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를
본문 : 시편 30편

설교자 : 최종혁

 

시편 29편을 기억하십니까. ‘능력의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를’입니다. 시편 29편에 대해 연구가들은 순수한 찬양시라고 말하고, 오늘 말씀은 순수한 감사시라고 합니다. 찬양과 감사는 매우 비슷하면서도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이지만, 그 동기가 조금 다릅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속성이 그 동기가 되고 감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특히 나와 관련하여 하시는 일이 동기가 됩니다. 물론 언제나 그렇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구분할 수 없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편 29편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힘에 대해 말하면서 순수하게 찬양을 한다면, 30편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찬양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결론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셨고 하는 것을 알면서 그분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통해 적용, 즉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4~5절에서 다윗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고 은혜는 평생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런 결론적인 찬양을 모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해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그런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에 대해 다윗은 1~3절, 그리고 4~12에서 언급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다윗의 짧은 간증이고 그 중간에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증(1~3, 6~12절)

이 짧은 간증은 “내가 주를 높일 것이다는 다짐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원래 별 것 아닌 존재인데, 다윗이 하나님을 높은 존재로 만들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하나님은 본래 높으신 분이시고,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낮은 인간들을 들어서 높이시는 분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말하는 것은 29편에서 그가 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높으신 분임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그 동안 성취한 것들, 왕으로서 가진 영광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무엇보다 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선포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예배’라고 할 수도 있고 ‘찬양’, 혹은 ‘감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씩 강조하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모두 하나님을 높인다는 면에서 비슷한 표현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편은 1절에서 “내가 주를 높일 것이다”로 시작하여, 12절에서 비슷하게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로 끝을 맺습니다. 처음과 끝이 동일합니다. 또한 핵심이 되는 4절에서도 찬송과 감사가 언급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이 다윗이 이 짧은 간증에서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일인 것입니다. 주를 높이겠다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어서 설명합니다.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1). “끌어낸다”는 표현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끌어 올리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우물 속에 있고 하나님이 그를 끌어내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무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단어도 ‘웅덩이’나 ‘우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다윗은 지금 마치 우물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건져 올리신 것처럼 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끌어 내셔서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말은 원수들이 다윗이 그 상황에 있는 것을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요? 다윗은 죽음이라는 우물에 빠져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3). 스올”은 죽은 자들의 공간입니다. “무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마치 자신이 이미 죽어서 죽은 자들의 땅에 있었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끌어 올리신 것, 즉 살리신 것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묘사합니다. 실제로 자신이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다윗은 죽음에 매우 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9절에 나오는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라는 가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어떤 병에 걸려서 거의 죽음에 이르렀을 수 있고, 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죽음에 가까웠을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많아 이제 곧 죽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지독한 영적인 침체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 “나를 고치셨다는 표현이나 실제적인 죽음이 언급된 3, 9절의 말씀, 그리고 원수들이 이것으로 인해서 기뻐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 영적인 침체 보다는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어떤 질병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는 이 시를 통해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 개인적인 경험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4~5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윗은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이 체험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했던 그런 상황에 다윗은 있었고 그것을 다윗의 대적들은 알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다윗을 구하셨습니다(2). 실제로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안 믿는 친구들이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 자신도 의심이 들 수 있고, 그들을 향해서 억울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이 수렁에서 건져달라고 구한 것이고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어떤 마음이 들까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통쾌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셨을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윗에게 그러한 놀라운 승리가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보란 듯이 일어나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어떻게 상황이 진행된 것인지 좀 더 자세한 얘기는 6절부터 나옵니다. 이런 일이 있기 전 다윗은 형통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다윗의 마음이 높아졌습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 이 말은 악인의 교만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의인의 확신에 찬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그들이 잘 될 때 이런 얘기를 하고, 의인이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이런 말을 합니다. 의인은 형통할 때보다는 오히려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런 고백을 합니다. 다윗은 교만한 마음으로 자신이 확신할 수 없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어리석은 자 같이 앞으로의 일을 장담한 것입니다.

“[5]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시 10:5-6).

다윗은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와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7절에서 그가 고백하는 것처럼 다윗이 형통하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은혜로 삶이 형통할 때, 다윗은 그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해진 다윗에게서 은혜를 거두셨습니다(“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얼굴을 가렸다는 표현은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고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을 때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셨고 그 때 다윗은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걱정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두려워 떨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시던 복을 거두시자, 다윗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는 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시기로 마음 먹으시면 삼 대가 아니라 삼 일만에도 부자는 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왕국이 번창할 때 자신을 높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들에 짐승처럼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은 왕이 높일 사람이 나밖에 없다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모르드개를 달려고 만든 장대가 자신이 달렸습니다. 신약에 오면 헤롯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신에게 돌렸을 때 하나님은 그를 바로 쳐서 죽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시면 우리의 상황은 눈깜짝할 사이에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셨을 때 다윗은 자신의 형통함이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린 것임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구했습니다(“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9).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기도를 보면, 가끔 하나님과 이렇게 논리 싸움을 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중보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하나님께서 이 소돔성을 심판하시면 의인도 있고 악인도 있는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냐고 다소 당돌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중보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던지 내 이름을 기록한 책에서 이름을 지워달라고 말합니다(출 32:32).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을 때,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 33:16)라고 말합니다. 저희만 올라가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백성들과 함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때, 그는 왕의 군대의 도움을 받기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가 이유로 말했던 것은, 자신이 평소에 왕에게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서 선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전했다라는 것이었습니다(스 8:22).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에스라의 말에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길에서 보호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서 드러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당돌하게 보이는 이런 기도의 바탕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에 이렇게 하시는 게 맞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작정 떼쓰듯이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따라 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기도를 히스기야 왕도 했었습니다. “[18]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19]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내가 살아 있어야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가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 저는 아직 이 땅에서 할 일이 남았습니다. 아직 이 땅에서 주님을 찬송하고 주의 진리(신실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라는 것이 다윗의 논리였습니다. 에스라의 기도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을 보호하시고 돌보시는데, 내가 이렇게 죽으면 나를 보고 있는 저 사람들(원수들)에게 하나님은 그런 분으로 선포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들을 하면서 다윗이 알고 있었던 것은 결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10절)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돕는 것. 나를 도와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로서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랬을 때 모든 것이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다윗이 “슬픔”이라고 말한 것은 주로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애통하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베옷도 죽음을 애도할 때 입는 옷입니다. 다윗은 정말 죽음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장례식에서 베옷을 입고 슬퍼하던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장례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 축제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기쁨의 춤을 출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설프지 않습니다. 슬프진 않은데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고 그런 정도의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극적인 변화가 찾아옵니다. 우리 영혼에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은혜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12).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감사 드리는 것, 높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윗의 표현을 보면, 잠잠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잠잠하는 것은 영광을 내가 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생의 다짐으로 삼은 것이 이것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2)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높이는 것, 이것이 다윗이 평생에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교훈(4~5절)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 시편의 최종적인 교훈은 4,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은 실제적인 명령이고 5절은 명령의 이유입니다.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은혜(5절)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 시적인 표현이지만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기도 하시고 은혜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무엇 하나가 하나님의 전부를 설명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둘 다 가지고 계십니다. 상황에 따라 하나가 더 드러나거나 강조될 뿐입니다. 다윗은 지금 이 말을 “주의 성도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 하나님의 백성들, 다윗이 자주 사용했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께 피한 자들”,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 “낮은 자들”은 다윗의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하심은 짧고 그분의 은총은 깁니다. 현재는 슬퍼할 만한 상황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 시대의 성도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누구나 이 말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지나 온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30년 섬겼는데, 모르겠는데? 난 은혜는 모르겠고, 그냥 지옥도 무섭고 나한테 나쁜 일 생길까봐 교회 나오는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정말 성경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노하기는 더디하고 인자가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많은 아버지처럼 우리는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의 노여움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가 죄에 빠질 때 징계하시고 그렇게 해서 회개할 수 있게 하십니다. 다윗이 교만했을 때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다시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일반적인 은혜를 베풀기도 하시고, 특별히 선택한 자녀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비를 주시고 빛을 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구원 받은 자들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 받을 때 뿐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 감사(4절)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4절과 같은 명령이 가능합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4).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이 “주의 성도들”에게 마땅합니다. 성도들로 번역된 단어의 기본형은 우리가 잘 하는 ‘헤세드’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받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와 똑같은 표현이 시편 97편 12절에 나오는데 “그의 거룩한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 30편 4절의 말씀도 어떤 우리말 번역에서는 “거룩한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라입니다. 기억하는 것과 이름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시고(출 3:14), 이런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5). 여기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이것을 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하셨고 언약을 맺으셨으며 광야길에서 인도하셨고 적들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이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생각났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은 그래서 그분의 속성과 속성에 따라 하시는 일들을 의미하고, 따라서 그 이름에 감사한다는 것도 그 하신 일을 기억하며 감사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기억하게 되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노여움은 아주 짧고 은총은 평생 지속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신실하게 다윗의 삶에서 역사해오셨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도전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너무나 익숙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1절에서 “내가 주를 높이겠다”고 하는 말이나 12절에서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라는 말이 그렇게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그런 수많은 시편의 감사, 찬양의 말 중에 하나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정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의도적으로는 아니어도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상하게 돌이켜보면 감사한 일들이 많은데, 당시에는 그냥 넘어가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은혜를 베풀고 계시고 죄에서 구원하신, 지금도 은혜를 베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 제안을 하길 원합니다.

  1. 은혜를 기억하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하고 계신지 끊임없이 기억하길 바랍니다. 구원의 은혜는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고 우리를 한없는 감사로 이끕니다. 우리 삶 속에서 변함없이 베푸시는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격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변함 없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너무 잘 잊습니다. 성경을 통해 기억하고 찬양을 통해 기억하십시오. 성도들과의 교제 속에서도 이런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2. 감사해야 함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목적은 우리가 잠잠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2절). 잠잠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가로채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의 특징에 대해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것”을 말합니다(롬 1:21).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특징이지 아는 자들의 특징이 아닙니다. 감사는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만 아니라 매일매일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