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화평 혹은 분쟁
본문: 누가복음 12장 49~53절
설교자: 조정의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엡 2:14)이 되셨고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골 1:20).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사 53:5).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니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고 평화를 주기 위해 오셨고 화평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면 뭔가 좀 이상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듯이 성경은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왜 정반대의 말씀을 하실까요? 어떻게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면서 분쟁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평화의 메시지를 주시면서 사람들을 갈등 관계 속에 넣으실까요? 오늘 저는 본문을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주님이 던진 말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49절) 불은 어떤 이미지입니까? 손이나 옷에, 집에 불이 붙었다면 어떨까요? 불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혀에 대해 말할 때 작은 불의 온 산을 태우는 파괴력을 말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러 번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할 때 불을 사용되었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맹렬한 불꽃, 화염”이라고 표현됩니다.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사 2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 21:12)고 하셨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파괴적인 심판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도 불과 유황을 사용하셨습니다. 불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 “쭉정이”를 불에 던져 넣으라고 하셨습니다(눅 3:9, 17). 불은 하나님의 심판, 분노, 진노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바로 이런 불을 던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땅에 왔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는데, 이 땅에 온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내 양에게 생명을 주고 풍성히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땅에 불을 던지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에는 파괴, 심판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응급상황에서 칼을 사용할 때 불에 달굽니다. 그 이유는 소독하기 위해서입니다. 병균,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의 불도 그런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정화하기 위해서,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불에 견딜 만한 모든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민 31:23) “그(여호와의 사자)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말 3:2) 광석에는 불 이외의 물질이 있는데 불로 단련하면 순수한 금이 남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런 일을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불의 이미지는 바로 이런 정화의 기능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벧전 1:7) 불순물을 제거하고 남은 순수한 물질을 다른 물질과 분리해서 거룩하게 만드는 불의 작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 여기서 성령과 불은 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영혼을 새롭게 살리는, 거룩하게 하는 불의 작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심판의 의미이고 어떤 경우에는 구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심판과 구원의 이중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 예수님은 심판하는 불과 같이 말씀하셨고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동일한 말씀이 구원의 말씀이 되기도 했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죄인)들에게는 구원의 말씀이 되고 보는 자(교만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은 간단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거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를 영접하라”는 명령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접하는 것과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반응에 따라 예수님의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이기도 하고 구원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 구원이 필요한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8).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던지는 불은 정화의 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병 고침을 받은 자들, 사회적 약자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믿고 따랐습니다.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 바리새인, 서기관들, 율법교사들은 스스로 충분하고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일한 말씀이 그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눅 10:13; 눅 11:42-52).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주님이 전파하신 말씀, 이 땅에 던지신 불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말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전한 천국 복음은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교회 나오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행복하고 기쁘기만 한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이기적인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극명히 사람들을 나누는 말씀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소멸시키는 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깨끗하게 되는 불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평안을 누리고, 누구든지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철저한 상반되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지만 모든 사람에게 평강의 왕이시진 않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 가운데 평화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불을 이 땅에 던지러 왔는데 불이 이 땅에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더 원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평화를, 거절하는 자에게는 심판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메시지를 전파하실 뿐만 아니라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1. 주님이 이룬 사역(50절)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0절)” 세례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미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받을 세례”라는 표현과 동일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혀 달라던 제자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의 잔과 세례는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받을 고난을 말합니다. 잔과 세례는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받을 세례”는 구약 성경에서 물에 잠기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홍수, 애굽의 군대가 수장된 것, 요나가 물속에 잠긴 것 등은 하나님의 진노, 심판, 공의 등으로 표현됩니다. 잔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저주의 잔, 진노의 잔으로 표현됩니다. 이사야서 51:17에서도 하나님의 분노의 잔, 맹렬한 진노의 술잔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이 오르셨던 십자가가 사실 진노의 장소였습니다. 우리에게 쏟아졌어야 할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진노와 저주가 그리스도께 쏟아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내가 받을 세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이 말씀을 하신 순간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실 때였습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고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할 진노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고초와 수난, 멸시, 조롱, 고통,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과 같은 고통들은 죄인인 우리에게 쏟아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의 잔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통해 모든 진노를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절대 이뤄질 수 없는 화평 조약에 사인을 하신 것입니다. 그의 피로 평화 조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노력을 다해도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의 평화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역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들에게는 평화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거절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의미일까요?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하심을 받고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 하고 죄인이라고 해서 못 박았지만 이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며 괴로워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들에게 임할 진노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분을 살리심으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역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영원히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자들은 영원히 심판 받음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1-12,1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불과 같은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그 메시지를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평화의 메시지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진노의 메시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주가 받은 진노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죄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런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수치와 조롱과 모욕과 핍박, 채찍질, 벌거벗겨지고 죽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완전한 단절(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을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진노와 분노를 담당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어떤 진노가 내려지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그것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을 세례가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일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42)”이라고 기도하십니다. 그 후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 중, 종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쳤을 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3-54)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십자가에 오르는 것을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평화 조약을 맺어주시기 위해서고 자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 주님이 원한 반응(51-53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51-53절)”

복잡하고 얽히고설킨 분쟁의 관계들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 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 예수님을 쫓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반대되는 사람이 대적할 것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른다면 이러한 분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나를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면 동일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평안, 자비와 은혜, 포용, 이해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 평안, 자비와 은혜, 포용과 이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전해주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주위의 죄인을 사랑하고 죄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달하는 그 메시지 자체에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경고가 들어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과 달라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 분쟁이 임할 수 있다는 각오를 언제나 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서 이런 갈등이 있는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거절하고 주님의 원수인 자들과 동일한 삶을 산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이 이 세상에서 어느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철칙이다. 우리는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바클레이, 236p)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처럼 대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오늘의 가르침은 중간지대의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버립니다. 그리스도와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요한은 말합니다(요일 2:15). 여러분의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보십시오. 내 삶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삶인지, 예수만을 자랑거리로 삼아 살고 있는지 돌이켜보십시오. 우리가 화평을 누리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진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갈등을 각오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던진 불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되고 있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거절한 너희들에게 어떠한 진노가 임할지를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삶의 모든 영역가운데 애매하게 놓여있는 자리를 정리하기를 바랍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여러분을 영원히 불태워버릴 불이 될 수도 있고 여러분을 구원할 수 있는 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시 않은 분들은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그들에게 임할 진노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고 한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바라기는 모든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자가 되신 분들은 날마다 우리 삶에 엉겨 붙는 세상적인 생각, 세상적인 삶의 모습들을 버리고 예수님만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