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말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는 교회에 심각한 질문을 던졌다. 세상은 교회가 필수적인지 의문을 던졌다(직장, 학교는 어쩔 수 없지만, 교회는 좀 쉴 수 있잖아?). 성도들도 ‘교회란 무엇일까?’ 그 정체성에 의문을 품었다. 유튜브로 말씀 듣고, 온라인으로 헌금하면 교회의 기능을 다 한 것인가? 그러면 교회는 단순히 영적 서비스 기관에 불과하지 않은가? 교회는 정부가 시키는 대로 얼마나 모일지, 모일지 말지 따라야 하는가? 이웃이 우려하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모이지 않아야 한다면, 이웃이 우려하는데도 목숨 걸고 모이는 사회주의 국가의 지하 교회 성도는 뭔가?
미국의 한 대형교회는 코로나 상황이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온라인으로만 예배를 드리겠다고 선언하여 대중의 칭찬을 받았고, 어떤 복음주의 교회는 코로나 기간 내내 현장 예배를 고집하여 정부 고발에 따른 법적 소송을 밟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주님은 어떤 교회를 칭찬하실까? 어떤 교회를 통해 일하실까? 결과적으로 우리가 쏟아낸 많은 질문에 바른 답을 주는 핵심 원칙은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있다. 교회의 최종 권위는 누구에게 있나?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어떤 권위를 가지고 교회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반드시 교회는 알아 들어야 한다.
주님이 교회에게 보인 권위(계 1장)
요한 계시록을 두루마리에 쓴 사람은 사도 요한이지만(1:11), 그 권위에 있어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시고, 천사를 통하여 그 종들(요한)에게 알게 하셨다(1:1). 9절에 보면 요한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을 증언했다는 이유로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 어느 ‘주의 날’(1:10), 성령의 감동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본 요한은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칭찬, 책망, 권면, 약속을 아시아 일곱 교회에 각각 전달했다.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린 지금 주님이 어떤 모습으로 교회와 함께하시는지 알 수 있다. 주님은 위엄 찬란한 왕, 거룩한 제사장의 권위를 보이셨다(1:13-18). 예수님은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었다(13절). 구약에 예언된 왕이신 메시야의 칭호다(단 7:13-4, 눅 17:24). 의복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다(13절). 대제사장의 예복과 흉판을 가리킨다(출 39:29). 그분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셨는데, 일곱 촛대는 20절에 해설된 것처럼 “일곱 교회”다(2:1). 예수님은 지금 교회와 함께 계신다. 전능하신 통치자, 거룩하신 중보자로서.
예수님의 머리와 털은 그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다(14절). 무궁한 지혜를 상징한다(단 7:9).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다(14절, 2:18). 모든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 모든 일을 선악 간에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15절, 2:18). 전능한 승리자, 견고한 왕국을 다스릴 주권자.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같이 웅장하고 위엄 있었다(15절, 겔 43:2). 그분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붙들려 있었는데(16절), 그 별은 아시아 일곱 교회 하나님이 세우신 “일곱 사자”, “일곱 일꾼”이었다(20절, 3:1). 주님은 무궁한 지혜와 공의로 오늘도 교회를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교회 일꾼을 붙들어 교회를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그분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왔다(16절, 2:12). 그리고 그분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았다(16절, 히 1:3). 주님 말씀은 양날 검처럼 예리하여 영혼을 살리거나 죽이실 수 있다(히 4:12; 계 19:11-15). 주님 얼굴엔 아버지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다(고후 4:6; 요 1:14).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1:8)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셨다(17-18절, 1:8, 2:8).
참고로, 요한은 자신이 본 주님의 권위 있는 모습을 아시아 일곱 교회에 각각 쓴 편지글 첫 줄에 다시 소개했다. 누가 말씀하고 계신지 모든 교회가 반드시 알라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교회를 위해 죽고 부활하셔서 교회를 죄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예수님. 세세토록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심판하실 전능자, 다시 오셔서 만국을 다스릴 왕이신 예수님. 그분이 지금 오른손에 교회의 일꾼을 붙들고 교회 가운데 계시면서 교회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장 먼저 칭찬이다. 주님은 ‘내가 안다’라는 말로 칭찬하셨다.
주님이 교회에게 하신 칭찬(계 2-3장)
1. “내가 너의 인내를 안다”
누가 알아줄 때, 정말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아실 뿐만 아니라 ‘내가 안다’라고 말씀해 주신다. 먼저, 주님은 교회가 인내하는 것을 아시고 칭찬하셨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인내를 안다고 하셨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다고 하셨다(2:2-3). 서머나 교회는 주님을 위해 환난과 궁핍을 겪었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을 들었지만 인내했다(2:9, 사탄의 회당). 버가모 교회에게 주님은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라고 하셨다(2:13). 교회 주소를 아신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다. 주님은 그들의 거주지를 “사탄의 권좌”라고 하셨고 그만큼 교회를 핍박하는 그 도시에서 버가모 교회의 충성된 성도(증인) 안디바가 죽임을 당할 때 그들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하셨다(2:13). 두아디라 교회에게도 그들의 “인내를 아”신다고 하셨고(2:19),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칭찬하셨고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하셨다(3:8, 10).
교회는 생존하기 힘든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과 같다. 세상이라는 밭은 돌 같은 환난과 박해, 가시떨기 같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뒤섞인 곳이다. 교회는 그곳에 죽어 열매를 맺는 일을 하고 있다. 엄청난 인내가 요구된다. 안팎에서 벌어지는 죄와의 싸움, 원수의 비방과 세상의 미움. 모든 것을 주 이름 위해 견디고 있는 교회를 주님은 아신다. 그 인내를 칭찬하신다(눅 12:32).
2. “내가 너의 거룩을 안다”
주님은 교회의 거룩함을 칭찬하셨다. 교회의 거룩은 교리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 모두 해당하는데, 에베소 교회의 경우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안다고 말씀하시면서 교리적 거룩을 지켜낸 것을 칭찬하셨다(2:2).
사데 교회에게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에 관하여 칭찬하셨는데 이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성도에 관한 칭찬이었다(3:4). 에베소 교회는 성공했지만 버가모는 실패했던 것이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었다. 칭찬을 받은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여(이방 풍습을 멀리 하는 것) 세속에 물들지 않고 교회의 거룩함을 지켰다(2:6).
교회가 교리적으로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유럽과 미국의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보라!). 잘못된 가르침은 잘못된 삶을 낳는다. 바른 교훈을 강단에서 또 사석에서 계속 나누는 것(공식적인 말씀, 성도의 교제), 성도가 서로 거룩한 삶을 권면하고 죄에 빠지면 권징하여 회복시켜주는 것은 주님께 칭찬받을 일이다. 우리는 계속 이 일에 힘써야 한다.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한다(딤전 3:15). 진리를 떠나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진리를 실천하지 않으면 교회는 외식하는 바리새인 무리와 다를 바가 없다.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 충성하는 교회는 그 일로 칭찬받는다.
3. “내가 너의 섬김을 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의 수고를 칭찬하셨다. 에베소 교회에게 “내가 네 행위와 수고…를 알고”라고 하셨고(2:2), 두아디라 교회에게는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을 아노니”라고 칭찬하셨다(2:19). 특별히 두아디라의 행위는 잠깐 반짝이거나 점점 사그러드는 게 아니라 점점 더 풍성해졌다. 주님은 그래서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인정해 주셨다(2:19). 빌라델비아를 칭찬하실 때는 그들이 작은 능력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말씀에 따라 수고했다는 것을 특별히 알아주셨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3:8).
‘회사는 돈을 받고 봉사하지만, 교회는 돈을 내고 봉사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주님의 칭찬과 보상을 굉장히 과소평가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섬김을 모두 아신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0:42). 주님의 보상은 영원한 만족을 준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아신다. 서로 용납하고 배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고 격려하는 모든 것에 기뻐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마 25:40).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행한 지극히 작은 일, 한 마디 위로의 말도 주님은 아시고 칭찬하신다.
결국,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셧다(마 16:18).
주님은 교회가 인내하는 것을 칭찬하신다. 코로나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다른 전염병, 정치 사회적 비방, 탈 기독교 문화) 교회는 인내할 것이고 주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이것을 기뻐하시고 알아주신다. 계속해서 주 이름을 위하여 교회로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말자.
주님은 교회가 거룩함을 추구하기를 기뻐하신다. 진리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또 삶을 날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맞추는 노력을 주님이 아시고 칭찬하신다. 세상은 급속도로 거짓에 빠져들어 가지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살아내야 한다. 케케묵은 사고방식이란 말을 듣더라도 상관없다. 주께서 이를 칭찬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교회가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알아주신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랑의 섬김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죽기까지). 교회는 하나 된 주님의 몸으로서 이 땅에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낼 의무가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섬길 때, 하나 되어 이웃을 사랑할 때, 교회는 계속해서 주님의 인정을 받고 주님 사랑을 전하는 손과 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