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이여, 떨치고 일어나소서 PART I
본문: 시편 35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중에는 저주의 시편이라 불리는 시들이 있습니다. 약 18개의 시편 정도가 저주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7, 35, 69, 109편은 전체적으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4개의 시편은 모두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들을 읽다보면 우리는 좀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신약 시대에 배운 것들은 저주와 거리가 먼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눅 6:27-28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롬 12:19-21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신약의 이런 가르침과 저주의 시편은 전혀 상반되는 내용인 듯합니다. 109편의 내용은 더욱 심합니다. 원수가 빨리 죽어서 자녀가 고아가 되고 아내가 과부가 되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가 재산을 모두 잃어서 빌어먹기를 바라고, 아무도 그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가 좋아하는 시편 23편에도 이런 내용(저주)이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5절)라는 표현은, 나에게 초점이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이 상황을 ‘원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치욕스러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져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차려주시는 상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바라보는 상황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볼 때 좀 당혹스럽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구약에서는 그랬지만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해결책을 찾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진노하심을 주로 나타내셨고 신약에서 사랑을 많이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결책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기준이 달라져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달라지는 하나님의 기준의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구약에도 하나님은 베드로가 한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욥 31:29-30 [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30] 실상은 나는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
신 32: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잠 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잠 25:21-22 [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22]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구약에도 하나님의 기준은 이러했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몰라서 저주의 시를 썼을까요? 반대로 신약에서도 ‘행한대로 보응을 받는 것’, 곧 저주와 관련된 말씀이 있습니다.
딤후 4: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갈 1:8-9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눅 18:7-8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런 문제를 보는 신학자들 중에는, 다윗이 이런 시편을 기록할 때는 격분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가감없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혹은 반대로 이것도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그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은 이 시편 자체를 매우 상징적인 것으로 범주를 좁혀 해석해서 매우 소수에 대하여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또는 사탄에 대해서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들이 저주의 시편들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여전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시편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불필요한 말씀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혹은,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교훈이라면 시편 자체가 오해할 만하게 기록되었다라는 말이 됩니다. 신약 성경에 가면 저주의 시편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편에 대해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사탄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는 것도 해당 시편 안에서는 찾기 어려운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시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주의 시편의 동기, 방법,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 동기 – 개인의 복수심이 동기는 아니다
이 시편의 동기는 개인의 복수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러한 저주의 시편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그 동기를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쉽게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 복수심을 가지고 상대방이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기도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쉽게 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다툼이 있거나 싸움이 있을 때, 언제나 내가 ‘선’이고 상대가 ‘악’입니다.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결국 궁극적인 잘못은 언제나 상대방에게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먼저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관계의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은 상대에게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결국은 내가 피해자고 상대가 가해자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상대가 하는 일들이 잘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또는 내가 어떻게 이것을 저 사람에게 갚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의 시편도 그런 개인적인 증오심, 복수를 동기라고 쉽게 단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보면 저주의 시편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편들에서 보이는 증오심이나 복수심은 사실 ‘공분’이나 ‘의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죄와 악에 대한 증오이고 그런 악을 일삼는 자들에 대한 분노인 것입니다. 단지 그들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들은 이유없이 사람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고 사람을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선을 악으로 갚으며 거짓으로 모략을 꾸미는 사람들입니다.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자들 괴롭게 하면서 그런 일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자신들보다 약한 자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을 착취하고 노략합니다. 이런 자들의 죄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의를 나타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복수심이 아니라 이것은 의분입니다. 죄가 득세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의분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윗이 한 개인일 뿐 아니라 한 나라, 특별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이런 공의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북한의 주민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이 정부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위정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할까요. 지금의 체제가 무너지기를 바라는 기도, 그들의 멸망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창 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발람을 통해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민 24:9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모세도 죽기 전에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받을 복에 대해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신 28:7)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셨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라는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도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런 저주의 시편에서는 자신의 무고함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부분(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시편의 동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적인 복수심이나 증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에 대한 증오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대한 확신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혹은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 방법 – 내가 그대로 갚아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런 증오의 말들을 보면 마치 시편 기자가 당장이라도 그들에 대해서 그렇게 갚아주려는 마음이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것을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내가 찾아가서 보복하는 것을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선을 행해서 고난받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35:13~14 [13]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4]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
사실 이 저주의 시편을 기록한 다윗이 그의 일생의 원수였던 사울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공식적으로는 바로 인정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당시 왕인 사울은 다윗에게 왕권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서 계속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죽이려고 했고 다윗이 도망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도망자로서의 생활은 다윗에게 힘겨웠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큰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이런 환경을 허락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왕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몰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피하고 있는 동굴로 사울이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와서 휴식을 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다윗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사울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다윗이 사울을 죽여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 다윗이 무방비 상태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지만, 다윗은 같은 이유로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고 해서 그에게 무슨 흠이라고 되었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행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고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고난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기를 선택했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결국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게 되고 이방인에게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아 칼 위에 엎드려 자결하게 됩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정말 기뻐할 일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아말렉 사람은 다윗에게 와서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옷을 잡아 찢고 저녁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조가를 만들어 사울의 업적을 기립니다.
어떻게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의 가장 좋은 본보기 중 하나가 바로 다윗이 사울을 대하는 이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에서 죽이지 않으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저주의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방법에 있어 자신이 복수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해결하실 것이다,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실 것이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고 계속해서 고난 받기를 선택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가 사울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했고 그 방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 바탕에 있습니다.
저주의 시편에 나오는 표현들이 과격해서 이런 부분은 잘 안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편 기자들이 실제로 그들의 대적이 멸망할 때에 그것 자체를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 목적 – 단순히 억울함을 푸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고 그래서 그것이 바로 잡히기를 바라는 내용의 시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울함을 푸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다윗을 비롯한 저주의 시편을 기록한 저자들이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올바른 통치가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으로서 ‘신정국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는 것이, 제대로 된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가장 바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그런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는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였습니다. 혹, 이스라엘 내에서 그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도 다윗과 같은 왕은 원하지 않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이 득세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이 바로 잡히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5편의 끝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35: 27~28 [27]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28]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저주의 시편은 겉보기에는 마치 이기적인 동기에서 이기적인 방법으로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옛날의 무슨 저주의 주술처럼, 어떤 신의 힘을 빌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그런 기도문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동일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최우선의 자리에 두는 자들입니다. 최소한 그것을 원하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이 저주의 시편을 보면서 얼마나 구약의 성도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미워하는지 봐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지 봐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기를 택했는지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