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본문 : 시편 58편

설교자 : 최종혁

 

시편 58편은 시편을 묵상하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저주의 시편”에 속하는 시편이다. 이미 시편 35편에서 저주의 시편의 특징에 대해서 나눴었다. 저주의 시편은 개인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좀 더 공적인 차원에서의 기도다. 그래서 개인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이기적인 방법으로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기도가 아니다. 쉽게 말해,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은데 내가 할 힘이 없으니까 저주라도 퍼부어야겠다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인으로서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로운 분노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이고, 하나님께서 그런 세상의 불의를 바로 잡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 받기를 원하는 기도가 저주의 시편이다.

여전히 이런 시편들에 사용된 생생하고 적나라한 표현들을 지금 우리 상황에서 다 이해하기는 어려운 부분들이 있지만, 이 시편을 기록한 저자들의 확실한 기대가 이들이 왜 이런 시편을 기록했는지, 그 동기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시 35:27-28 [27]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28]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69:30-34 [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32]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33]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 83:18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 109:27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시편 58편에서 다윗도 동일한 목적과 기대를 품고 있다.

시 58:11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공의의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서도 오해없이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그 하나님을 사람들이 알고 예배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공의를 나타내셔서 악인들과 의인들에게 합당한 일을 행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하게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보이는 현실이 이상적인 현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57편에서 우리는 재앙을 만날 때에도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을 높이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온세상에 선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그것을 위해 재앙이 지나갈 때까지 기도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여야한다. 57편은 개인의 재앙같은 상황을 말하고 있다면, 58편은 공동체적인 시각에서 사회의 재앙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다. 특히 이 상황은 국가의 통치자, 지도자, 권력자들의 불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다윗은 가장 높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리시고 따라서 의로운 삶은 언제나 헛되지 않음을 보여달라고 기도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다. 강제하는 법이 없더라도 선하게 살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우리 인간 사회는 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실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은 법 없이는 절대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법이 그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만연한 죄에 가장 먼저 희생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법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제는 이 법조차도 죄인인 사람들이 제정하고 적용하고 집행한다는 것이다. 법 자체가 완벽하지 않고 그 법을 적용하고 집행할 때도 사람들은 사적인 유익을 추구한다. 그러니 역사를 통해 어떤 주의가 등장하고 제도나 체계가 등장해도 정도의 차이, 영역의 차이가 있을 뿐 사회에는 언제나 불의가 있고 힘 없는 자들, 선하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지금도 이 원리는 동일하다. 여전히 악한 사람, 약은 사람,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사람이 더 잘 산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달라지지 않는 한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윗이 살았던 시대도 다르지 않았다. 다윗이 보았던 현실은 그로 하여금 개탄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I. 보이는 현실 : 부정한 통치자들(1-5절)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1절)

우리말 번역과는 다르게 원문에는 직접적으로 ‘통치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는 않는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잠잠한 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하느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하느냐?”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질문은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느냐는 개탄이자 반문이고 책망이다.

즉, 이 사람들은 마땅히 정의를 말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삼권이 분립된 오늘날 같으면 ‘판결’은 사법부가 하는 일이니, 판사들을 의미할 수 있는 표현이겠지만, 이 당시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통치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법’은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삼권’이라는 것도 법을 제정, 적용,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사실 ‘힘’을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다르게 말하면 이들이 곧 통치자, 권력자, 영향력있는 자들이다. 단순히 시비가 붙었을 때 그것에 대한 판결을 하는 것뿐 아니라, 올바른 사회 정의를 세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정의에 대해서는 잠잠했기 때문에 다윗은 그들을 “잠잠한 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1절 하반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올바르게, 즉 정직하게, 공평하게 판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의를 말해야할 사람들이 정의를 말하지 않으니 정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사회 안에서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 왜 통치자들은 정의를 말해야할까? 왜 사회 정의라는 것이 필요할까? 왜 우리는 인권을 말하고 있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왜 그렇지 않은 나라를 ‘미개’하다고 할까?

그 답은 성경에 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졌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공의를 추구하게 하시고 통치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권세를 받은 자들로서 공의를 행하기를 원하신다.

롬 13:1,4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이것이 권세자들의 순기능이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기능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공의로 통치하는 것이다. 가장 높으신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래 권세자들을 세우시면서 그들에게 공의로 통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통치자들에게 공의로 행할 것을 말씀하신다. 판결을 할 때 부자라고 해서 혹은 반대로 가난하다고 해서 판결을 굽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언서의 말씀들을 보면 그들이 종교적으로 타락한 것에 대한 말씀도 많지만 통치자들의 불의에 대한 말씀도 많다. 결국 공의로운 왕이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그들의 죄성을 따라 통치를 했던 것이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1절 말씀에서 왜 통치자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 공의를 말하고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다. 아마도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통치자들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방 나라들의 통치자는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의 통치자들이라면 더욱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통치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선포해야 했기에 다윗은 더욱 분노하며 이들을 책망한다. 이들이 공의로 판단하는 대신에 하는 일은 이런 일이었다.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2절)

이들은 겉과 속이 같다. 그 중심에 있는 악을 행한다. 그들은 손은 폭력을 달아준다. “달아 주는도다”는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균형을 이룬 저울은 일반적으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정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윗은 그들이 하는 일이 마치 정의를 말하고 집행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폭력을 행하는 일이라고 꼬집는 것이다.

여기서의 ‘폭력’은 물리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이 포함되지만 그것 이상을 말한다. 어떤 ‘힘’이든 그것을 악하게 사용하여 이득을 취하는 행위다. 이 통치자들은 겉으로는 ‘정의’, ‘공의’, ‘공정’, ‘평등’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 마음에 있는 악을 행하고 그 힘을 이용하여 포악한 일들을 저질렀다.

다윗은 겉으로 보이는 이런 일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3절)

“멀어졌음이여”는 잘못된 방향, 이상한 방향, 이방인의 길로 갔다는 의미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원죄와 관련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심지어 이 시를 기록한 다윗도 모태에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시 51:5).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죄를 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의 소리에 조금 더 귀기울이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그 길에서 돌이키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문제는 계속해서 그 죄의 길을 충성스럽게 따라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를 선택하고 곁길, 즉 바른 길이 아닌 다른 길, 잘못된 길을 따라갔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는 정의는 거짓이었고 이들이 행하는 공의는 폭력이 되었다.

4-5절에서 다윗은 이들의 모습을 뱀에 비유한다.

“[4]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4-5)

이 비유에서 다윗은 두 가지를 말한다. 첫번째는 그들의 독이 뱀의 독 같이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독이다. 이것은 뱀의 독처럼 치명적이어서 즉시 때로는 서서히 사람을 죽인다.

이런 자들이 통치자로서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주인이 있는 독사인데,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독사라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뱀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꼭 말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보다 주인에게 순종하느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귀를 막고 일부러 듣지 않는 독사와 같다. 그 주인의 소리를 듣지 않고 그리니 따르지도 않는다. 만약 야생의 뱀이라면 사람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피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술사의 뱀이다. 주인이 있는 뱀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 뱀이 잘 훈련되어 있어서 술사를 잘 따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경계심을 늦춘다. 그런데 이 뱀이 술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더구나 그것이 치명적인 독사라면 그 위험성은 매우 커진다.

이것이 지금 다윗이 보고 있는 현실의 통치자들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야할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고 공의를 말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고 있고,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고 그 거짓은 무서운 독이 되어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모든 통치자들, 지도자들이 이렇지는 않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도 추구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크게 두 가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10절과 11절에서 바라는 결과의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첫째는 의인이 세상을 살기 힘들게 만든다. 앞서 말했던 ‘법 없이 살 사람’은 실제로는 이용만 당하고 착취만 당하는 사람들이 된다. 결국 의롭게 살고자 하는 소망이 꺾이게 된다. 누구도 그렇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둘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사실 이것이 가장 치명적이다. 하나님이 없는 듯이 통치하는 사람들이 거두는 성공은 결국 그들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판하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라면 이 땅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듣지 않는 통치자들, 그에 따라 정의를 말하지 않고 올바르게 판결하지 않는 자들은 이런 치명적인 독을 세상에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심판하는 하나님은 없으니, 네가 원하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아도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6-11절과 같은 기도를 강력하게 드리는 것이다.

II. 바라는 현실 : 공의로운 하나님(6-11절)

다윗은 연속되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 한가지를 구한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악을 어떻게든 멈춰달라는 것이다.

6절에서는 이들을 사자에 비유한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6절)

이들은 젊은 사자와 같다. 강한 것이다. 그들의 주된 무기는 이빨이다. 이 이빨을 꺾어서 무력하게 만들어달라는 기도다. 그들은 스스로 가장 강하고 가장 높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보다 더 높고 강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무력하게 낮춰주시기를 구한다.

다음으로 다윗은 5개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시기를 구한다.

“[7]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8]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9]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7-9절)

“급히 흐르는 물”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곧 사라지는 것처럼 그들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겨누는 화살이 꺽임” 화살이 휘거나 부러지면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의 계획이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기를 바란다.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이는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속설에 근거한 비유적 표현이다. 달팽이가 끈적한 자취를 남기고 다니다가 결국은 빈 껍질로 발견되는 것을 점점 소멸해가는 달팽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 이 표현은 아마 ‘사산된 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즉, 8절은 이들의 악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빨리 심판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다.

9절은 앞서 언급한 것들을 정리한다.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한다는 것은 그 목적을 이룬다는 말이다. 다윗은 악한 자들이 그렇게 하기 전에 그 나무가 어떤 나무든 상관없이 바람에 날려버려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해달라고 구한다. 그들의 생명을 이 땅에서 취하여 가시든, 그들의 계획을 꺾으시든, 그들의 힘을 무력하게 하시든, 어떻게든 이 악을 멈춰달라는 기도가 이 기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때 결과는 10-11절과 같이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먼저는 의인의 기쁨이다.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10절)

10절에서 사용된 이미지는 어쩌면 괴기하게 보일 수도 있다. 피에 발을 씻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이는 당시에 승리자에게 사용하던 이미지였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악인에게 보복하지 않았다. 보복은 하나님께서 하셨다. 공의를 모르던 그들을 공의의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에게는 온전한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날 때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은 기뻐할 것이다. 모든 그동안의 슬픔과 눈물이 보상받을 것이다. 믿음으로 보던 것을 현실에서 보면서 그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사람들의 확신이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11절)

“그 때에”는 결론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으로 기뻐하게 하실 때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의인에게는 그에 합당한 갚음, 즉 보상(열매)가 있고, 그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시편 1편에서 본 것처럼, 그리고 그 이후의 시편들에서 계속해서 봤던 것처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의인과 악인이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정하시는 복있는 사람들이 있고, 끝내는 멸망의 길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사는 많은 현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악인이 항상 고통스럽고 괴로운 현실을 살아야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들은 많은 것을 누리며 즐겁게 살아간다. 힘든 것은 의인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정직하게, 깨끗하게, 겸손하게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 죄 많은 이 세상은 쉽지 않다.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기 쉬운 세상이다.

하지만 결국 이 땅도 하나님의 세계다. 우리가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땅이 하나님과 관련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땅도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이 왕이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공의를 드러내신다면, 이 땅의 사람들도 결국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윗의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의 끝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메시아 예수님을 통하여 세워질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모든 불의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라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 공의를 나타내신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다윗은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시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며 찬양하기를 구했던 것이다.

도전

이 다윗의 기도는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다윗처럼 기도할 수 있다.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면서, 지금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를 구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좌우를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위해 구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인정하게 되기를 구해야한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11절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좀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결과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사람들이 아니다. 11절에서 다윗이 말한 사람들은 ‘관찰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관찰자들이 아니라 이미 이것을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진실로 의인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상이 있고, 진실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 삶의 결론으로서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이미 우리가 믿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믿음은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갈 6:7-9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살면서 함께 불의해지거나 악을 행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는 바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다윗이 10절에서 말한 기쁨을 이 땅에서는 우리가 누리지 못할지 모른다. 우리를 통해 11절과 같이 고백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공의를 행하고 선을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 삶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악한 일을 심판하실 뿐 아니라, 선한 일에 대한 보상도 결코 잊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내 삶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크게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 삶을 사용하실 것이고 그 삶에 보상하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길게 보고 살자.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 말고 영원을 바라보고 오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살자. 그런 우리의 삶이 정말 이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세상 가운데 선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