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고린도전서 11:5

이 말씀은 ‘모든 자매는 너울을 반드시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몇 주 전 유평교회에서 너울에 대한 성경적인 분별을 재정립하면서 이 구절이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의 문맥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을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여자’가 아니라 ‘기도나 예언을 하는 여자들’이 머리에 쓰지 않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도나 예언을 할 때가 아니라 교회의 어떤 모임(전체적으로 모이는 모임이 아닌 경우) 가운데서 공적으로 기도나 예언을 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을 자매가 가르치거나 자매가 자매를 가르칠때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여 가르치거나 기도할 때 너울을 쓰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머리에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은 머리를 민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도나 예언의 주체는 여자이며, 이들이 잘못한 것은 머리에 쓰지 않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을 갖는 분들이 있어 더 명확하게 그 의미를 밝히려고 이 글을 씁니다.

첫째, 기도나 예언의 주체는 여자가 아니다?

어떤 분은 여기서 기도나 예언을 한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다른 곳 (고전 14:34; 딤전 2:11-12)에서 분명히 여자에게 잠잠할 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자가)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NASB성경은 이 해석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But every woman who has her head uncovered while praying or prophesying disgraces her head

Praying “기도하다”와 prophesying “예언하다” 앞에 주어가 생략되었으니 기도와 예언을 한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영문법에 따르면 praying, prophesying 앞에 주어를 생략하려면 반드시 그 앞에 주어진 주어와 일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praying “기도하다”와prophesying “예언하다”의 주체를 NASB에서 생략한 것은 기도와 예언의 주어가 그 앞에 주어진 주어 every woman “여자”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기도와 예언의 주어가 앞에 주어진 every woman “여자”와 다르다면 영문법을 따라 반드시 주어를 따로 써줘야 합니다. KJV성경을 보면 “every woman that prayeth or prophesieth”이라 번역되었고, NIV성경도 “every woman who prays or prophesies”으로 번역하여 기도와 예언의 주체가 every woman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만약 NASB가 기도와 예언의 주체를 남자로 번역한 것이라면 (영문법상 그런 해석은 나올 수 없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문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권 성도들에게 NASB는 KJV나 NIV와 똑 같은 의미를 전달해줍니다. 고린도전서 11:5절에서 분명히 기도와 예언의 주체는 여자인 것을 말해줍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이 구절이 원래 쓰였던 헬라어를 살펴보면 의미는 더 명확해집니다. 헬라어는 오늘날의 불어나 독일어처럼 동사에 남성형, 여성형, 단수형, 복수형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밥을 먹는다”에서 “먹다”라는 동사와 “한 여자가 밥을 먹는다”에서 “먹다”라는 동사는 서로 의미는 같지만 그 형태에 있어서 전자는 남성형 동사가 후자는 여성형 동사가 사용됩니다. 때문에 동사의 형태만 파악해도 이 동사의 주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단수인지 복수인지 알 수 있습니다.

Προσευχομένη, προφητεύουσα 앞의 동사가 “기도하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뒤의 동사는 “예언하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입니다. 고린도전서11장 5절에 쓰인 이 두 단어 모두 여성형 단수 형태 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남자가 기도나 예언을 하는 동안 여자가 머리에 쓸 것을 말했다면 그는 분명히 남성형 동사를 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나 예언의 주체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성형 단수를 썼다는 것은 그 앞에 주어진 주어, 여성형 단수인 πᾶσα…γυνὴ (“every woman”) “여자”가 바로 기도와 예언의 주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한글, 영어, 그리고 원어인 헬라어 모두 고린도전서 11:5절의 기도와 예언의 주체가 여자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 “쓴 것을 벗고”는 여자가 이미 쓰고 있던 것을 벗는다는 말이 아닌가요?

한글 성경을 보면 “머리에 쓴 것을 벗고”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여자가 이미 쓰고 있던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이미 쓰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여자가 쓰고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래서 모든 여자는 예배시간에 너울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쓴 것을 벗고”라는 말이 영어로는 “who has her head uncovered” 헬라어로는 ἀκατακαλύπτῳ “uncovered”로 단순히 지금 기도나 예언을 하는 여성이 머리에 쓰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이미 쓰고 있었다는 것이나 쓰고 있던 것을 벗었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이나 그 번역본인 영어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쓴 것을 벗고”보다는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새번역) 혹은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하면” (현대인의성경)이 이 부분에 있어서는 더 오해를 줄일 수 있는 번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만약 여자가 예배 중에 질서에 순종하기 위해 다 쓰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왜 여자들이 이미 쓰고 있던 너울을 기도나 예언할 때 벗으려고 했을까요? 질서에 순종하기 위해 모두 쓰고 있었다면, 더 질서가 분명히 드러나야 할 기도나 예언시에 왜 벗으려고 했을까요? 이미 쓰고 있다는 가정은 이러한 어려운 질문과 부자연스러운 결론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원문에 입각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여자가 이미 쓰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쓰지 않고 하는 그것을 사도바울이 지적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셋째, 속으로 하는 기도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속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대표기도를 할 때 그 것에 마음으로 화답하여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5절에 기록한 여자의 기도가 속으로 하는 이 기도를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앉아서 기도에 동참하는 모든 여자가 머리에 써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위의 해석을 지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1.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용한 “기도하다”는 단어의 의미: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기도하다”는 단어는 11장에서 3번, 14장에서5번 나옵니다. 총 8번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기록된 “기도하다”는 단어는 분명하게 예배 중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14, 15절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소리 내지 않고 하는 방언 기도는 없습니다. 13절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도는 속으로 하는 기도도 포함할 수도 있지만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통역하기를 구하라는 것이지 속으로 하는 기도인지 겉으로 하는 기도인지가 아닙니다. 또한 통역이 필요한 기도라면 반드시 겉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속으로 하는 기도를 어떻게 통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예배 중 밖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가리킬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2. 고린도전서 11장의 분명한 명령의 대상: 사도바울은 예배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린도전서 11-14장을 기록하였습니다. 11장에서는 너울과 만찬, 12-14장은 은사 특별히 예언과 방언 가운데 질서입니다. 11장에서 “기도하다”는 단어는 3번 사용되었으며 4절에서 남자가 하는 기도에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나머지는 5절과 13절). 여기서 바울은 남자가 머리에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명령하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남자라면 누구나”라고 말하면서 여러 다수에게 명령하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대상을 지목하여 이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복수형: 예를 들어 “너희가,” “모든 남자들은,” “누구나”). 바울은 단수형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분명한 대상을 가리키면서 그 대상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남자로서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남성형 단수 남성형 단수 남성형 단수 남성형 단수 3인칭 단수

 

여자로서 머리에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여성형 단수 여성형 단수 여성형 단수 여성형 단수 여성형 단수 3인칭 단수

사도바울의 명령은 분명하게 기도나 예언을 하는 그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앉아서 동참하는 사람에 대한 명령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복수형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바울의 타깃은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와 예언을 하고 있는 그 사람입니다.4절에 기록된 주어, 동사 모두 한 사람 가리킵니다. 바로 기도나 예언을 하는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머리에 무엇을 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나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머리에 무언가를 썼기 때문에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합니다.

5절과 13절은 같은 “기도하다”라는 단어가 “여자”에게 사용되었으며 여성형 단수가 사용되었습니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은 기도나 예언을 하는 그 한 대상을 타깃으로 명령을 합니다. 머리에 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앉아서 참여하는 자들에 대한 명령이 아닙니다. 기도와 예언의 주체가 되는 그 당사자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명령입니다.

특별히 5절의 단수형 주어인 πᾶσα…γυνὴ (every woman)은 한글 성경에는 "무릇 여자로서"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 πᾶσα는 "모든"이라는 뜻과 "각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All이 될 수도 있고 Every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전자는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후자는 각각 개개인을 한 사람 한 사람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이 every라고 번역했듯 이 본문에서는 "각각"이라고 해석되는 것이 옳습니다. All이라고 해석되는 경우는 대부분 πᾶσα 앞에 정관사 (the)가 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는 기도나 예언을 하는 여자 각각을 가리키는 명령이라고 보는 것이 옳으며 "모든 여자는"이라고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3. 일관성의 문제: 또 한가지 만약 “기도하다”는 단어가 앉아 있는 여자에게도 적용 가능하다면 그 뒤에 이어지는 “예언하다”는 단어 역시 앉아 있는 여자에게도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앉아서 함께 동참할 수 없는 은사입니다. 예언은 소리 내어 밖으로 말해야 하며 대표성을 갖고 다수 앞에서 되어야 합니다. 앞의 기도는 속으로 하는 것을 포함하고 뒤의 예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일관성이 조금 결여됩니다.

또 한가지, 바울은 이 기도와 예언의 문제를 고린도전서 14장까지 일관성을 갖고 말합니다. 물론 11장은 여자가 질서에 따라 할 것에 대하여 초점을 맞춰 설명하는 측면이 있지만, 14장에서도 같은 두 가지 은사의 문제, 기도(방언)와 예언에 대해서 말합니다. 방언 기도와 예언이 어떻게 질서 있게 교회에서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11-14장에서 이 방언 기도와 예언은 항상 소리 내어 밖으로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14장에서 통역 없이 방언을 하려거든 차라리 집에 가서 혼자 하라고 말할 정도로 이 방언이 만들어내는 잡음과 혼란이 교회 안에 심했던 것 같습니다. 11-14장에서 속으로 참여하는 기도에 대한 바울의 특별한 가르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4. 불가능한 적용: 만약 사도바울이 11장 5절에서 속으로 하는 기도를 포함하여 여자가 기도할 때 머리에 쓰라고 명령한 것이라면, 이는 적용하기 쉽지 않은 명령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18에서도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 두 말씀에서 “기도”는 조금 더 넓은 의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을 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기도의 개념이 이렇게 포괄적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고린도전서 11장 5절의 “기도”를 여자의 공적인 기도로 제한하지 않고 더 넓게 속으로 하는 기도도 포함된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가지고 있던 이 넓은 개념의 기도는 왜 적용될 수 없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그래서 실제로 아침부터 밤까지 늘 너울을 쓰는 것이 고린도전서 11장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자의 너울과 하나님의 영광>을 쓴 피터 위 형제님은 믿지 않는 어린 딸에게 너울을 쓰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고 칭찬받을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적용하기 참 쉽지 않다는 것에 있습니다. 너울의 대상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확장되었고 너울을 쓰는 경우도 ‘언제 어디서나’로 확장되었습니다. 직장에 출근할 때 너울을 써야 합니다. 화장실에서도 너울을 써야 합니다. 믿지 않아도 써야 합니다. 바울의 마지막 강력한 명령을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아주 강력한 어조로 말합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명령이 속으로 하는 기도에도 해당되고 더 나아가 마음으로 하는 모든 기도에 해당된다면 여자들은 반드시 너울을 항상 쓰고 다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에서 너울을 내리는 순간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정녕 우리에게 지키지도 못할 이 법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지키지도 못할 율법에 대해서 강경하게 대항했던 사도 바울이 말입니다.

이러한 논리가 억지라고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사실 실제로 자매들 사이에서 너울을 항상 쓰는 사람은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가 가르쳐왔던 것이 이와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창조의 질서와 구원의 질서가 너울을 통해 보여지는데 우리가 항상 그 진리를 전파하면 좋은 것 아니냐? 그래서 모든 자매가 써야 한다’라고 말을 합니다. 크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예를 기억해보십시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삶의 모든 영역에 확대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한 범위 내에서 자유와 쉼을 누리며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만들며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위의 해석과 같이 바울이 여자들에게 기도와 예언할 때 너울을 쓰라고 한 것이 분명하다면 그 범위 안에서 순종하면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데, 그것을 확대 적용하여 항상 쓰게 만드는 것은 유대인과 같이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자매들에게 지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많은 자매들은 항상 쓰는 것을 이상적이고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젊은 자매들을 권유하고 가르치며 그렇지 않을 때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을 기록한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결론

성경 해석의 원리: 5절에서 말하는 기도는 항상 우리가 속으로 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예배 시간 혹은 다른 소모임들(자매회, 주일학교, 학생회, 청년회)에서 하는 기도로 제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위에 제시한 일관성의 문제에 대해서 억지 주장같다고 반감을 갖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한 가지 아주 훌륭한 관찰을 하신 분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16절이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찾아내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그 어디에도 “너희가 모일 때…” 혹은 “예배할때에…”라는 말이 없지만, 고린도전서 11-14장 전체적인 문맥을 통해 그 사실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역사적-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건전한 성경해석의 원리입니다.저는 이 원리에 다른 사상이 스며들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역사적-문법적 성경해석의 원리를 조금만 더 적용해봅시다. 분명히 헬라어 원어는 11장 5절에서 말하는 기도와 예언의 주체를 여자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사용된 “기도”라는 단어는 이 기도가 예배할 때 공적으로 소리 내어 드려진 기도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11장에서 계속해서 단수형 동사와 명사를 사용하여 공적으로 기도와 예언을 하는 (여자들은 여자들의 모임이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임에서) 그 대상을 향하여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앉아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령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언이 공적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기도 역시 공적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자연스럽습니다. 쓰고 있었던 것을 벗었다는 표현은 원어나 그 번역본인 영문성경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14장까지 기도와 예언은 항상 대표성을 가지고 겉으로 소리 내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역사적-문법적 성경해석의 원리는 일관성을 갖고 ‘11장 5절의 기도가 속으로 동참하는 기도를 포함한다’는 명제를 지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속으로 하는 기도도 포함되며 그래서 기도로 동참하는 자매는 다 너울을 써야 하고 그래서 모든 자매는 예배시간에 너울을 써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사실 왜 그러한 해석이 만들어지는지 그러한 해석을 만들어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해석의 원리가 그러한 해석을 낳았는지, 어떤 근거로 그렇게 해석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엔 그냥 그렇다는 식의 대답은 옳지 않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자기 생각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 선배들이 그렇게 해왔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과거에 우리 선배들은 여러 가지 훌륭한 일을 했지만 동시에 성경 외의 책은 다 갖다 버리고 학교도 가지 말고 직장도 다니지 말고 전도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의미를 찾기 원한다면 올바른 성경 해석의 원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견해나 내 생각 혹은 과거의 경험과 관습이 성경해석의 첫 번째 해석 원리로 적용되면 위험합니다.

가장 안전하고 객관적인 성경해석의 원리는 본문 자체를 잘 살펴보고 그 배경과 문법과 역사를 고려하여 판단하는 역사적-문법적 해석의 원리입니다. 저는 이 원리에 따라 고린도전서 11장 5절이 공적인 모임에서 여자가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너울을 쓸 것을 바울이 명령하고 있다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기도와 예언의 주체는 분명히 여자였고,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할 때는 분명히 기도나 예언을 할 때였습니다. 기도나 예언을 하기 전에 이미 쓰고 있었다는 근거는 없고 기도 역시 속으로 하는 기도를 포함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적-문법적 원리에 따라 해석한 고린도전서 11장 5절은 여자가 공적으로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반드시 너울을 쓸 것을 명령하고 있으며 앉아 있는 사람들이 써야 한다는 명령은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