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주님의 책망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라고 말했다(신 8:5). 보통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해서 징계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징계도 사랑이 그 강력한 동기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3:19 라오디게아 교회).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는 책망받을 줄 알아야 한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라고 성경은 말한다(히 12:5-6; 잠 3:11-2). 그분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또 낙심하지 말라. 주님은 자녀를 사랑하셔서 자녀의 유익을 위해, 자녀가 당신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책망하신다(히 12:10). 책망받을 때는 마음이 즐겁지 않고 슬퍼도, 책망으로 연단되면 오히려 결실을 거둔다(“의와 평강의 열매”, 히 12:11).
어떤 면에서 성경은 책망의 책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책망과 바르게 함에 유익하다(딤후 3:16).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딤후 3:17). 그러므로 이제 나누게 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 주님이 교회에게 하신 책망에 귀를 기울이라.
주님은 두 교회를 빼고(서머나, 빌라델비아) 다섯 교회에게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세 가지로 요약해서 살펴보자.
1. “처음 사랑을 버렸다”에베소 교회
가장 충격적인 책망이 아닐 수 없다. 에베소 교회는 여러 가지로 칭찬을 받았던 교회다(행위, 수고, 인내,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거짓을 드러냄,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음, 2:2-3). 그런데 딱 한 가지 책망하신 것이 앞의 모든 것을 망친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2:4)
사랑 없이 무언가를 할 수 있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럴 수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랑 없이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방언, 예언). 사랑 없이 지식과 믿음을 자랑할 수 있다. 사랑 없이 구제하고 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런 유익이 없다. 아내를 위해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는 남편이 오로지 ‘의무감’으로만 한다면 아내는 그 많은 봉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은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의 동력이자 목적이다. 교회가 무엇을 하든지 그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언가 할 때 그것을 갈망하게 하고 행하게 하는 힘은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을 버렸다면, 교회는 많은 것을 할지는 몰라도 그 목적도 상실하고 힘도 잃게 된다. 쉽게 말해 왜 하는지 모른다. 힘에 부쳐 의무감에 한다(말라기).
주님께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실 때, ‘버리다’는 ‘갈라서다’, ‘떠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떠날 수 있을까? 환난, 핍박, 염려, 유혹, 낙심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을 알게 된 처음에 그리스도인이 보인 강력한 사랑(처음 사랑)을 생각하면, 그 사랑에서 떠난 이유는 둘 중 하나다: ① 하나님의 사랑이 딱 그만큼이거나 ② 하나님 사랑은 풍성한데 충분히 알지 못해서.
성경은 하나님 사랑이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도가 그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이렇게 구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하나님 사랑엔 한계가 없다. 다만 우리가 바다 같은 하나님 사랑을 겨우 한 방울 맛보고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게 문제다.
우리에겐 충전이 필요하다. 처음에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힘 있게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 사랑으로 뭐든지 하려고 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의무감으로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시기 전 무엇을 물으셨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장). 지금 주님이 당신에게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무엇으로 나를 섬기고 있느냐?’ 이전에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성찬, 말씀, 성경 공부, 기도, 성도와의 친밀한 교제, 사랑의 봉사 등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2. “거룩함을 버렸다”버가모, 두아디라 교회
주님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를 같은 내용으로 책망하셨다. “발람의 교훈”,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책망이었다(2:14-15).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요청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로 한 선지자다. 하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오히려 축복했다(민 22-24장, 말하는 나귀).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데 실패했지만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싯딤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음행과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게 했다(민 25장).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가 위치한 곳은 이방 신전이 가득한 곳이었고 자연스럽게 이방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거나 신전에 있는 창기들과 행음하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그런데 교회 안에 이런 세속 문화를 거부하지 않고 즐기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거룩의 소명을 버리고 세속에 빠진 자들이다.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신 내용을 보면 주도적으로 성도를 꾀는 자가 교회 안에 있었는데,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었다(2:20). 선지자로서 무언가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성도를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계 2:20). 도대체 어떤 가르침이 성도를 세속적으로 변하게 하는가? 니골라당과 여선지자 이세벨이 가르친 내용은 도덕(율법) 폐기론으로 불리는 구원 교리였다.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마음껏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구원의 확실성을 말하는 거라면 맞지만,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자세를 말한다면 완전히 틀렸다.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짓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믿음을 근거로 구원은 확실하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마음껏 죄를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간다. 마귀를 기쁘게 하거나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다. 만일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마음껏 죄를 즐긴다면 그는 여전히 죄의 종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원수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속에 빠뜨리는 사람과 더불어 세속에 빠진 거룩함을 버린 교회를 이렇게 책망하셨다(2:21-23).
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기억하라. 주님이 지금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신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를 주님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모든 환난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없지만,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주님은 때로 환난을 사용하신다(고전 11:30,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감찰하고 계신 당신의 뜻과 마음을 살피라. 주가 기뻐하지 않으실 모든 죄에서 돌이키라.
3. “생명력을 버렸다”사데, 라오디게아 교회
어떤 면에서 주님의 책망은 부패가 심화되는 교회의 문제를 보여준다.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리면 곧 거룩함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결국 생명력을 잃는다. 죽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죽었다’고 책망하셨다.
사데 교회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
라오디게아 교회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5-17)
두 교회는 사람이 보기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사데 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다는 말은 겉보기에 잘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죽은’ 교회였다.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였다(3:17). 겉으로 볼 땐 갖춘 것이나 내세울 만한 것이(사람, 물질, 사역 등)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지만 알지 못한다’고 평가하셨다. 생명력을 잃은 교회는 어떤 상태일까? 겉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면 주님은 무엇을 보고 두 교회가 생명력을 잃었다고 평가하신 걸까?
두 교회에 각각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데 교회는 “하나님 앞에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는 평을 받았다(3:2). 라오디게아 역시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3:16). 온전한 행위라는 건 완벽한 행위를 말하지 않는다(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 마음과 행위가 일치되는 것, 두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한다. 미지근한 것이 왜 문제인가? 두 가지 온도를 다 가지고 있어서다. 역시 두 마음의 문제다.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듯, 우리 마음 샘에선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 섞이지 않은 마음을 내야 한다(약 3:10-12).
두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차라리 세상을 죽도록 사랑하고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실컷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속 편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적당히 주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주님도 세상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사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가?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말해도 마음은 그리스도에게서 먼 주께서 가장 무섭게 책망하신 바리새인이 되어 사는 것이다(외식자, 가면을 쓴 가식쟁이로, 화 있을진저!).
만일 당신이 그런 상태라면 주님의 책망을 반드시 듣고 회개해야 한다. 당신은 처음부터 주님에게 속하지 않은 교회 안 가라지일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주님께 속해있어도 문제다. 주님의 생명력을 거의 맛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값싸게 여기고 있다. 어서 한 마음으로, 온전한 것으로 돌이키라.
우리가 책망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죄를 드러내 부끄럽게 하기만 하고 해결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다.
사랑을 잃은 자에게 주님은 지극히 크신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게 하신다(엡 3:19). 거룩함에서 날마다 멀어지려는 우리를 날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히 2:11). 우리 안엔 생명력을 높일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셨다(요 10:10). 그러므로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책망받을 때 기쁨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아시아 일곱 교회 중 우리가 가장 닮고 싶지 않은 교회가 있다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일 것이다. 칭찬이 조금도 없고 책망만 있는. 주님께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신 교회(3:16). 하지만 주님은 구역질 나는 교회를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셨다(3:19). 그리고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3:20). 주님은 우리가 문을 열고 그분을 맞이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와 다시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고 주님께 속한 사랑과 거룩과 생명을 받아 먹기 원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 회복을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