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0일 한국일보에 실린 “페미니즘은 남성 혐오가 아니라 ‘성차별주의’ 반대다”라는 기사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벨 훅스(1952-2021)의 책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소개했다. 저자는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세상”을 추구한다. “누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와 가능성의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누군가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누리는 자유란. 무언가 혹은 누군가로부터 요구받지 않고 통제받지 않고 타고난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은 얼마나 평화롭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세상인가?
어떤 면에서 페미니즘의 정신은 성경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이 페미니즘을 지지하기도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말한다. “여호와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시 146:7).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메시아로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셨다(사 61:1; 눅 4:18). 성경의 진리는 사람을 억누르고 통제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 세상엔 각종 편견과 정죄가 가득하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모든 사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성경을 인용하며 페미니즘을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크리스천이 참으로 많다.
하지만 “거짓의 아비” 사탄은 사람을 속이는 데 있어 하수가 아니다. 노골적인 거짓을 처음부터 들이밀지 않는다. 자유와 평안을 배척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 가치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아닌가? 많은 사랑을 받는 노래, 존 레논의 “이매진”은 삶을 옭아매는 여러 가지 개념, 천국, 지옥, 국가, 종교, 소유를 없애면 인류애와 평화만 남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정말 그럴까? 하나씩 따져보자.
1. 사람이 타고 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자유를 타고나지 않는다. ‘죄’를 타고난다. 성경은 그래서 사람을 “죄의 종”이라 부른다(요 8:34).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 6:17).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죄다. 근본적인 문제는 나를 지배하는 누군가/무언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죄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죄에 얽매여 있다. 성경이 약속한 천국은 죄가 마침내 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이다.
2. 하나님은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폭정에서 어느 정도 보호하시기 위해서 여러 권위를 세우셨다. 국가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순기능을 담당한다(롬 13).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가르침으로 어둔 세상의 빛이 되어 죄로부터 구원 얻는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마 5:14). 가정은 부모의 권위 아래 자녀를 보호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구성이다. 안타깝지만 죄인으로 구성된 권세 역시 부패할 수 있다. 국가, 교회, 가정 모두 죄로 인해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래서 권세가 없는 세상을 기분 좋게 ‘이매진’(상상)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죄를 만만하게 보고 자신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여긴 것이다. 권세가 없는 세상은 그나마 있던 브레이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3.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들어가야 한다
페미니즘은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지만, 모든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죄에서 놓임 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이 우리를 무척 사랑하셨다는 걸 알고 감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죄의 포로가 구출됐다는 말은 확실히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이고,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들어가 그분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성령의 능력으로 몰아내도록 의탁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에베서소 4장에서 이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일을 하신다. 죄의 노예로 살았던 삶의 행태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삶을 입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라고 표현했다(롬 6:18). 참된 자유는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올바른 대상 밑에 구속되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구속되어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모든 자유로운 사람의 본분이다(전 12:13).
결론: 페미니즘은 죄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가?
차별은 죄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의다. 그리스도인은 차별에 반대해야 하고 차별 아래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이 차별이라고 말하는 것 중에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인 경우가 많다. 페미니즘이 주적으로 삼는 지배자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 나아가 죄인의 ‘자유로운’(?) 삶을 억제하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이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것이 차별이라는 죄로부터의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지배와 그분의 규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인지 반드시 분별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평화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화목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능력,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는 하나님의 평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에게만 주어진다. 사랑할 자유, 성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자유, 임산부의 자기 선택의 자유, 차별 없는 자유 등 오늘날 세상이 부르짖는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인가? 죄로부터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종이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후자를 지지하거나 응원하거나 칭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