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이 되고 있는 것을 주제로 글을 쓸 때는 항상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을 언급하는 동기에 대해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분명한 동기를 숨김 없이 밝히자면, 나는 이슈를 이용하여 무언가를 얻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허리케인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강력한 이슈가 항상 눈만 뜨면 우리 가까이 맴돌고 있는 지금 개인이(나를 포함하여)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하고 싶을 뿐이다. 생각 없이 마냥 끌려가지 않고 생각하고 대처하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미투운동’은 작년 10월부터 전 세계를 휩쓸었던 운동으로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나도 당했다”라는 의미로 “#MeToo”라는 메타데이터 태그를 사용하면서 순식간에 퍼져나간 사회 운동이다. 직접 당했거나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가해자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 원하는 공인이나 불특정 다수의 생각이 모여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까지 올랐던 정치인이나 명예로운 상을 받은 영화감독, 유명한 배우, 명문대학의 교수, 검찰, 성직자 등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한 자들부터 대학 선배, 직장 동료나 상사, 군대 선임병, 면접관 등 사회 구조 속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까지 “미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리고 한 번 지목되면 결판이 날 때까지 물고 놓지 않을 기세다.

암 덩어리를 발견하고 전이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전신을 검사하고 나니, 온몸에 암이 퍼져있음을 알게 된 것처럼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를 통해 성폭력의 문제가 사회 각 영역에 없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 충격이 끌어올린 감정이 이상한 곳에서 터지고 있는 것 같다. 죄를 미워하고 합당한 처벌을 바라는 마음에서 죄인과 그 지인들에 대한(안타깝게도 주로 가족들) 극단적 분노로 쉽게 변질된다. 더 나아가 특정 성에 대한 혐오 증상이 생긴다. 계속 터져 나오는 사건에 질린 사람은 거꾸로 미투를 외친 사람의 진실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힘겹게 진실을 밝힌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을 한다. 이 모든 이상 반응 속에 교묘히 자리 잡은 상대적 우월감의 문제도 심각하다.

언제 어디서 “미투”라고 소리칠지 모르는 지금, 그 외침이 주는 충격에 바르게 반응하는 합당한 태도는 무엇일까? “Me, too”는 “나도 그렇다”는 뜻이다. 어디선가 “미투”가 들릴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나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1. 미투, 나도 당신의 고통에 아파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고통받은 자들에게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은 “함께 울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의 아픔을 공감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누구도 ‘내가 울어주는 만큼 너도 울어줘야 정상이다’라고 자기 기준을 절대적인 것처럼 주장할 수 없다. 직접 도움을 주어 피해자의 짐을 함께 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그보다는 간접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고통받은 자를 바라보며 가져야 하는 합당한 태도는 함께 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땅한 태도라면 이와 관련해서 반드시 지양해야 하는 태도가 있다. 울고 있는 자에게 “정말 울만 한 일인지 증명해보라”고 캐묻는 것이다. 물론 이슈를 악용하려는 사람이 있어 검증이 필요하고, 피해의 정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향후 공정한 처벌을 위해 필요한 과정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명확하게 거짓임이 드러나기 전에는 피해자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믿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 용기 내 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

2. 미투, 나도 당신이 당한 죄악에 분노합니다.

다윗은 시편 103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시 103:6)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이라면 그의 백성 또한 공의와 거룩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셨다(레 11:45; 벧전 1:16).

하나님이 정하신 성의 기준은 명확하다. 그분은 남편과 아내를 창조하셨고(창 2:21-25) 그 둘 사이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셨다(창 1:27-28). 성은 부부관계 안에 허락된 축복이다. 하지만 부부관계 밖에서 일어난 것은 죄다.

구약 성경은 부부관계 밖에서 일어난 성관계를 명백한 죄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출 20:14; 신 5:18), 이를 사형으로 다스린다(레 20:10). 사랑의 대명사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와 관련하여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준에 동의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단지 야한 생각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간음”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부부관계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적 행위가 간음인데, 지금 그런 상상을 아내가 아는 다른 “여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다(고전 6:9).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처럼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다(시 7:11). 죄에 대해 항상 분노하신다.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의 성을 강제로 빼앗는 행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죄질이 낮다고 해서 용납 가능한 죄는 없다.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반드시 죄를 처벌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은 때로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사실 뉴스와 기사에 오르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닥친 더러운 일을 내가 속한 집단, 사회, 무리 안에서 발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쩌면 나는 잘 모르는 누군가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잘 아는 누군가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지 모른다.

군대에 있을때 나와 같은 병장 계급을 가진 친구는 신병을 성적으로 괴롭혔다. 바지에 손을 넣기도 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겁을 주기도 하고, 그 친구에게는 장난이었지만 당하는 이에게는 수치였다. 내가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당장 그만두라’고 소리쳤지만, 요즘 미투운동 때문에 다시 그때를 회상해보면 ‘왜 더 담대하고 공의롭게 나서지 않았을까’ 후회가 된다. 그때 군대는 원래 그런 분위기였다고 핑계 대고 싶지만, 원래 그런 건 없다. 죄는 죄다. 상사, 선배, 선임병, 그들이 내 진급을 좌지우지하고, 내 진로에 도움이 되며, 편안한 군 생활을 보장한다 해도, 그들의 죄에 담대하게 공의로 맞서라.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성을 착취한 죄에 하나님처럼 분노하라.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난 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서 일어난 죄에 대해서 그리하라.

 

3. 미투, 나도 나의 죄와 싸웁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의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말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이의 죄를 바로잡으면서 동시에 “나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나도 같은 죄에 빠진 것이 아닌지 살펴보고, 같은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바로잡을 때 반드시 동반해야 할 자세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하고 남의 문제를 지적하는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5).

한번 상상해보라. 어떤 사람이 아침에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검색순위를 확인하다 새로운 미투운동 관련 기사를 봤다. 출근하면서 혀를 찬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자기 딸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나?” 그리고 회사에 가서 같은 사무실 여직원과 만나 그 여직원이 그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도 모르고 손을 잡고 인사를 한다. 힘내라고 어깨를 토닥여준다. “내 딸 같아서 그러는 거야”라고 말한다. 정말 외식적이지 않은가?

미투운동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이 ‘미투’가 아니라 ‘유투’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너도 죄인이야’라고 말하는 데 혈안이 되어 ‘나도 죄인이야’라고 말하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혹시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없는가? 나 또한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는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성적인 죄의 기준을 어디에 설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접촉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인 접촉이 없으니 자신은 깨끗하다고 생각하지만, 언어적인 폭력을 간과한다. 어떤 사람은 신체적, 언어적 폭력도 없지만 계속 여성의 신체를 관찰하고 음란한 상상을 한다(생각보다 많은 여성이 이를 알고 있다). 어느 선까지 와야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모든 사람은 근본적인 질문에 이른다. 왜 나는 정상적인 시선으로 이성을 바라볼 수 없는가? 왜 순결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이성을 대할 수 없는가? 내 속에서 솟아나는 음욕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중에 음란과 음탕과 간음이 있다(마 7:21-23).

미투운동의 가해자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자기 욕구를 자기가 가진 힘으로 충족한 것이고, 나는 그 욕구를 잘 통제하고 있을 뿐이다(혹은 그럴만한 힘이나 영향력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많은 남성이 성폭력자를 비난하면서 불법성매매에 가담한다. 성추행한 남성을 욕하지만, 포르노그래피를 즐기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닌가? 포르노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중 많은 이들이 성폭력의 피해자가 아닌가?

하나님이 규정하신 올바른 성의 기준을 넘어서 내가 가진 음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진작에 사라졌을 산업이 아닌가? 돈을 지급했다고 해서, 직접 여성에게 피해를 준 것이 아니라고 해서 엄청난 성폭력과 착취와 억압으로 가득 찬 불법성매매산업과 포르노그래피 산업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이 “미투”를 외친다면 해당하지 않는 남성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내 속에 똑같은 죄의 욕구가 있다. 나도 그 죄와 싸우고 있다. 그것이 솔직한 반응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미투운동 가운데 내가 외쳐야 하는 “미투”에는 반드시 다윗과 같은 이 고백이 들어있어야 한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아신다.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내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분 앞에서 외식하는 자로 살지 말라.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죄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솔직하고 겸손하게 자백하라. 용서를 구하라.

 

4. 미투,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이어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우리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눅 5:24). 물론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권세를 이 땅에 세우셨다. 가해자들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야 한다(롬 13:1-4).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주의 많은 긍휼이 필요하다(롬 3:10).

많은 가해자가 양심고백을 하면서 죗값을 달게 받고 평생 뉘우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말한다. 진심이라면 합당한 자세다. 하지만 사과는 단지 국민 앞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피해를 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 해야 한다. 그는 당신이 폭력을 휘두른 대상을 자기 형상에 따라 지으신 아버지다. 그분께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의 회개를 단단히 오해한다. 마치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면 피해자에게는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독교의 회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은 더 깊고 근본적인 회개를 요구한다.

참된 회개는 수직적, 수평적 회개를 모두 포함한다.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은 서로에게 죄를 범하고 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는 제사를 드려야 했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수평적으로 사람과의 관계에 화평을 가져오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가 아니다. 신약도 마찬가지다. 형제가 회개하면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고(눅 17:4),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여 죄 사함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회개의 삶이다(요일 1:9).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보셨다(삼하 12).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내가 오직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고백한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향한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온다. 수평적, 수직적 관계 회복의 핵심은 하나님이다. 그분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시고, 죄 용서의 능력의 원천이시다.

 

그러니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라. 당신의 죄를 사해 달라고 구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회피하고 숨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뉘우치는 마음을 품는 것은 필요하지만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진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그분께 나오라. 그가 당신의 죄를 사하기 원하신다. 그 증거가 십자가 위에 확실히 드러났다. 그 아들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지고 모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대신 받으셨을 때 말이다. 그분 안으로 들어와 진정한 죗값을 치르신 아들을 만나고, 그 아들이 선사하시는 죄 사함의 권세를 통해 은혜를 받아라.

피해자와 그와 함께 미투를 외치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억압과 핍박으로 인해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는 분은 그리스도뿐이다. 비방과 욕으로 악을 갚지 않고 정의와 공의를 구하면서도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죄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무서운 것인지 직접 당해본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자기 죄의 무게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은혜의 무게 역시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상대적 우월감을 버리고 자기 앞에 있는 죄를 발견하여 상황을 바르게 볼 수 있게 하는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가해자 때문에만 흘려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심지어 피해자를 포함하여)를 위해 흘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참된 은혜를 모두를 위해 구할 수 있게 된다.

 

가해자의 죄를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피해자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나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나도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미투운동을 바라보고 참여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