 신부와 함께 살 집을 예비했다. 때가 되면 신랑은 신부 집으로 와서 간단한 예식을 치르고 신부를 준비된 신혼집으로 데리고 와서 며칠간 풍족한 혼인 잔치를 벌였다. 열 처녀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로 아마도 신부의 친척이나 친구들로 신부의 들러리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신랑이 신붓집에 오는 것을 신부와 함께 기다렸다가 신랑이 오면 등을 비추어 혼인 잔칫집까지 동행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비유 속 신랑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15절에서 자신이 신랑이며 제자들은 “혼인집 손님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다(요 14:2).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주님이 다시 와서 영접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고, 그들을 혼인 잔치로 데려갈 그때를 사모하며 기다린다(계 19:9). 우리 모두가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열 처녀이다.
주님은 열 처녀 중에서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고 평가하셨다(2절). 지적 능력이나 학력 혹은 성품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다. 차이는 오직 이것뿐이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3-4절). 기름을 챙겼느냐가 유일한 차이였다. 여기서 등은 횃불이나 램프를 말하는데, 기름에 적신 헝겊을 막대기에 말아서 불을 붙이거나 램프에 심지를 꽂고 기름을 채워 불을 붙이는 형식이었다. 헝겊에 기름이 마르거나 램프에 기름이 떨어지면 추가로 기름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기름을 따로 챙기지 않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따로 기름을 담아 챙긴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신랑이 생각보다 더디 오는 것이다. 그들은 졸다가 잠들었다(5절).
이천년이 넘는 긴 세월 교회는 신랑을 기다렸다.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신 주님은 확실히 더디 오시는 것 같다(계 22:20). 기다리다가 그만 지치고 졸거나 잠들어 버릴 것 같다. 이 비유를 직접 들었던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런데 사실 예수님 비유 속에서 졸거나 자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미련한 자들이나 슬기 있는 자들이나 모두 졸았고 잠들었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자고 있던 그들에게 신랑이 갑자기 찾아왔을 때였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6절). 늦은 밤(자정)에 누군지 모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라!”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우리 신랑이신 주께서 강림하실 그때를 연상하게 한다(살전 4:16). 신랑이 왔으니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준비해야 한다(7절). 그런데 미련한 자들 곧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들에게 문제가 생겼다(8절). 그들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는데 보충할 기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머지 다섯 처녀에게 부탁했다: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지만 그들도 나눠주고 나면 기름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필요한 기름을 사라고 답했다(9절). 매정한가? 아니다. 둘 다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보다 절반이라도 준비된 것이 낫다. 신성한 결혼식을 망치지 않으려면, 신랑과 신부에게 불명예를 끼치지 않으려면. 그리고 각각 자기 기름을 자기가 준비하는 것이 맞다. 다른 사람이 대신 챙겨주거나 보충해 줄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자, 비유는 이제 충격적인 결말에 이른다. 기름을 준비하였던 자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10절). 그리고 의미심장한 이 표현이 뒤따른다: “문은 닫힌지라.” 뒤늦게 남은 처녀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신랑에게 부르짖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11절). 그러나 대답은 매우 냉정하고 단호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절). 굳게 닫혀 다시 열리지 않는 문, ‘주여 주여’라는 익숙한 부르짖음(마 7:21),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선포하신 주님의 엄중한 판결(마 7:23).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할수록 놀랍고 두렵다. 한 주석가는 남은 다섯 처녀는 결혼식과 신랑을 모욕하고 불명예를 끼친 원수로 신랑의 문전박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평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주님께서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원리를 말씀하실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교훈을 가르치실 때 자주 사용하시는 표현이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인 교회에게 너희 중 일부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진실로 경고하신다.
간절히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이 있다: ‘기름은 무엇인가?’ 여러 추측이 난무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추측하는 답은 “착한 행실”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앞에 비치는 빛이 되라고 하시면서 그 빛이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5:16).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열 처녀 모두 기름이 있었다. 여분의 기름을 챙긴 자가 잔치에 들어간다는 말은 남들보다 충분한 선행을 쌓아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열 처녀 비유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기름에 관한 궁금증을 내려놓고, 한쪽은 준비했고 다른 한쪽은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구원이 영원하다는 확신 아래 방탕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가는 성도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 자임에 틀림이 없다. 반면 날마다 주님 앞에 회개하며 믿음으로 주가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자는 준비하는 자다. 베드로는 주의 약속이 더딘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우리 중 누구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주께서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렇다. 주님은 우리가 준비하지 않는 자처럼 살다가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준비하는 자 곧 회개하여 돌이킨 자답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중요한 건 누구도 내 대신 준비해 줄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당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누구도 대신 시험할 수 없다. 대신 확증해 줄 사람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계신 걸 스스로 알아야 한다. 주를 만나는 그날까지 계속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2. 천국 원리(13절)
그래서 주님은 천국 비유 끝에 다음과 같은 천국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비유 속 열 처녀가 모두 졸고 잠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어색하게 들린다. 그래서 본래 뜻 가운데 하나인 ‘조심하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눅 21:34; 고전 10:12; ).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 나는 이미 천국 준비를 끝냈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미련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행위로 구원의 확신을 얻어내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반대로 열매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버림받은 자’로 문전박대당할 수 있다. 회개하지 않는 교회를 주님은 버리시겠다고 경고하셨다(계 2:5).
주님은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니 항상 조심하고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현재형). 먼 나라를 여행할 때, 절대 잊지 말고,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여권이다. 한 번만 점검하는가? 여러 번 점검한다. 공항을 통과하면 잊고 지내도 되는가? 아니다. 다시 집에 올 때까지는 계속해서 확인해야 한다. 천국, 우리의 본향에 도착할 때까지, 신랑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맞이하실 그날까지 우리는 날마다 우리 믿음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 신앙을 확인해야 한다. 여권처럼 잃어버릴 염려가 있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반대로 시험하고 확증할수록, 조심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고, 주님 맞을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 가운데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다가 마침내 기쁨으로 주를 만나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번에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부족하여 선행으로 보충하려는 성도나 반대로 그 확신만 있지 전혀 선한 백성으로서 살지 않는 성도 모두에게 결국 필요한 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회복이다. 우리를 위하여 가장 수치스럽고 멸시받는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함께하길 원한다면 행위로 사랑을 얻어내려 하거나 그 사랑을 싸구려 취급하는 삶으로 보답하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주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거처를 마련하고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주님을 항상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살자. 그날과 그때를 우리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