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 아버지의 보상

본문 : 누가복음 6장 37~38절

설교자 : 조정의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가르침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말씀 중 하나입니다. 다음 번 누가복음 설교까지 그 부분을 다루고 7장에서는 가르침을 마치시고 가버나움으로 가신 예수님의 행적을 좇아갈 예정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가르침에서 나를 따르는 것이 복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참으로 복된 길이며 그래서 그 길에서 당하는 고통 중에 오히려 기뻐할 이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6:20-26). 두 번째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의와 대상, 방법, 이유에 대해서도 저희의 사랑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 계명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자비로운 자가 되라”(36절)는 주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하고 탁월하며 세상과 다른 특별한 가르침인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동시에 얼마나 어려운 가르침인지 절감했습니다. 솔직히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의미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이 중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분은 없을 것입니다. 혹은 ‘원수에게 선대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누군가 나의 자녀를 의도적으로 해쳤을 때 그를 위해 오히려 기도하고 선대할 수 있습니까? 이 명령은 진지하게 생각해볼수록 지키기 힘든 명령입니다. 너무 이상적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순종 가능한 명령입니까? 이러한 의문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 채워집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명령은 지난주의 명령보다 더 무겁고 진지한 명령입니다. 단 두 구절에 네 가지 명령이 나옵니다. 앞의 두 개는 부정형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고, 뒤에 따라오는 두 개는 ‘무엇을 하라’는 긍정형의 명령입니다. 아마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은 그 명령이 아주 명백하기 때문에 그 의미에 대해 아무런 오해도 갖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가?’의 의문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먼저 그 명령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순종 부분을 함께 듣기로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두 가지 “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오고, 뒤이어 “하라”는 명령이 두 개 이어집니다. 네 가지 명령은 뒤로 갈수록 더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뒤로 갈수록 더 많은 결단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뒤로 갈수록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단계, 혹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아가는 깊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특별한 점은 각각의 명령 뒤에 “그리하면”이라고 순종에 대한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명령 “비판하지 말라” 뒤에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라고 결과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비판하지 않으면 우리도 비판받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두 가지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지 않으면 남도 나를 비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비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만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저는 본문이 말하는 의미가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유사한 가르침이 마태복음에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16)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마 25:40). 내가 남을 비판하는 것, 남을 정죄하는 것,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이웃에게 주는 것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본문 말씀의 마지막 문장 그대로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라”(38절)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상”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본문의 네 가지 명령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앞에 부정형 명령을 한 번에 다루고, 이어서 긍정형 명령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비판하지 말라”입니다. “평가하다” “분석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옳은 판단 즉 분별 자체를 금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 12:56-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해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를 가려낼 것을 명하셨고(마 7:15-23), 사도 바울도 교회에서 죄에 빠진 자들을 분별하여 훈계하라고 명하였습니다(고전 5:1-5: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비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비판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의 기준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올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와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의 의복도 우리의 자세에 걸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특별히 여성들에게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라”(딤전 2:9)고 명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옷으로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옷 그 자체가 기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발목까지 오는 치마를 입어야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스스로의 취향과 기호에 따른 기준입니다. 이런 잘못된 기준으로 성도를 판단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닙니다. 비판의 문제는 두번째 이유가 가장 큰데 그것은 바로 비판하려는 자세에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있을 때에도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부각시키고 그들에게 해를 가하려고 판단하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설교를 할 때 저는 성도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들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영혼을 분별해야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모도록 힘을 북돋아드릴 수 있을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권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과 섬김의 마음은 쉽게 잘못된 비판의 태도로 망가지게 됩니다. “어떻게 저런 태도로 말씀을 대할 수 있지?” “저 사람은 분명 영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을 거야”라는 태도로 뒤바뀔 수 있습니다. 도와줄 생각이나 섬겨야겠다는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잘못을 부각시키고 그것에 대한 비방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그치라고 명하십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비판하기 좋아합니다. 혼자 운전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것 중 하나가 비판입니다. “저 사람은 왜 깜빡이도 안 켜고 내 차선으로 들어오지?” “저기서 저러면 안 돼” “저렇게 운전하려면 차라리 버스를 타고 나오지” 그 운전자를 향한 사랑이나 그들을 향한 동정심이 그 비판의 동기가 아닙니다. 단순히 그들의 잘못을 부각시키고 그들을 모욕하기 위함입니다. 돕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참 흥미롭게도 우리가 어쩌다가 운전을 그렇게 할 땐 옆에서 비판하는 다른 운전자들이 야속합니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이것 하나 이해 못하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저 자매님은 항상 저렇더라.’ ‘저 형제님은 이렇더라.’ ‘교회가 이러면 안 되지’, ‘이렇게 일이 진행되면 안 되지…’ 옳은 기준을 가졌더라도 그 비판 안에서 정말 비판의 대상을 아끼고 사랑하며 돕기 원하는 마음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비판을 계속해서 금하라고 명하십니다.

정죄하지 말라는 명령은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비판에서 조금 더 우리의 마음이 비판적인 태도로 굳어진다면 이 “정죄”에 이르게 됩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는 비판은 “그렇게 하는 너는 이런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마땅해”라는 정죄로 쉽게 발전합니다. 우리 스스로 재판관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이 정죄의 문제를 야고보서 공부를 하면서 다루었습니다. 정죄는 결국 내 마음의 교만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죄할 때, 다른 이를 판단하면서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오르는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는 “주님은 인간에 대한 심판을 그분의 독점적인 영역으로 따로 남겨두셨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악행을 경고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죄를 판단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과오나 잘못을 발견하고 우월감에 사로잡힌다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면 당신은 지금 정죄할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비판과 정죄의 근본적인 문제는 마음속에 은혜와 자비가 없이 교만의 마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실 정죄하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 마음에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판과 정죄의 문제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정죄를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오히려 나도 또한 같은 범죄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죄에 빠진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면” 이후의 말씀은 참 두렵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너희가 비판하고 정죄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비판하고 정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분별하신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 우리의 생각,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시는 주께서 비판하신다면 그 앞에서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로마서 2:1-8절에서 판단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1-8)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심판이 없겠지만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비판과 정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음행 중에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7).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판단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과 용납하심, 길이 참으심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 무자비하고 사랑 없이 비판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스스로 자신에게 쌓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마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볼 것입니다. 판단하려는 태도를 버리십시오. 그 엄청난 용서를 받은 우리가 교만하여 남을 판단한다면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엄청난 사랑과 자비를 맛보았으면서 남에게는 사랑 없고 자비 없는 판단의 칼을 대는 것입니다.

이제 한 단계 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야 할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비판과 정죄를 멈추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보다 더 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용서하고 베풀라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풀어주라”는 말입니다. “그릇된 행위의 결과를 면제시켜 주는 것”입니다. 빚을 탕감하는 것은 빚을 갚을 의무를 면제해주는 것, 범죄를 용서하는 것은 범죄자로 하여금 피해를 보상하거나 동일한 고통을 가하는 것을 면제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악행에 대한 나쁜 기억을 털어버리는 것도 포함합니다. 용서는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내게 잘못한 사람의 과오가 떠오를 수도 있고 그에 따른 나쁜 감정이 쉽게 올라올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용서는 바로 그 시점에 의지적 순종으로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다시는 너희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그 사실을 의지적으로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과거의 잘못이 지금 현재 언약의 백성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잘못을 잊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일어나는 분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제하고 의지적으로 억누르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용서라면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것이 본성적으로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쉬운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입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복수는 당연하게 그려지고 그걸 보는 시청자들은 통쾌해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내가 받은 대로 갚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진 제자들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풀어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우리가 용서해야할 대상을 우리 마음속에 가두어두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가두어 놓은 대상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억울함과 분노와 상처로 얽힌 마음의 감옥의 문을 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다음 명령은 “주라”입니다. 단지 마음의 감옥에서 풀어주는 용서뿐만 아니라 원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적극적인 사랑까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경제적인 피해를 입힌 사람의 빚을 탕감해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돈을 주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 겉옷을 뺏은 사람에게 속옷까지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정말 갈수록 더 힘든 명령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2006년 가을 펜실베니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괴한이 나타나 여자아이들 10명에게 총을 쏘아대 5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자살했습니다. 범인은 인근에 사는 우유배달 트럭기사였습니다. 이것은 작은 시골마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더 엄청난 이유는 이 작은 아미쉬 마을 사람들의 그 다음 행동 때문입니다. 그들은 범인의 집을 찾아가 그 아내와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범인의 아버지 팔을 감싸 안으며 “우리는 이미 모두 용서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살인범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의 절반이 피해자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여 위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낸 성금의 일부를 살인범의 남아 있던 가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살인범의 가족이지만 그들 역시 가장을 잃은 피해자 가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한 피해자 부모에게 어떻게 그렇게 용서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해서 판단하시고 정죄하신다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고 빈약하게 공급하시면서 우리에게 이 높은 수준의 순종을 요구하신다면, 아무도 주님을 따르는 이 길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긍휼을 베푼 힘이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시며 주홍빛 같은 우리 무리의 죄를 눈 같이 희게 씻으시고 용서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공급하신다면, 우리는 받은 그 사랑으로 다른 이에게 베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맛본 자들은 그 아버지의 자비를 베풀 힘이 있습니다. 톰 라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는 긍휼을 불러일으키고 정죄는 생각할 수도 없게 만든다.”

예수님은 두 가지 명령 후에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용서와 자비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함과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죄를 들고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한없는 자비와 은혜를 갈구합니다. 그런 우리 마음에 다른 이들에 대한 무자비함이 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만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그 기쁨으로 주인에게 나와서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돈을 빚진 친구의 멱살을 잡고 그를 옥에 가둔 것처럼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한없는 자비를 맛본 자들에게는 이상한 일입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러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처럼 너도 그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않냐”고 호통 쳤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그와 같은 메시지가 나옵니다. “네가 용서하면 나도 너를 용서하겠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 나아가 상대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주십니까?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주리라”하십니다. 이것은 농촌의 배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루에 곡식을 가득 채워 주려면 어떻게 합니까? 자루에 일단 많이 담고 그것을 흔들어 남아있는 공간에 채워지도록 합니다. 그리고 다시 채워 넣고 거의 끝까지 차면 되로 골고루 분배한 뒤 다시 그 위에 한 되 채워 넣어 한 알갱이도 더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꽉 채워 넣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허리띠 위의 옷을 말아 곡식을 채워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안겨준다”는 말이 그래서 등장합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다면 하나님께서는 풍성하게 더 이상 채우지 못할 정도로 담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님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순종하기 어려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그 문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주인공 크리스천이 좁은 문을 지나 죄의 짐을 벗어버리기까지 몇몇의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죄의 짐을 벗고서 거룩한 성에 이르기까지 그는 말할 수 없이 많은 어려움과 험난한 길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들으신 명령, 정말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먼저 걸어가신 분이 계십니다. 가장 낮고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가장 좁고 좁은 길을 걸으셨던 분이 계십니다. 가장 깊은 고통과 괴로움을 맛보시고, 가장 넓은 사랑으로 온 인류를 용서하신 분이 계십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셔서 자기를 따라 이 길을 걷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 힘으로 자기를 따르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비판하기 원하십니까?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베푸신 자비를 기억하십시오. 정죄하지 않는 것이 힘드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용서하기 힘드십니다. 내가 받은 용서를 헤아려보십시오. 주는 것이 힘들다면 내가 받을 복이 무엇인지 세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날마다 이 길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해도 그분은 강하십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그분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그리스도의 형상까지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의지하고 순종함으로 이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깊은 용서와 더 많은 축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고 그것을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을 때 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가능한 이 사랑과 자비와 용서가 세상에 선포될 때에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렇게 외칩니다. “이 가르침에 특히 놀라운 점이 두 가지 더 있다. 첫째는 그 단순성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하고, 선명하고, 직접적이고, 외우기 쉽다. 둘째는 그 희소성이다. 당신은 정말로 이렇게 사는 사람을 몇이나 알고 있는가? 당신은 이런 지침을 생활 규범으로 삼는 공동체를 몇이나 알고 있는가? 대체 무엇이 잘못인가? 하나님이 변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우리가 잊어버렸나?”

우리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의 이웃이, 직장 동료가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내가 이렇게 사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지침대로 사는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유평교회이고, 그 유평교회의 지체인 이 형제, 자매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자비하심은 우리의 자비로 세상에 선포됩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우리의 용서와 섬김은 하나님을 세상에 전하는 탁월하고 특별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 아버지로부터 임하는 보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