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 그것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이들이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소명을 받았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교회는 그래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요 15:12).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구하셨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었다(요 17:23).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세상에 나타내는 증거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크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자라면서 혹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 구원의 은혜를 받는 과정 가운데 성도가 베푸는 사랑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모른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자라면서 교회에 실망하거나 환멸을 느껴 교회 밖으로 나가는 데 있어서 성도가 준 상처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은 성도는 없다. 모두가 아직 온전함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옛 자아가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함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성령이 일으키시는 새로운 욕구에 따라 서로를 사랑하며 기쁨과 유익을 끼치기도 한다.

그래서 같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어떤 성도는 교회에 사랑이 넘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성도는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성도들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 크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성도들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교회를 떠나거나, 남아는 있지만 마음이 떠난 상태로 오래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에서 사랑을 많이 누리는 자들만 교회를 사랑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교회를 덜 사랑하거나 미워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겨야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구분하려고 한다. ‘교회는 미워하지만, 주님은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엡 5:25).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분이 목숨 바쳐 사랑하신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렇게 하기 힘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1. 교회를 사랑하기 힘든 이유는 셀수 없이 많다

요즘엔 교회에 관한 대중적 이미지가 부정적이라서 교회를 사랑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 대중매체를 통하여 교회의 비리나 부패가 폭로되고 그 사실에 실망한 불특정 다수에게 ‘교회가 미안합니다’라는 식으로 사과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교회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스스로 떠안게 됐다. 하지만, 대중이 받아들이고 있는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로 지역교회를 사랑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역교회는 모든 교회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연대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물론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게 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안타깝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불성실하고 악한 배우자가 많다는 이유로 나의 배우자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세상에 비치는 교회의 이미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교회에게 기대하는 양질의 서비스를 받지 못해서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설교가 빈약할 때, 교회학교가 체계적이지 않을 때, 교회 행정이나 운영 방침이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질 때, 교회가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이 나의 취향과 다를 때, 교회가 제공하는 내 아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부족하거나 전혀 없을 때, 내 또래 구성원이 적거나 너무 많을 때, 친교를 나눌 그룹이나 행사가 주어지지 않을 때. 너무 많은 일을 시키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시키지 않을 때… 마치 더 좋은 학교 또는 학원을 고르는 것처럼 교회를 선택한다. 강점과 약점을 비교하고 계산하여 가장 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교회를 찾는다. 다니면서 계속 주변에 더 좋은 교회가 있는지 찾아보고 언제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를 발견하면 옮긴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바라보거나 선택한다면 지금 속한 교회에 언제나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교회를 사랑하기 힘든 이유는 특정 성도 또는 일꾼(목사나 장로, 집사 등 교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성도들) 때문이다. 그들의 말과 태도와 행동에 깊은 상처를 받고 오래 그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키워 교회를 온전히 사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성도에게 받은 상처는 극단적으로 그 성도를 피하고 멀리하면서 계속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꾼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 계속해서 그 일꾼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봐야 하고 또 그 리더십에 영향을 계속 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성도에게 사랑을 받고 지지와 응원과 격려를 받고 있어도 몇몇 성도 또는 일꾼과 이런 불편한 관계에 있다면 교회 전체를 사랑하기 힘들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용서와 화해 없이는 미움이 끝나지 않고 사랑은 온전히 꽃피우기 힘들다.

2. 하나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사랑할 수 있다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세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봤지만 안 되는 거에요’라고 말하며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그래도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는 권면을 들을 때, 자신이 더 노력하기만 한다면 교회를 사랑하기 힘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오해한 것 같다. 교회를 사랑하기 힘든 이유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우리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는 교회에 완벽한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세울 수 없고 세운다고 해도 조금의 실수나 부족함 없이 계속 운영할 수 없는 존재다. ‘더 노력하라’는 권면은 그런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에게 교회 사랑의 원천이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불가능하다. ‘안 되는 거’라고 말한 그 사람 말이 맞다.

교회를 사랑하는 힘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다. 다시 한번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들여다보자: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교회의 각 구성원들이 온전함을 이루어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은 교회인 우리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어떻게 그 일을 하시는가?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은 그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온전히 누리시고, 예수님은 “그들” 곧 교회 안에 계시면서 아버지께 받은 그 풍성한 사랑으로 교회를 온전하게 하신다. 우리는 요한이 즐겨 사용한 예수님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래서 그들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을 때, 그들은 온전함을 이루어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하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언제나 변함없이 풍성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관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랑의 친밀한 관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명령하셨다(요 15:9). 사랑을 잃고 미지근한 신앙을 보였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계 3:20). 예수님은 항상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문을 두드리면서 내가 들어가 더불어 먹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하라고 요구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의 초청을 받은 나의 태도이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분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교회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만이 교회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공급함을 받아 교회를 사랑하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교회를 사랑하는 힘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날마다 반역하고 넘어지는 교회를 어떻게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이토록 사랑하실 수 있는 것일까?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있을 때 맑은 말씀의 물로 씻어 정결하고 흠 없는 신부로 자기 앞에 온전히 세우실 것이라 약속하셨다(엡 5:27).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면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교회가 대단해서, 완벽해서,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택하신 교회를 위하여 아들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것이고, 아들이 자기 신부로 삼은 교회를 아버지가 영원히 사랑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나아가 이기적일 때가 많다. 내가 받은 상처,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대우, 내가 세운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교회나 성도의 상태 등. 자세히 관찰해 보라. 교회를 사랑하기 힘들어하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 교회를 미워하는 사람 중에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교회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 깊은 관련이 있음을 입증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변하지 않는 신실한 사랑을 풍성히 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에 조금도 도움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도 자기 형제나 자매는 사랑할 줄 모르는 자녀의 모습과 같다. 마음에 가득 찬 교만을 비워야 한다. 자기의 높아진 생각을 버리고 오랜 상처와 묵은 감정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그럴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채우실 것이다. 그리고 그 채워진 사랑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향하여 흘러갈 것이다. 당신이 받은 상처 또는 당신이 준 상처에 머물지 말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얻으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라. 그분이 사랑으로 남긴 상처는 우리의 모든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게 할 것이고, 우리 마음을 교회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