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지나간 세월인가, 하나님의 역사인가?
본문: 시편 77편
설교자: 최종혁
우리 삶에 고난이 없을 수는 없다. 누구도 이 사실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 그런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실제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거의 100%의 확률로 고난이 끝나는 것,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특정 상황에 대해서 개인이 느끼는 고난의 정도는 다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전혀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을 누군가는 큰 고난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상황이라는 것이 100% 같을 수는 없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어떤 상황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유사한 상황이라도 사람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극명한 차이가 보이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케이크에 있는 딸기나 초콜릿을 먹지 못하는 것이 큰 고난의 상황이 된다. 그래서 한참을 서럽게 울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자라도 양보할 수 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관점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크면서는 그렇지 않게 된 것이다. 때론 비슷한 또래의 아이라고 해도 그 상황에 대한 관점이 달라서 누군가는 서럽게 울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아 한다.
이런 차이는 어른들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똑같이 취업을 못하고 있어도 어떤 사람은 괜찮고 어떤 사람은 좌절한다. 몸이 아플 때 어떤 사람은 잘 견뎌내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기도 한다. 결혼이나, 출산, 자녀 양육, 집, 경제 등 많은 삶의 고난이 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하고, 그런 차이의 핵심에는 각자가 그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고난이 가져오는 고통의 크기는 객관적인 것 외에 주관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우리는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그렇지 않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고난 자체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들이 많지만, 그 고난 때문에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고통스러워하고 넘어지고 좌절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오늘은 시편 77편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고난 중에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배워보자.
결론 :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여 고난을 경험하는 현재도 하나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음을 확신해야 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고난(1-9절)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
계속되는 아삽의 시편이다. 아삽의 시편을 보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매우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삽은 고난 중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아삽이 어떤 종류의 고난을 겪었는지 알 수는 없다.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삽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묘사한 표현들이다. 이 표현들은 우리가 정말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표현들이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상황을 매우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나와 같은 상황을 경험한 적이 없고 따라서 누구도 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누구도 나와 같은 상황을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은 당연히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
개정개역 번역에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이라고 되어 있지만 새번역 성경에는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이라고 되어 있고, 이것이 본래 의미에 더 가깝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아는 시험이라는 말이고 사실은 많은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한다는 말이다. 고난의 구체적인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들은 넓은 의미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유일무이한 고난은 없다.
그러니, 고난 중에 있을 때, 내가 고통스럽다고 느낄 때, 이건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을 우선 버려야한다. 고난의 모습이 나와 같은 사람만이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결국 어떤 도움도 얻을 수 없다. 고난의 모습은 비슷할 수 있지만 100%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차이를 보면서 당신은 그러니까 이길 수 있었지만 나는 아니야라는 결론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성경을 봐도 해답을 찾지 못한다. 나의 경우는 특별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고난 중에 있다면 먼저는 “나의 고난”, “나만의 고통”, “아무도 모르는 슬픔”과 같은 생각을 버리고 아삽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란다.
1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1-2절)
2절의 시작에 아삽은 “나의 환난 날”이라고 이 상황을 표현했다. 고난 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고난 중에 아삽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기도한 것이다. 올바른 시작이다. 아마 참된 신자라면 대부분 이렇게 고난에 반응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부르짖는다”는 표현은 주로 절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구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부르짖는다는 말에 “내 음성으로”는 사실 불필요하다. 부르짖으려면 당연히 내 음성으로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강조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아삽은 고통 중에 울부짖듯이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런 자신의 음성에 하나님이 귀 기울여주시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다.
2절 끝에 보면 아삽은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는 다른 사람들의 위로를 의미할 것이다. 누구의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지금의 상황을 달라지게 하지 못하는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위로는 오히려 나를 더 민감하고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 누군 그런거 몰라서 지금 이렇게 있느냐는 식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욥이 그랬다. 욥은 친구들이 오기 전까지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었지만,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던 친구들의 말은 오히려 욥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었다. 욥은 친구들의 위로를 거절했었다.
아삽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답답한 마음, 괴로운 마음, 슬픈 마음을 마음에 담아 두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아삽의 마음이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들을 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담아두기에는 너무 큰 괴로움이 우리들에게 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아삽이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찾았고 밤에도 손을 들고 거두지 않았다고 말한다(2절). 손을 든다는 것은 기도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주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렇게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을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기도에 특별한 포즈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제스처라는 것이 또 다른 의사소통의 도구인 것처럼 기도의 포즈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아삽은 마치 눈이 보이지 않아 손을 뻗어서 사람을 찾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팔을 뻗어서 구조자의 손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닿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는 그 때 그래도 하나님을 찾았다.
그런데 3-4절을 보면 그 결과가 좋지 않다.
3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4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3-4절)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고 있는데, 여전히 그 마음은 불안하고 근심하고 심령이 상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내 안에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말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잠못드는 밤이 계속된다.
괴로움은 항상 밤에 더하다. 육체의 아픔도 밤에 더 심해지는 경우가 많고 지금 아삽이 말하고 있는 영적인 고통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인 생각,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애써 부인하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를 해도 어느새 원점으로 돌아간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답이 있기는 한건지, 그냥 기다리다보면 괜찮은건지.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 것 같은데 나만 이런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을 때, 우리는 문제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남에게서 그 책임을 찾기도 하고 나에게 찾기도 한다. 남에게서 찾으면 분노하고 나에게 찾으면 좌절한다. 하지만 어느쪽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런 식으로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
다행히 아삽은 괴로움 중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는다. 그는 이번에는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해 봤다.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다.
5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5-6절)
이 역시 고난 중에 믿는 자가 보여야할 모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다. “밤에 부른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면서 즐겁게 드렸던 찬양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는 것조차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쁨의 찬양을 드렸던 지난 밤과 눈물의 기도를 하고 있는 오늘밤이 너무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생각할 때 아삽의 마음 속에는 오히려 이런 질문들이 이어졌다.
7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7-9절)
앞서 고난의 구체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넓은 의미에서 동일하다고 말했었다. 믿는 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공통적인 이유가 바로 이 질문에 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보이지 않고 소망이 없다고 느낀다.
고난의 상황이 마치 하나님을 바꾸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기에 이겨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상황이 하나님보다 더 커서 하나님이 변하신 것처럼 보인다.
아삽의 표현을 보라.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영원히 끝났는가? 영구히 폐하였는가? 잊었는가? 그쳤는가? 하나님이 변하신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이 은혜가 그쳤다는 것은 정말로 끝을 의미한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고 소망을 가질 곳도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도 주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몰랐다면, 밤에 하나님을 찬양할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위로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이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부터 몰랐다면 지금 이렇지 않을 것이다.
신앙을 버린 자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들이 있다. 집안의 무너진 경제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가장들이 있다. 깨어진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부부들이 있다. 한때 사랑으로 뜨거웠던 교회가 미지근해져서 고통스러워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오히려 현재의 고난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은 오히려 현재 내 모습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에 좌절감만 더욱 깊어진다. 더 이상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만약 과거의 아삽이 고난 가운데 있는 다른 성도를 찾아갔다면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주께서 영원히 너를 버리신걸까? 당연히 아니지.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까? 그것도 아니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히 끝날 수도 없고 약속하심도 폐할 수 없어. 전지하신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을리도 없어. 오래참으시는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긍휼을 베풀지 않으실리도 없어.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어. 네가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지금 고난 중에 있는 아삽도 물론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시험 문제라면 아삽은 모두 “X”로 정답을 표기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의 지식이 아니라 감정이다.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 현재, 하나님의 사랑은 끝난 것 같다고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뭘 더 할 수 있을까? ‘감정’은 상황에 대한 반응인데,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지금은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만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쯤에서 멈춘다. 고난의 초기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가진다. 그러다가 큰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조금 실망하지만, 그래도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뭔가는 보여주시겠지하는 기대를 가지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하지만 고난의 크기나 길이가 기대를 훨씬 벗어나면 그런 것들이 지금 나와 관계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말씀에 따라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아 봐야 소용없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포기하고 멈춰서는 것이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할게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1-9절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긴 하지만 생각이 ‘나’를 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지금 어떤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고 하며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지만, 그것을 통해 기억한 것도 정작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중심에 있다. 내가 그때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이렇다는 생각에 더 우울하고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아삽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시편 77편은 11절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11절은 앞의 9절까지와는 내용이 다르다. 자포자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았던 그의 기도가 이제 달라진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 상황에 대한 관점을 바로하는 것이었다.
고난을 변화시키는 과거(10-20절)
10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2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10-12절)
10절은 번역이 많이 갈리는 구절이다. “잘못”과 “해”라는 두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진다. 여기서 “잘못”은 고통이나 혹은 호소를 의미할 수 있다. “해”는 5절에서처럼 세월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바뀐다는 동사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렇게 경우의 수를 따져보면 4개의 다른 번역이 가능하다.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의미가 된다. 7-9절의 질문에 대해서 마치 ‘그렇다’고 답하는 듯한 자신을 고통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다. 고난 그 자체가 고통을 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변하신 듯, 더 이상은 과거처럼 행하시지 않으시는 듯 생각하는 자신의 관점이 오히려 고난 중에 고통을 더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하나님이 변하셨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생각이 변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바로 잡겠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서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그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역사가 변하지 않음을 그 시간들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이라고 말했던 과거를 여기서 아삽은 “여호와의 일들”,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 “주의 모든 일”, “주의 행사”라고 다양하게 표현한다. 즉, 그냥 지나간 좋은 세월로만 생각했던 과거를 우연찮게 누렸던 호사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또한 그 모든 역사를 기억하며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낮은 소리로 되뇌이겠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기억했고 지나간 세월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었고 오히려 고통을 더할 뿐이었다. 그때 그가 했던 것은 그저 좋았던 지나간 세월과 그렇지 않은 현재를 대조했던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과거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과거를 하나님의 역사로서 바라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리고 단순히 일반적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러한 관점을 반복해서 마음 속에 새겨두겠다고 말한다. 읊조리고 되뇌이겠다는 것이 바로 그런 다짐이다.
이것이 믿는 자가 고난 중에 해야할 일이다. 어떤 고난을 만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성장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삽과 같은 과정을 겪을 것이다. 기도하고 기대하다가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무력함을 느낀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난 것처럼 멈춰버린다. 그때 아삽과 같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를 단순히 지나간 세월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서 내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13절부터 말씀은 아삽이 실제로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의 마음에 새겨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기록했다.
아삽은 자신의 달라진 관점의 결론부터 말한다.
13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4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15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13-15절)
아삽의 이 찬양은 출애굽 직후 모세의 찬양과 유사하다. 뒤의 내용도 그렇고 아삽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출애굽 사건, 그 중에서도 홍해도하 사건을 기억하고 그의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하게 드러낸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위대한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이 두 사실은 직접 홍해의 이적을 경험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도 깨달았던 것이고 그 과거를 기억하고 읊조리고 되뇌인 아삽도 동일하게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 이제 그 사건은 ‘지나간 세월’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능력과 구원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16-20절은 아삽의 마음에 새겨진 홍해 도하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16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18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9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16-19절)
하나님은 구름과 흑암으로 이스라엘과 애굽의 추격대를 분리하셨고, 강한 바람으로 홍해의 바닷물이 갈라지게 하셨다. 아삽은 이 사건을 매우 시적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천둥과 번개로 그 능력을 나타내셨고 물들은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아삽은 표현했다. 홍해 가운데 난 길은 분명 ‘주의 길’이었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발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20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20절)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모세와 아론이 눈에 보이는 인도자였고 홍해에 그들의 발자취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일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애굽에 재앙을 내려 그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애굽의 군대를 바다에 수장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광야의 혹독한 환경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모세의 말처럼 그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여 사랑하시고 그들과 언약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약속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백성들, 심지어는 불평까지 했던 그의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들을 구원하셨다. 돌보셨다.
이 하나님이 바로 아삽이 그동안 믿고 섬긴 하나님이다. 그분의 발자취는 알 수 없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사랑은 이런 놀라운 역사들을 만들어 낸다. 사실 아삽이 밤에 노래하게 했던 것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만들어낸 역사였다.
고난 가운데 7-9절과 같은 질문을 우리도 할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 그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내 삶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이 끝난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은 나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없다. 상황을 그렇게 보는 우리의 잘못된 관점이 있을 뿐이다. 고통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을 감당못할 고통으로 내가 만들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아삽처럼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홍해 뿐 아니라 십자가를 기억할 수 있다. 아삽이 홍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발자취를 추적했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다.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멈추지 않으시는 한 멈추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도전
사실 시편 77편을 끝까지 읽어 보면 뭔가 좀 허전하다. 10-20절이 1-9절과 분위기가 다른 것이 맞기는 한데, 뭔가 다른 시편처럼 깔끔한 결론이 나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제 나는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겠다거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거나 하는 내용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저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시편이 마무리가 된다. 과연 아삽은 고난에서 벗어났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고난이라는 상황은 그에게 여전히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삽은 그 고난 중에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여전히 인자와 은혜, 긍휼을 베풀고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은 변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도 변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생각이 그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하길 바란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며 계속해서 확신 가운데 담대함과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