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강사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 나라를 구약의 예언부터 신약의 부분 성취, 미래에 온전히 성취될 부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까지 두루 살피며 청자를 고무시켰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듣게 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있었는데 그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강사는 다음 말씀을 펴서 읽게 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이 말씀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강사가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를 여러 차례 강조하여 읽으면서, 구원받은 자라도 육체의 일을 따라 행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있어도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였기 때문이다. 강사는 또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 이를 확증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 하리라(고전 6:9-10)
바로 이어서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이 앞선 경고가 고린도 성도의 구원받기 전 상태를 묘사하고, 그래서 ‘믿는다’고 말하면서 과거에 믿지 않는 자의 삶을 그대로 산다면 그는 거짓 신자로 드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 명백한데도 강사는 이를 무시했다.
또한 강사는 구약의 예시를 보여주겠다면서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첫 번째 세대를 언급했다.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오늘날 교회에 영적 교훈을 주며 방금 인용했던 구절들을 실례로 보여준다고 했다. 대다수 1세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진 건 아니지만 약속의 땅을 얻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신자도 하나님 나라 백성에서 단절되는 건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무서운 경고였다.
사실 이스라엘 두 번째 세대 중에서도 약속의 땅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전쟁하다 죽은 사람은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다. 아간과 그의 가족들이나 아이 성을 치다 죽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디에 해당하는 걸까? 끝내 몰아내지 못한 이방 민족은 무얼 의미하는가? 여호수아 시대가 지나고 암울한 사사기 시대가 임하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맙소사! 그럼 모세는??? 진지하게 따져 들어가면 사실 적합한 예시가 아닌데도 히브리서 3장에 기록된 내용이 흡사 위에서 말한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주장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 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7-19)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 안에서 받는 심한 박해를 피해 유대교로 배교하려는 독자에게 경고의 말씀을, 기독교 안에서 믿음을 지키는 이들에게 소망의 말씀을 제공한다. 위에서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 하리라”는 경고를 들어야 할 청자는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 곧 “믿지 아니”한 자들이다. 그들이 안식에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음이 있지만 삶이 온전치 못해서가 아니었다. 불신과 그 불신에 따른 불의한 삶의 결과였다.
왜 하나님 나라의 입장과 소유를 구분하려는걸까?
물론 성경은 보상의 개념을 가르친다. 달란트 비유 등을 통해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인이 갚으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마 25장). ‘냉수 한 그릇이라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은 좁고 협착한 제자의 길을 가볍게 만든다(마 10:42). 부활하신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속히 오시겠다 약속하셨고,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계 22:12). 그리스도인이 가진 믿음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며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히 11:6).
보상의 개념에 있어서 상이 없어 부끄러움을 당하는 장면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각자 세운 공적이 “그날에” 검증될 것이라고 말했다. 불로 태워 금과 은, 보석 같이 타지 않는 것을 세우면 불로 태워도 남아서 상을 받고, 나무, 풀, 짚 같은 것을 세워 타버리고 나면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라고 경고했다(고전 3:11-15).
그런데 입장과 소유를 구분하는 것은 단지 위에서 말한 보상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행한 대로 보상을 받는다는 말과 행함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거나 소유할 수 없을 것이란 말은 정말로 큰 차이가 있다. 왜 이런 성경에 없는 구분을 두려는 걸까?
그 이유는 사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사악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선한 목적을 가진다: 믿는 자들을 책망하고 권면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부지런히 살도록 하는 것이다. ‘입장은 가능하다’는 말로 구원의 확실성을 잃지 않도록 하면서도, ‘소유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로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다. 성경에 없는 개념은 항상 성경적인 가르침에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성경은 총체적인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의 작은 균열이 연쇄적으로 다른 교리에 영향을 미친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의 입장과 소유를 구분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첫째,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주관적인 성경해석이다. 앞서 강사가 인용한 본문은 모두 성도에게 쓴 서신서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적어도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믿지 않는 자의 삶(과거 그들의 삶)을 산다면 그들의 믿음이 거짓됨이 드러나고 그에 따른 마땅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란 말씀이다. 그들의 행함 없음은 믿음이 죽은 것임을 입증하고(약 2장), 불신자는 신자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믿음이 없이는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이 일관성 있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하지만 입장과 소유를 구분하는 사람은 본문의 문맥을 무시한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는 해석의 기본 원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아니, 적용하더라도 자기의 주관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쪽으로만 이용한다. 성경 해석의 원칙은 모든 본문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잘못된 도구는 다른 곳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구원이라는 엄청나게 중요한 교리에 문제 있는 해석법을 사용한다면, 다른 교리를 정립할 때 올바른 해석법을 사용할 가능성이 작다.
둘째, 은혜가 아니라 행위를 추구하게 만든다
‘예지-예정-부르심-칭의-영화’를 구원의 황금 사슬이라 부른다(“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 구원의 황금 사슬에 연결된 구원의 행위는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모두 부정 과거형으로 마치 과거에 모두 이뤄진 일처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 확실함을 보여준다.
구원의 황금 사슬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높이게 한다. 이어지는 로마서 8장 31-39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위해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도록 선한 일을 열심히 하라는 권면은 구원의 황금사슬 안에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에 이르게 하시는 과정 곧 성화의 은혜를 바라보라는 말과 같다. 하지만 성경에 없는 구분을 통해 성도를 협박하는 것으론 은혜를 바라볼 수 없다.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입장은 가능하나(칭의), 충분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성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들리기 십상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칭의에서 멈췄는가?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확실한 보장, “양자의 영”인 성령을 주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 있는가?(롬 8:15-17).
셋째, 결과적으로 성도에게 열심이 아닌 낙심을, 순종이 아니라 방종을 가져온다
도대체 어느 정도 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가? 한 번은 가톨릭 사제가 미국 토크쇼에 나와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기 때문에 60점만 맞아도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글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100점이라면 누가 감히 예수님 절반 이상의 인격과 성품과 완벽한 삶을 닮았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다. 불가능한 기준은 열심이 아니라 낙심을 가져온다. 어느 정도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그 나라를 ‘적은 무리’에게 주시길 기뻐하실까? 어차피 도달하지 못할 거라면, 오늘 열심을 낼 이유는 없다.
또한 불명확한 기준은 순종이 아니라 방종을 낳는다. 강사가 입장과 소유를 구분하여 설명할 때, 몇몇 청자는 눈으로 ‘그러면 저는 입장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천국 입성이 가능하다면, 소유가 좀 없다고 해도 지옥 가는 건 아니니까. 어떤 면에서 그들에게 ‘불성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것과 같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두 가지 영역으로 신자와 비신자를 칼같이 구분한다. 회색은 없다. 진리와 거짓에 양다리 걸치는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거나 없고, 빛에 속했거나 어둠에 속했으며, 진리를 따르거나 거짓을 따르고,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세상을 사랑한다. 이런 성경적 가르침이 방종을 깨우치고 순종을 불러일으킨다. 성경에 없는 가르침 때문에 오히려 어둠에 속하여 거짓을 따르고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입장’은 가능하다고 믿는 자가 생겨난다. 방종에 빠져 살면서도 헛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만큼 무섭게 잘못된 가르침은 없다.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강도 중 한 사람이 회심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죽어가던 그에게 참된 소망을 주는 확실한 약속을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43). 우리는 강도가 주를 위해 살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걸 알지만 그가 낙원에 들어갔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주님과 함께 낙원을 누리고 안식에 들어갔음을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통해 확실히 믿는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또 어떤 근거로 그가 낙원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로 보고 이 땅에서 신자가 누리는 삶의 질(영생의 삶) 나아가 천년왕국에서 유대인이 누리게 될 무언가를 ‘소유’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성경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가 아니라 극단적인 세대주의의 틀에 따른 과장된 해석이거나, 입장과 소유를 구분하는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진 잘못된 해석이다. 성경은 이런 개념 없이도 충분히 성도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