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4월 8일 타임지 커버 스토리 제목은 “Is God Dead?”(‘신은 죽었는가?’)였다. 이제 인류의 사상 가운데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 대중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반세기가 지나 2016년 타임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Is Truth Dead?”(‘진리는 죽었는가?’). 절대자를 지운 인류는 이제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을 잃어버렸다. 연쇄적으로 따라오는 질문은 “Is Morals Dead?”(‘도덕은 죽었는가?’)일 것이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다면, 옳고 그름을 가릴 수도 없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대표적인 무신론자는 그래서 도덕을 ‘상대적’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신을 버리면 절대적인 진리도 윤리 기준도 함께 버리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스티븐 마이어는 <세포 안의 서명>을 저술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은 런던 타임스 문예 부록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그는 만물이 저절로 생겼다고 믿는 유물론이 아니라 지적 설계자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믿는 유신론자로, <창조, 진화, 지적 설계에 대한 네 가지 견해>에서 네 번째 견해인 “지적 설계”를 지지하는 학자이다(부흥과개혁사, 2020). J. P. 모어랜드, 크리스토퍼 쇼, 앤 게이저, 웨인 그루뎀과 더불어 <유신진화론 비판>의 공동 편집자이기도 하다(부흥과개혁사, 2019). 이번에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간한 <하나님 존재 가설의 귀환>에서 마이어는 “하나님 존재에 대한 천문학적, 물리학적, 생물학적 증거들”을(부제) 제시하려고 한다. 어떤 면에서 타임스가 선정한 저자인 마이어는 이 책을 통해 타임스가 질문한 것에 하나하나 ‘아니오’(NO)라고 답변하는 셈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진리는 존재하고, 도덕 기준은 유효하다!
실험 과학은 가설과 검증의 과정을 통해 암묵적 동의를 얻은 이론을 ‘사실’로서 주장한다. 하지만 가설을 세울 때 빠뜨린 변수가 있다면(혹은 검증에 계속 실패한다면) 기존의 사실은 폐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 실험 과학은 ‘과학 철학’을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중력을 발견하고 측정 및 계산할 수 있지만, 중력이 왜 생겨났는지 알 수 없다. 실험 과학과 과학 철학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후자가 전자의 전제 혹은 해석 원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 철학의 두 물줄기는 유물론과 유신론으로, ‘과학자’에 해당하는 부류는 똑같은 가설과 실험을 하더라도 그 저변에 ‘신은 죽었다’고 믿는 전제를 가진 이들과 ‘신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로 나뉜다. 둘 다 ‘철학’ 혹은 ‘믿음’에 기초한다. 중요한 건 실험 과학이 둘 중 어떤 믿음을 입증하는가에 있다. 스티븐 마이어는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실은 압도적으로 유신론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무한의 시간과 기막힌 우연으로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는 유물론의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역사적으로 중력을 발견한 뉴턴을 비롯하여 많은 훌륭한 과학자들이 유신론적 과학 철학을 토대로 실험 과학을 전개했다. 마이어가 분석한 것처럼 현대 과학을 지금까지 발전시킨 토양은 그리스-로마 철학도, 동양 철학도 아닌 유대교-기독교 철학(신학)이다. 신이 존재하고 절대자의 설계대로 만물이 존재한다면, 그에 따른 자연법칙과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이 서양 과학을 다른 민족이나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시키는 모판이 됐다. 그런데 왜 과학은 신을 배제하게 됐는가? 마이어는 그 시발점을 과학의 획기적인 발견에 두지 않는다. 상황적으로는 30년 종교 전쟁에 지친 대중이 종교에 싫증을 냈기 때문이고, 사상적으로는 임마누엘 칸드, 데이비드 흄과 같은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유물론으로 발을 옮기는 결정적인 역할은 찰스 다윈이 해냈다. 그가 쓴 “종의 기원”은 만물의 기원이 신이 아니라 만물 그 자체라는 ‘철학’이 과학적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유신론으로만 설명 가능했던 실험 과학의 해설이 이제 유물론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그 설명이 얼마나 판타지 소설같이 허구적인지 상관없이.
<하나님 존재 가설의 귀환>은 결국 과학 철학으로서 유신론이 다시 돌아왔다는 선전 포고이다. 현대 실험 과학이 계속해서 밝혀내는 사실은 유물론이 아니라 유신론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대중은 여전이 종교에 싫증을 낸다. 사상의 전쟁에선 종말이 가까울수록 ‘그 모든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하는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굴복한 ‘적은 무리’에 비해 압도적으로 대세를 이룬다. 그래서 세상 풍조를 바꿀 수는 없다. 세상 임금 마귀는 현대인들이 귀신을 믿고 각종 점을 보며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것을 내버려 두더라도 과학이란 영역에 들어가면 신에 관한 손톱만큼의 믿음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사람이 아무리 애써 부정하려고 해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시 19:1).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시 19:3, 2). 실험 과학은 만물을 소생케하는 신비롭고 정교하며 강력한 특성과 능력을 관찰할 때마다 분명히 드러나는 지적 설계자 대신 현상을 설명할 핑계를 계속해서 만들어내야만 하는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까지는 ‘우주적인 인간 중심적 우연의 일치’가 그들의 변명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존재 가설”이 기독교인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실험 과학이 유물론을 지지한다는 주장에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주눅 들거나 겁먹을 필요가 없다. 기독교인에겐 유신론을 지지하는 과학적 증거가 아주 많다. 둘째, 마이어 같은 지적 설계 지지자의 노력의 결실을 잘 활용할 수 있다. <하나님 존재 가설의 귀환>은 신학자의 입장에서 깔끔하고 개운한 책이 아닐 수 있다. 최종 결론은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다’이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실을 길고 복잡하고 지루하게(누군가에겐)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기독교인이 현대 과학이 믿는 철학인 유물론과 충돌하는 성경을 불신하고 결국 배교를 선택한다. 우리는 마이어의 과학적 설명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결코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그 영역에서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다.
셋째, 우리는 변증을 훈련할 수 있다.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이론과 궤변을 알면 그 대답을 준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배할 수 있다. 우주와 만물의 법칙, 생물을 만들고 기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을 과학으로 측정하고 가늠할 때 우리는 그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과 능력을 찬양하고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감사와 영광을 우리 입술과 삶의 제물로 돌려드릴 수 있다.
기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과학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빛을 비추기가 힘들다. 부패할수록 소금의 맛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이 싸움을 멈추지 말라. 당신의 믿음에서 파선하지 않길 바란다. 당신은 올바른 곳에 서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왕 솔로몬은 모든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 밝혔다(그는 당시 생물학자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초목, 짐승, 새, 기어다는 것, 물고기에 대해 말했다, 왕상 4:31-3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그래서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명령들). 그러므로 도덕(선악)이 있으며, 진리의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기준대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