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 많은 질문들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그 중 어떤 질문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도 있습니다.
과거의 신학자들은 "하나의 핀 위에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춤을 출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열심히 논쟁하기도 했습니다. 답을 안다 한들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 10:25-29에서 우리는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율법사의 질문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한 율법사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가 예수님께 나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꼭 그가 무언가를 “해서”, 즉 행위로 영생을 얻으려고 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이 정말 영생을 얻는 것이었다면, 그는 정말 제대로 된 질문,
즉,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제대로 된 분, 유일하게 정답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에게 물은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순수했다가 보단 의도적이었죠.
이 질문의 목적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의 자손으로서, 또한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단지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라는 선생이 얼마나 자기의 질문에 대답을 잘 하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죠.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또 다른 질문으로 답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질문"을 좀 어색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아주 자연스러운 수업 방식이었습니다.
학생의 질문에 대해 선생이 바로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학생이 다시 한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질문을 한 사람이 율법사였기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덧붙이셨죠.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율법사에게 있어 이런 질문은 일상적이었습니다.
그 자신 스스로에게도 많이 던진 질문이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비슷한 질문들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도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신 계명입니다(마 22:37-40).
이 율법사가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전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을 알고,
다음 질문 (29절,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을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답을 말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최소한 그는 정확한 답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도 율법사의 말이 맞다고 하시면서 그것을 “행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28절).
문맥에 비추어보면 여기서 “산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따라서 이 말씀은 율법사가 처음에 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간이 행위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성경은 일관성 있게 영생을 얻는 것, 즉 구원은 어느 때든지 "믿음"으로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은 자, 즉, 구원을 받은 자의 올바른 모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율법사는 이미 자신을 그런 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스로를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네가 정말 그러하냐?"라고 묻고 계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의도는 다음 절에서 이 율법사가 보인 반응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 했다는 말이죠.
만약 그가 “어린 아이”와 같은 자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눅 10:21)?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그 계명을 100%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신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롭고 슬기롭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숨기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율법사로서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기에 자신의 지혜를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사용하였고
자신을 옳게 보이게 하는데 사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잘 알았던 그의 이러한 교만은 그를 옳게 보이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쌍해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자신이 이미 영생을 얻은 자라고, 혹은 최소한 가장 가까운 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스스로가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
세상의 많은 “지혜 있는 사람들”이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과 같은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꼭 학식이 높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고 자신의 지혜를 믿고 좇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서 말하는 지혜 있는 자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성경을 보지도 않으면서 거부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성경을 잘 알면서도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지만 어리석어 진 것입니다 (롬 1:22).
우리의 삶에 대한 해답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지혜에 귀 기울이는 겸손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시고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중요한 질문의 답을 찾고 계신다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성경을 통해 그 분이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그 답을 찾으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나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셨고 그렇게 하려는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럼 이제 그렇게 "행하며"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