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본문 : 사도행전 4장 23절~37절

설교자 : 조 정 의

요즘 교회가 참 많은 욕을 먹고 있다. TV나 인터넷 신문을 보면 세상이 모두 교회를 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누가 이렇게 만든 주범일까? 경험해 보지 못한 지금 이 상황, 세상이 교회를 대적하는 이 상황이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것 같다.

하지만 처음부터 교회에게 세상의 대적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교회의 머리요 모퉁잇돌 되신 예수님은 교회의 터가 될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5:19).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라고 말했다(롬 8:17). 사도 베드로는 더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라고 말했다(벧전 4:12). 교회를 세상이 대적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견된 당연한 일이다.

물론 교회는 죄나 악행으로 고난받지 말아야 한다(벧전 4:15). 하지만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교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벧전 4:16). 고난 중에도 선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해야 한다(벧전 4:19). 초대 교회가 고난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세상이 그들을 대적할 때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하며 계속해서 선을 행했다.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 그 본을 살펴보려 한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이 우리를 대적하는 지금, 합당한 반응으로 하나님께 의탁하고 열심히 선을 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상황 설명(행 3:1-4:22)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서 40년 넘게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켰다. 그 사건으로 정말 많은 군중이 사도들 주위로 모여들었다. 베드로는 놀라운 기적의 능력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왔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확증하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자로서 증언했다. 또한 베드로는 듣는 이들에게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고 촉구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본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제사장들, 사두개인, 성전 맡은 자였다. 그들은 즉시 두 사도를 결박하고 다음 날 산헤드린 재판을 위해 밤새 감금했다. 이튿날 공의회에서 그들을 심문하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전혀 주눅 들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했다. 산헤드린은 고침 받은 사람과 수많은 군중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에 반박하지는 못하고, 다만 예수의 이름으로 더는 가르치거나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며 경고했다.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두 사도는 교회로 돌아와 어떤 말을 했을까? 교회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23절부터 그 내용이 펼쳐진다.

  1.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의탁하라(23-31절)

사도들놓이고 나서 바로 그 동료 곧 오순절에 세워진 그리스도인 공동체(교회)에게 돌아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렸다(23절). 아무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와 그렇게 할 경우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에 대한 협박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교회의 처음 반응은 무엇이었나? 분노? 절망? 불평? 원망? 두려움? 아니었다. 바로 기도였다. 그들은 곧장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다(24절).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교회는 먼저 기도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세상은 심지어 우리 목숨까지 빼앗을 권세가 있다. 하지만 교회는 영혼을 영원히 살리고 심판하는 주권자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한다. 

24절에서 30절까지 우리는 초대 교회가 그들을 대적하는 세상에 맞서 한마음이 되어 기도로 반응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초대 교회의 공동 기도문에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기도한다

세상의 대적에 기도로 맞설 때, 먼저 교회는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지 기억해야 한다(기도의 대상). 우리는 허공에 대고 막연한 소원을 빌고 있는 게 아니다. 적당한 힘과 능력이 있는 단체나 사람에게 구하는 게 아니다. 기도는 절대주권을 가진 창조주 하나님,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자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기도로 나아갔는지 살펴보자.

초대 교회는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이렇게 불렀다. “대주재여!”[데스폿(테스)-절대군주]. 하나님은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신 전능자이시며, 그 지혜와 지식, 권세가 무궁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분, 다스리는 분이시다(24절; 시 146:6). 교회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확신했다.

또한 초대 교회는 하나님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믿었다. 지금 그들이 겪는 일은 새롭고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아래 일어난 것이라 확신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25-26절; 시편 2:1-2)

초대 교회가 그들이 겪고 있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연결 짓는지 보라. 27절을 보면 헤롯(세상의 군왕들, 26),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관리들, 26), 이방인(열방, 25), 이스라엘 백성(족속들, 25). 이들이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교회를 대적했다고 봤다. 초대 교회는 이것이 임의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본 것이다(28절). 하나님은 역사를 계획하실 뿐만 아니라 계획하신 그대로 이루신다. 대적도 하나님 장기판에 있는 말에 불과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대주재이신 하나님, 모든 역사를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엡 1:11),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롬 8:28) 기도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원수를 의탁하고 사명을 다하게 해달라고 구한다

두 번째 교훈은 초대 교회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는지에 관한 것이다(기도의 내용). 교회는 대적을 없애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고난을 없애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심지어 박해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대적의 “위협함을 굽어”봐 달라고 구했다(28절). 이것은 정확히 그리스도께서 원수의 대적에 맞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같다. 그분은 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셨지만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다(벧전 2:23). 

교회의 기도엔 원수에 대한 저주나 환경에 대한 불평이 없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의탁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분께 대적하는 자들을 맡긴 것이다(롬 12:19).

오히려 초대 교회가 구한 것은 고난 중에서 선을 열심히 행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달라는 것이었다.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29절). 전파된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할 수 있도록 권능을 달라고 구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30절).

교회는 지금 한마음으로 얼마나 초대 교회와 같이 기도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쏟아지는 모든 비방과 조롱, 위협을 온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의탁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지혜와 권능을 달라고, 그 일을 더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는가? 장기전이 된 코로나와 거세지는 교회에 대한 핍박 속에 교회가 많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오히려 더욱 한마음으로 힘쓸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의탁하고 사명을 다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일이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께 었고, 그 기도를 마쳤을 때, 그들이 기도한 곳이 진동하고(흔들리고) 한마음으로 기도한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해졌다(31절).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는 확신을 주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이와 같이 응답하실 것이다. 건물이 흔들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나태한 마음을 흔들어 깨우시고, 반드시 교회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대적할 때, 교회여 기도하라. 역사를 세우시고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 아뢰고 대적을 그분의 공의로운 손에 의탁하라. 그리고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능력을 채워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1.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사랑하라(32-37절)

초대 교회의 기도에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셨다. 31절을 보면 그들의 기도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더하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전파된 말씀을 확증하는 권능을 사도들의 손을 통해 일으키셨다(33절 5:12,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여기에 이어서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교회 가운데 일어났는데, 바로 성도가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눴다는 것이다. 그들의 교제는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 즉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희생적인 섬김과 사랑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세상의 대적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4장 32절부터 5장 11절까지 성도의 사랑 넘치는 교제가 기록되어 있는데, 결론 부분인 5장 13절을 보면 “백성이” 교회를 “칭송”했다고 말한다.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교회는 권능과 함께 말씀 전파 사역에 충성했고 나아가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 그 결과교회를 대적하던 세상이 교회를 칭송하게 되었다. 교회가 사랑할 때 세상은 교회를 칭송한다.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교회가 나누는 사랑은 그 대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킨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지금 교회가 세상의 비난과 공격을 받으면서 서로 물어뜯고 싸우기 바쁘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의 핍박을 통해 참 교회가 아닌 거짓 교회가 구별되고, 세상에게 참 교회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교회는 교회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 모두가 서로 사랑해야 하지만, 지역교회 안에서도 사랑은 실천되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교회가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필요를 채우는 일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먼저 목회자에게 성도를 돌아볼 책임이 있다. 그리고 성도가 성도와 친밀한 교제, 사랑을 나눌 책임도 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때(요 13:34), 희생적으로 실질적으로 사랑할 때,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요일 3:18)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요 13:35).

초대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32절).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았거나 억지로 팔게 한 것이 아니다. 모두 자발적으로 가난한 성도를 위하여 자기 소유의 일부인 밭과 집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면(법적 양도),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준 것이다(34-35절).

대표적인 예시로 바나바가 36-7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레위인(레위족 사람)이지만 구브로에서 태어났고, 원래 이름은 요셉이지만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란 뜻을 가진 “바나바”라고 불렀다. 그는 밭이 있었는데 그것을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었다.

당시 교회엔 그리스도를 선택함으로 경제적인 핍박 아래 놓인 가난한 성도가 적지 않았다(유대인 공동체나 가족에게서 쫓겨남). 실질적인 필요를 나누기 위해 재물을 공유한 이 사역을 가리켜 “성도의 교제”라고도 부르는데, “교제”를 뜻하는 코이노니아가 기본적으로 ‘공유’,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고, 소유물을 나눔으로 서로의 영적, 물질적, 관계적 필요를 희생적인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교회가 나누는 교제, 세상이 칭송하는 교제다.

코로나를 반년 이상 겪으면서 교회의 어떤 기능이 가장 크게 위협을 받을까? 바로 교제다. 우리는 각자 집에서 말씀을 영상으로 볼 수 있고, 각자 집에서 찬양할 수 있다. 그런데 나눌 수 없다. ‘공유’할 수 없다.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을 나눌 수 없고 말씀으로 성령께서 교훈하신 것을 나눌 수 없다. 찬양으로 하나님을 향한 충만한 기쁨을 나눌 수 없고, 삶의 고충과 어려움을 나눔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희생적인 사랑의 교제도 나눌 수 없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나눠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교제해야 한다.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교회는 더욱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랜트 오스본은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서로 나누는 관대함과, 궁핍한 자의 돌봄, 그리고 그들의 강력한 증언을 보게 될 때 그리스도께로 인도된다”라고 말했다.

결론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초대 교회는 하나님께 먼저 기도로 아뢰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기억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원수를 의탁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잠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라. 오늘날 수많은 공격 아래 놓여진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해달라고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라. 일하는 곳에서 동료가 교회를 비방할 때 잠시 속으로 하나님께 그를 의탁하는 기도를 올려라. 교회를 비판하는 뉴스를 보게 되면 잠시 하나님께 기도하라. 교회로서 진리를 전하는 일에 능력을 더해달라고 구하라.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초대 교회는 서로 사랑으로 필요를 나누는 일에 힘썼다. 믿음과 진리, 사명을 나눴을 뿐 아니라 재물을 희생적으로 나누는 사랑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 성도의 필요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라. 가능하면 안부를 물어라. 전화로 서로를 위해 같이 기도하라. 경제적인 위기를 맞이한 이들의 필요를 돌볼 방법을 구하라. 완전히 구제하는 건 어렵더라도 위로와 격려가 되는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말씀을 듣고 당신이 교제할 수 있는 사람, 사랑으로 돌볼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어떻게 실질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을지 계획을 세워보라.

세상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대적할 것이다. 어쩌면 그 강도가 더 커질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담대할 수 있다.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 16:33). 음부의 권세가 결코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주님이 약속하셨다(마 16:18).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우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실 것이다(롬 16:20). 그러므로 세상이 교회를 대적할 때 그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능력으로 진리를 전파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에 더욱 힘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