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전심, 나뉘지 않은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하나님의 전심을 기억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는 죄인이었다. 다윗은 죄인의 이런 마음을 잘 묘사했는데, 시편 14편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한다(시 14:1). 사도 바울 역시 죄인이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말했다(롬 1:28). 죄인의 마음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은 부패한 마음이고 그 마음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 우리 눈에 보기에 착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고 행한 일이기 때문에 그조차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고 합당하지 못한 일이며 그 외에도 많은 죄를 짓는다.

그런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갖게 되었는가? 사도 요한은 신자들에게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설명했다(요일 4:19).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는가? 요한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했다(요일 4:9).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때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고 밝혔다(롬 5:8).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물로 보내신 하나님, 그 크신 사랑을 받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두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전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와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요 14:20).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옛 언약의 백성에게 전심을 요구하실 때도, 먼저 자기의 전심을 다한 사랑을 보여주시며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애굽의 노예로 고통받던 이들을 언약에 신실한 사랑으로 불러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라는 약속대로(창 17:8)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사랑으로 맺은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은 전심을 요구받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새 언약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둔 자들 또한 하나님의 전심이 담긴 사랑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구약시대 옛 언약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전심의 고백을 인용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이 같은 은혜는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벧전 2:24-25).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자기 전부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전부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에서 하나님을 소유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런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전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전심을 잃어버렸다면, 마음이 나뉘어 하나님과 함께 다른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품고 있다면, 먼저 전심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천 년 전 십자가 위에서 끝나버렸다고 은연중에 생각한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맺어진 당신의 하나님—하나님의 당신의 관계 속에서(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자녀의 관계 속에서) 풍성한 아버지의 사랑은 자녀인 당신에게 전심으로 향한다.

조용히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전심을 생각해 보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한 사랑을 태초부터 지금까지 자기의 택하신 백성에게 어떻게 베푸셨는지 살펴보라. 신실하지 못한 당신의 마음과 신실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비교해보고,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인 당신과 영원하고 무궁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비교해보라. 그리고 그분이 주권적으로 당신과 맺은 관계 속에서 당신이 얼마나 큰 돌봄과 사랑을 받고 있는지 헤아려 보라. 그러면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돌보시나이까(시 8:4, 그를 – 저를로 변경)

우리는 ‘탕자 이야기’에 감동한다. 신실하지 못한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 나와 아들의 지위와 특권을 모두 회복 시켜 주신 아버지의 신실한 사랑에 감격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구원받을 때 모두 탕자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격하는 놀라운 경험을. 그리고서 우리의 전심을 변함없이 아버지께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다. 사도 바울이 탄식한 것처럼 마음에 하나님을 사모하여 품지만, 육신은 계속 반항하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하려 한다. 그리고 종종 그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한다. 그럴 때, 우리는 반드시 먼저, 아버지의 사랑을 감격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아버지 사랑을 바라보는 그 힘, 하나님의 전심에 열광하는 그 힘이 바로 우리가 그분께 전심의 사랑을 돌려드리는 힘이요 비결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