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0)

미국에 오기 전까지 수년간 학생회 교사로 일을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십대 학생들과 관련된 문제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지만

어렸을때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
그래서 교회에 빠짐없이 계속 출석하고
몇번의 전도집회를 통하여 확실히 구원받았다고 응답한 학생들
그 아이들이 말씀시간에 고개를 푹 숙이고
전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을때에 (혹은 없는 것처럼 보일때에)

도대체 이 아이들을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인가?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고민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님들 중에서는
"아이가 숫기가 없어서 그렇다."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 주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살고자 헌신하지는 않은것 같다."
"요즘 세대들이 그렇다. 자기의견이 부족하고 수동적이다."

라고 말씀해주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사실,
은혜받을 가치없는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호의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전도집회 기간에
첫째날은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죄에 대한 자각)
둘째날은 죄의 댓가는 무엇인가? (심판에 대한 자각)
셋째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은혜에 대한 자각)

그래서 둘째날 설교를 마칠때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인지,
우리가 이 죄의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죄의 댓가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지 배웠습니다.
내일이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내일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해결책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일 꼭 오십시오!"

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학생캠프에서도 이렇게 복음교제를 하고나서
마지막날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앞에 나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깨달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간증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아이들이 교회로 돌아와 주일에 말씀을 들을때
성경과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으며, 물어보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실을 믿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사실도 믿으며
그 사실에 감사한다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메세지를 믿고 받아들였으니 일단은 구원을 받았다고 봐야할까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누가 대신 나를 위해 사형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그 이후의 삶이 어찌되었든 일단 무죄가 되는 것처럼
값지 못할 만큼 많은 빚을 진사람이 모든 빚이 탕감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나중에 그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와 관계없이 일단 자유인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다면 일단은 구원은 받은 것이며
주를 위해 열심히 살고자하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하는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삶은 추후에 따라와도 되는 것일까요?

두가지가 분명하게 구분 가능한 것일까요?
마태복음 13장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고있습니다.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먼저 이 말씀은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들어야하는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19절에 "천국말씀" 이라 하심을 통해 뿌려진 씨앗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키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특별히 가르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24-30절의 다른 비유를 통하여 곡식과 가라지를 대조하면서
가라지(열매가 아닌 것)는 결국 불사르라고 명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30).
가라지를 가르키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 (41), 악인 (49)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말씀이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신자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순종하여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게 되며, 불에 던져 넣어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42)
말도 안되는 결론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가르치는 것은
구원의 메세지에 대한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복음에 대한 네가지 반응들을 보여주셨습니다.
1. 길가
2. 돌밭
3. 가시떨기
4. 좋은땅

그러나 이 네가지 반응은 결론적으로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열매 맺지 못하는 땅
2. 열매 맺는 땅

한가지 놀라운 것은 돌밭에 뿌려진 씨는 심지어 싹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싹이 나왔다 하더라도
"열매 맺지 못하는 땅"에 분류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하여주신 비유의 뜻을 들어봅시다.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 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여 주신 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을때에 악한자 (사단-요일 5:19)의 방해로 깨닫지 못하며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일 5:19)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감정적으로 기뻐하고 좋아하지만 (싹이 났다고 표현함)
결국 환난이나 박해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고

어떤 사람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들이 강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가지의 경우 모두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지만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반면 좋은땅에 뿌려진 사람은 말씀을 들었을뿐만 아니라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다 말씀을 들었다는 것에서 차이가 없지만
진실로 깨달은 자의 유일한 차이점은
바로 열매(결실)입니다.

열매 혹은 신자의 행위가 구원의 참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은 이 모든 비유를 한마디로 결론지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야고보서는 강력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그렇다면 신자의 구원에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도 포함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않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의를 절대로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며,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조금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엡 2:8-9)

모든 신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으며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이 진정 사실이라는 증거는
바로 우리의 행위 (열매, 결실) 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거듭남의 증거,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구원의 메세지를 듣고 알고 믿고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메세지를 듣고 깨달아 그 결과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막 구원받은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아서
장성한 자처럼 살 수 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갓난아이는 아이답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는 말씀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라고자 하지 않으며 젖을 먹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는
신령한 젖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영적으로 자라나며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두려움과
사랑하는 학생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제 우리는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열매 없는 아이들이
구원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술이 말하는 고백을 통해 구원의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맺는 열매를 통해 구원의 여부를 가려야할 것입니다.
(아이들의 구원 여부를 우리가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잘 분별하여 돕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하여 돌아가신 사실에 감사하며
때론 간증 할때에 눈물을 보인다 할 지라도
심지어 그들의 삶에 아주 드물게 싹같은 것이 보인다 할지라도
결국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말씀을 들었으나 깨닫지 못한자로 분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학생회를 통하여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아이들에게 믿는 자 답게 살라고 가르쳤는지 모릅니다.
마치 생명이 없는 아이에게 음식을 계속 먹이면서 어서 자라라고 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복음의 모든 메세지를 인정하고 믿었다고 하는 아이들의 고백을 통해
그들이 구원받은 자들이라 분별하고
다만 열정이 부족하고 수동적이며 아직 헌신되지 않은 것 뿐이라는 진단을 기반으로
그 열정에 불을 지피고 그것이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그래서 더 열정적으로 주를 위해 헌신된 삶을 살수있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뿐만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수있게 도와야겠다는
이분법적 사고로 아이들을 대해왔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곧 하나님의 제자인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뿐만 아니라 주인(주님)이 되신다는 것을
믿고 깨달아야 참으로 구원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롬 10:9)

입으로 시인하나 삶의 열매가 없는 아이들은 구원받지 못한 아이들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처럼 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마태복음 13장 비유를 통하여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하는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사단이 틈타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둘째, 감정과 기쁨이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변화, 열매가 그들이 거듭났다는
        증거임을 가르쳐주어야합니다. 주여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거듭난 자임을 가르쳐주어야합니다.

셋째,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전도서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 모든 것이 헛되며 가치없는 것임을
        이세상이 추구하는 돈, 명예, 권력, 쾌락이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가르쳐주어야합니다.

넷째, 구원의 깨달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나는 것이니,
        성실하게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해주어야하며,
        잘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