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열방이 기뻐 노래하게 하소서

본문: 시편 67편

설교자: 최종혁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으신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말했다(벧전 2:4). 바로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말한다.

벧전 2:9-10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다. 본래 어느 나라의 어느 백성이었는지가 관계 없다. 어느 민족이었는지도 상관없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거룩한 나라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다.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신약의 성도들 전에 이런 동일한 호칭이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신 10: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출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표현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제사장은 본질적으로 제사 의식을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실제적이고 궁극적인 중보자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 뿐이시지만, 하나님은 인간 제사장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예수님의 모형으로 삼으셨고 그들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간단히 말하자면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가교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였다는 것은 그들이 나라로서 하나님과 다른 나라 혹은 민족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 이미 말씀해주셨던 내용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줄 것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던 것이다(창 12: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종착지가 아니라 통로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선민 의식’일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을 복의 종착지로 여긴 것이 바로 선민의식이다. 그들은 제사장의 나라로서 그 본질적인 역할을 잊고 단순히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 따라서 자신들은 다른 이방인들과는 다르다는 우월의식만이 남았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돌아온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들만을 위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이방 나라들에게 선포하기도 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복을 구하면서 그 궁극적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왕상 8:60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주변의 나라들이 볼 수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이스라엘을 찾아왔다(왕상 4:34). 그 중 스바의 여왕은 직접 그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왔고 이렇게 고백했다.

왕상 10:9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

이것이 사실 구약 시대의 선교의 모습이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다른 나라가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시편 67편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기록된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시편 67편을 ‘선교적 시편’이라고 말한다.

67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우리”라고 표현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도인데, 그 목적은 그것을 통해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즉, 복을 구하는 것과 그 목적이 열방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 반복된다.

본문의 구조를 보면 3절과 5절에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어서 마치 4절을 포장하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앞뒤로 있는 1-2절과 6-7절은 비슷한 내용과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시편은 구조적으로 4절을 핵심 주제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4절에서 가져온 “열방이 기뻐 노래하게 하소서”다. 우리의 복이 그들에게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다.

열방이 기뻐 노래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다. 그래서 1-2절은 모든 나라가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구하고, 3-5절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해달라고 구하고, 6-7절은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달라고 구한다. 이 기도의 내용을 중심으로 시편 67편을 함께 살펴보자.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1-2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1절)

1절은 아마 익숙한 표현일 것이다. 민수기 6:24-26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 즉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백성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셨다.

민 6:24-26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축복 기도를 공동체의 기도로 재구성한 것이 1절의 기도다. 이것은 구체적이기 보다는 아주 일반적인 기도인데, 몇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복을 구하라고 하셨다는 점이다. 복을 구하는 것에 있어 우리는 두 극단으로 치우치기가 쉽다. 복만 구하거나 복을 구하는 것을 죄악시 하는 경우다.

복만 구하는 경우는 오늘날의 기복 신앙이나 번영 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언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복권이나 주식, 코인 같은 것을 통해 한번에 큰 돈을 얻게 해달라고까지 구하는 그리스도인은 잘 없겠지만, 그래도 노력 이상으로 쉽게 재물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에 그런 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공부는 하지 않았는데 시험은 잘 보기를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를 구하는 것도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단순히 더 좋은 것을 가지기 위한 욕심에서 나오는 기도라면 그런 것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복을 구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경우도 있다. 가난하고 궁핍하게 사는 것이 경건한 것으로 생각한다. 조금만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병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뭔가 이기적인 것이어서 주저하기도 한다.

하지만 구약에서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그렇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빌립보서 4:6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 너희 구할 것을 …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께 나아와서 구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복을 구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한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은 언제나 은혜의 결과다. 이것은 시편을 배우면서 자주 접하는 개념이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우리 기도에 응답할 수 밖에 없게 강력한 기도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언제나 은혜이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다.

세번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복, 가장 궁극적이고 기초가 되는 복은 바로 하나님 자체이시다. 하나님께서 ‘얼굴 빛을 비추는 것’은 성경에서 관용적인 표현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 선하심을 나타내셔서 복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관용적인 표현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즉, 복을 구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만 있으면 그것은 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같은 말씀을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실까, 성령을 주실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없이 좋은 것이 주어질 수는 없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것이 가장 큰 복이다. 그래서 모세도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범죄한 후에 그들을 위해 중보하면서 단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만 구했던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하나님께 친히 함께 가달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그 땅에 들어가서 잘 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더욱 내 삶에서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과 같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게되고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좋으신 하나님을 더 알리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2절이 자연스럽게 그런 기도의 목적이 된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2절)

여기서 ‘도’와 ‘구원’은 매우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로서 이 맥락에서 어떤 것으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뜻을 가지시고 행하시는 모든 일들로 광범위하게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분명한 일들로 인해 모든 나라가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다. 마치 애굽에 내린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으로 이스라엘이 바다를 건넌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애굽과 주변국들에게 알려졌던 것과 같다.

하지만 여기서 ‘알다’는 정보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뒤에서도 강조되는 것처럼 이것은 좀 더 관계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여리고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지만, 그 중 정말로 하나님을 관계적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던 사람은 라합이었다. 나오미에게 일어났던 일들로 인해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정말 하나님을 알고 떠나지 않은 사람은 룻이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다. 이 시편의 기도는 그렇게 모든 나라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구한다. 오늘 우리의 기도로 바꾼다면 모든 나라가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 받기를 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바람이 3-5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소서(3-5절)

여기서는 복에 대한 내용은 없고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가 계속 반복된다. 마치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가 단지 복을 받고 싶어서 이런 기도를 한다고 오해하실까봐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복을 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복을 받아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셔야 마땅하신 분이시기 때문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3, 5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찬송하게 하소서’는 ‘감사하게 하소서’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그 바탕에는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의 찬송을 드리기를 간구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민족이 각자 자기들만의 신을 만들어 섬기고 서로의 신을 인정하던 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신’이라고 부르지만 않을 뿐이지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각자의 믿음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다양성’과 ‘상호존중’이라는 좋은 명분 아래서 사람들은 나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 진리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진리는 그저 많은 것 중의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많은 신들 중에 하나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4절은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다.

“…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4절)

여기서 심판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고 다스림은 인도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공평히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나라마다 왕들이 있고 그 왕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아들 혹은 신 자체로 추앙을 받았지만, 사실 모든 민족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함께 읽고 있는 열왕기상하의 역사를 보면 이것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저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셨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나뉘었을 때 그의 나라를 나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대로 되었다. 엘리사는 아람 왕 벤하닷이 죽게될 것과 그의 신복인 하사엘이 아람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을 예언했고 그대로 되었다. 앗수르 왕 산헤립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졌다. 왕들은 일어섰다 사라지고 나라들도 그렇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도 계속해서 달라졌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이심을 보여주었다. 역사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구약까지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만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거나 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된 메시아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질 때가 다가오고 있고 그 때 우리는 이 기도가 성취되는 모습을 볼 것이다. 하나님 만이 다스리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럼, 이런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일까? 답은 그렇다. 하나님은 “공평히” 다스리시는 왕이시기 때문이고 은혜와 자비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이 시편이 기록된 시대를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항상 다스림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냐가 그들의 삶에 있어 정말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과 같은 분이 다스리신다는 것만큼 좋은 소식은 없다. 자기 백성들을 공의로 다스리고 인도하는 선한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을 인정한 자들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굴복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의 모습이다. 참된 기쁨과 만족, 안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 당시의 사람들도 그랬고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기쁘고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들을 한다. 재물이나 지위와 같은 것들을 많이 얻어보려고도 하고, 또 반대로 남에게 많이 베풀면서 뭔가 보람을 찾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통해 어느 정도의 행복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전도서의 말씀처럼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전 1:8).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것들을 먼저 추구하고 누려봤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그런 것들이 ‘헛되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지금만큼 사회가 발전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보다 먼저 그런 것들로 행복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있고, 그들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거기에 참된 기쁨이 없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람들은 마치 결론은 알고는 있지만, 그것마저 부인하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처럼 힘겹게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이 산을 넘어간 사람들이 그곳에 기쁨이 없다고 말을 해도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이 산을 넘는 것 뿐이니 그것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답이 없는 곳에서 답을 찾으려면 힘들 수 밖에 없다.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의 지혜로운 결론은 바로 이것이었다.

전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 세상만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헛되지만,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공정히 다스리시는 왕이시고 은혜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심을 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그 모든 것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다.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해결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먼저 안 자들의 바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4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5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3-5절)

이 기도에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찬송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그들이 참 하나님을 만나서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 결국 선교라는 것, 전도라는 것은 이런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6-7절은 다시 1-2절의 주제로 돌아가면서 시편을 마무리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소서(6-7절)

“6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6-7절)

땅이 소산을 내어 주었다는 것은 풍요로운 추수 때를 의미한다. 이것이 현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증거이고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을 주시는 모습을 통해 결국 땅의 모든 끝,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고 경외할 날을 소망하며 이 기도가 마무리 된다.

도전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이 말씀을 2021년 5월을 사는 우리에게 적용하길 원한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유평교회는 가족 전도의 달로 보내고 있다. 항상 같이 생활하는 가족들에게 전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진지한 얘기를 꺼내는 것도 쉽지 않고 막상 꺼내도 어떻게 말을 이어갈지 막막할 때도 많고 또 잘 들어주는 것 같지도 않을 때가 많다. 한번 용기를 내서 복음을 말해주어도 별 다른 변화는 없고 다시 그 말을 꺼내기는 더욱 힘들어 진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가족들을 사랑한다면 그 쉽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한다. 그들이 정말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을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말로 그렇게 해야하고 우리의 삶으로 그렇게 해야한다.

먼저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복을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결국 우리 삶에 드러나는 복을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나시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일임을 선포해야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역사하시기를 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복들이 많이 있다. 그것들은 당연한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복이다. 그 복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그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가정 안에서 더 좋은 가족 구성원이 되는 복을 구해야 한다.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남편이 되기를 구해야 한다. 자녀로서 부모로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알아채려면, 뭔가는 달라야 한다. 우리의 변화된 삶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나타낼 것이다.

때로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일 때도 있다. 고난 중에 세상과는 다른 평안함과 기쁨 중에 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참된 기쁨과 평안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기억하고 항상 기뻐하여 하나님을 전할 수 있다.

우리는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사장들이 되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한 제사장들이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좋으신 하나님을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바르게 소개해 주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열방이 기뻐 노래하게 하시기를, 우리의 모든 가족이 기뻐 노래하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