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형제를 사랑하는가, 살인하는가?

본문 : 요한일서 3장 11절~18절

설교자 : 조 정 의

극단적인 이분법은 위험하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빛과 어둠, 둘로 영역을 나눠 독자를 압박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가? 어둠 안에 행할 수 없다.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는가?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세상을 미워하라. 진리를 따르는가? 거짓과 맞서 싸워라. 하나님 자녀인가? 죄를 짓지 말라. 회색지대는 없다. 왜 이토록 명백한가?

성별의 이분법으로 생각해보자. 남녀 성별 외에 제3의 성별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 큰 문제가 된다. 생물학적 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욕구와 싸워야 하는 사람의 존재와 고통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제3의 성별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내면의 갈등과 싸우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길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힌다. 존재하지 않는 제3 영역을 인정하면 그곳에서 사람들이 자기 욕구대로 살며 방종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명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소위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아웃사이더 성도’의 존재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영적 어린아이로 성장이 필요한 성도가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중간에 제3 영역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적당히 세상을 즐기고 죄를 범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섬기는 일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여도 괜찮다고 인정하고, 결국 방종하게 만드는 일을 절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은 참 하나님 자녀라면 누구나 맺어야 할 두 번째 열매를 가르친다. 첫 번째는 죄를 짓지 않는 것, 바른 적용으로 죄와 항상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회색지대 걸쳐 산다. 성령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당신을 더욱 빛으로 인도하여 하나님 자녀의 참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시거나, 당신이 어둠에 속한 것을 명백히 드러내셔서 그곳에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게 하시길 간구한다.

1. 기준: 하나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한다(11절)

조금 전까지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난다고 말했고,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 곧 마귀의 자녀라고 분명히 선언했다(10절). 두 가지 열매가 모두 언급되었다. ①의를 행하지 않는 것—죄를 짓는 것, ②성도(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서 요한은 “우리” 곧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된 자들은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 자녀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다. ①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죄와 싸우고 의를 행해야 한다. ②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신 모든 의로운 일의 완성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롬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이런 측면에서 참 하나님 자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열매는 서로 조화를 이룬다. 가장 크고 포괄적인 의의 열매는 사랑이다.

성도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요한의 독자(너희)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이다(요 15:12).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동일한 계명을 주셨지만(레 19:18), 이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계명이 되었다(요일 2:7-11).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근거),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며(본), 성령을 통해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힘을 얻는다(원동력).

요한이 3장 본문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생각해보자. “보라!” 무엇을 보고 감격하라고 명하는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1절).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은 자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요일 4:11).

2. 이유: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12-15절)

사실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은 하나님 모르는 세상도 캠페인 문구로 자주 사용할 정도로 일반적이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에게 더욱 요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은 두 가문을 구분하고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미워하는 자를 악한 자 곧 마귀 가문 사람으로 구분한다. 생명 곧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는 사랑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 가문 사람은 사랑한다. 결국 성도 사랑이라는 열매는 뿌리내린 곳, 우리가 속한 가문이 어딘지를 밝힌다.

자, 여기 마귀 가문에 속한 가인을 대표적인 예시로 만나보자(12절). 그는 우리 반면교사다. 가인은 누구에게 속하였는가? 그는 악한 자에게 속했다. 악한 자는 마귀다(요일 3:12; 5:18, 19). 

가인이 무슨 일을 했는가? 그 아우를 죽였다(끔찍한 살인, 도륙, 도살, 잔인성 강조). 어떤 이유로 죽였는가? 필로는 ‘가인의 죄가 영원한 사망을 낳는 자기사랑에서 나오는 죄’라고 정의했다. 탈굼에선 가인이 심판, 내세, 의인의 보상, 악인의 처벌 등을 모두 부인하는 악인으로 평가한다. 심지어 유대인 문헌 중엔 마귀가 하와를 성적으로 유혹하여 낳은 자식이 가인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가인과 그가 행한 일을 이렇게 연결 지었다.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12절).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한 행위를 낳는 자였고, 아우는 의로운 자에게 속하여 의로운 행위를 낳는 자였다. 그래서 가인이 아우를 죽인 것이다. 이것은 가문 간의 전쟁이다.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의에 속하여 의를 행하는 자를 시기하고 미워한다(요 3:19-21).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8:42, 44). 아버지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13절에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마귀에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래 세상에 속했으나 거기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세상이 더욱 미워한다고 말씀하셨다(요 15:18-19). 하나님 자녀답게 살수록 미움은 더 커진다(현재형).

요한은 하나님 가문에 속한 자들에게 “가인 같이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12절). 문자적으로 “악한 자에게 속한 가인과 같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속한 가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녀는 의로운 분, 하나님께 속했다(요일 3:7). 요한은 그것을 14절에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4절)

사망생명이 대조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사망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분리된 관계가 사망이다(엡 2:1). 그럼 생명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어 죄와 허물을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된 상태다. 15절에 요한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말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자, 즉 소속이 바뀐 자들의 마땅한 열매는 “형제를 사랑함”이다. 이것은 토대가 아니라 표증이다. 구원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이로써 우리 소속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알거니와”, 미래 분명하게 드러날, 현재 경험하는 실재).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의 소속은 어디겠는가? 사망이다. 종교적으로 얼마나 열심이 있든, 직분이 무엇이든, 교회 다닌 연수가 어떻든 관계없다. 사랑하지 않음은 여전히 그가 사망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날 때부터 속한 소속, 가문이 바뀐 적이 없는 것이다.

15절에서 요한은 더욱 강력하게 이 사실을 피력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미워하는 것과 살인이 같은 수준의 죄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마 5:22). 형제를 미워하는 자나 살인하는 자 모두 처음부터 살인한 자 마귀에게 속해있다는 점에서 같다(요 8:44). 

결론적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마다 영생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 즉 하나님과 화목한 가족 관계 안에 없음이 너무나 명백하다. 요한은 이 사실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너희가 아는 바라.

잠시 당신의 뿌리, 가문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라. 때로 성도를 향한 사랑이 부족할 때가 있다. 심지어 특정 성도가 미울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요일 1:9). 하지만 지속적, 반복적으로 성도에 대한 사랑 없음이 드러날 때, 오랜 세월 특정 성도를 향한 미움이 사라지지 않을 때, 회색지대에서 어둠 혹은 사망으로 당신의 소속이 드러나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렇다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라. 예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어 영생을 얻어라.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다(요 5:24).

3. 방식: 하나님께 받은 사랑처럼 사랑한다(16-18절)

그러면 영생이 그 속에 거하는 자, 하나님 자녀는 어떤 열매를 맺는 것이 합당한가? 성도 사랑의 열매는 어떤 모양인가?

가인이 마귀 가문의 대표였다면, 하나님 가문의 대표는 16절에 나오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1).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지만 의인도 아닌 죄인, 선인도 아닌 원수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사랑의 크기는 얼마나 더 클까? 바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다(롬 5:7-8). 요한은 16절에서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사랑의 크기와 성격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자매에게 보여야 할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가 맺어야할 성도 사랑의 크기와 형태다. 우리는 자기희생적인 사랑,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 성도를 위하여 자아를 죽이는 사랑을 해야 한다. 

흥미로운 대조가 아닌가? 마귀에게 속한 자는 남을 죽이는 자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자신을 죽이는 자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 정의한 사랑은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이다(15개 모두 동사).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 자랑,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거나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 모두 자아를 죽이는 행위이다. 우리는 성도를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런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혀 그런 사랑을 맺는 것이다(엡 3:17-21).

요한은 또 다른 행함에 주목하는데, 17절에 나오는 실질적 도움을 주는 행함이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는 재물을 가지고 있고, 형제는 궁핍하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봤다(흘끗 본 것이 아니라 오래 주시함). 그런데도 도와줄 마음을 닫는다. 문자적으로 “자기의 내장을 닫으면”이다. 감정을 통제하는 장기(내장, ’속상하다’)을 닫는 것 즉 긍휼, 동정, 연민의 마음이 흘러나오는데 억지로 틀어막는 것이다. 그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사랑은 말과 혀로 표현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에 부합하는 행함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요한이 특별히 주목한 행함은 성도의 필요를 보고 긍휼한 마음을 품고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행함이다. 야고보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책망했다(약 2:15-16). 

우리는 반드시 성도의 필요를 실제로 채우는 행함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왜 요한은 이것을 진실한 사랑이라 했을까?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은 다른 말로 ‘진리 가운데’ 하는 사랑이다. 복음의 진리와 일치하는 행함으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복음의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가르쳐 주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궁핍함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사 자기 아들을 내어줌으로 우리의 영적 필요를 채우셨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엡 5:25; 딛 2:14). 그 진리와 일치하는 행함이 무엇인가? 자기희생적 사랑, 자아를 죽이는 사랑, 그래서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가 맺어야 할 사랑의 열매다.

적용

오늘날 하나님 자녀는 큰 도전을 받고 있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해지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딤후 3:1-2, “말세에…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1980년대 세상과 2021년 세상은 얼마나 다른가? 이웃 사랑이 최고 미덕이었는데 이제는 자기 사랑이 최고 가치가 되었다. 교회도 그 막강한 변화의 급류 속에 서 있다. 

하지만 교회는 달라야 한다. 그 터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 세상이 갈급해 하는 그 사랑을 교회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이 묘사하는 초대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행 2:42-47).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 성도를 사랑하는 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다. 요한은 그래서 3장 1절에 “보라”, ‘감격하고 열광하라’고 간청한 것이다. 당신이 뿌리 박혀 있는 사랑의 너비,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엡 3:19). 성도를 향한 사랑이 방전될 때마다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으로 충전되어야 한다. 마음에 미움이 싹틀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그 사랑으로 미움을 제거하고 사랑을 심어라.

둘째, 사랑하지 않는 죄, 미워하는 죄를 자백하라. 마틴 로이드 존스는 본문에서 요한이 ‘사랑하라’ 명령했지 ‘좋아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어떤 성도는 기질적으로 잘 맞지 않고 좋아하기 힘든 면을 가지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사랑’이 그 불편함, 어려움을 뛰어넘어 ‘좋아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반항심을 가지고 있다. 자아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 죄를 우린 회개해야 한다. 주님이 당하신 수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자로서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불편함과 어려움을 넘어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라.

셋째, 성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필요를 채워라. 절대로 자기 자신과 가족만 돌보는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시간, 재능, 영적 은사, 재물의 일부는 반드시 다른 지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성도에 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최고의 수단은 기도다. 반갑게 인사하고 교제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필요를 발견하는 좋은 방법이다. 성도가 모인 곳에 함께 하는 것 역시 서로의 기쁨을 채우는 귀한 일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실질적 성도 사랑으로 시험하여 보라(엡 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