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이 없다는 자의 하나님

본문 : 시편 14편

설교자 : 최종혁

시 14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편 14편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에 대해, 그들이 성경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의 상태’를, 4-6절에서는 ‘그들에게 임할 두려움과 심판’을, 7절에서는 ‘그들에게 있는 소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식이 부족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왜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마음”은 어떤 감정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결정이고 의지적인 사고를 말합니다. 즉, 그들은 정말 몰라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고 결정내리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그렇게 믿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많은 이들이 이것에 대해 묻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피조물 속에 보여주셨습니다. 애매하게 보여주시거나 잘 숨겨두셔서 지식이 뛰어난 사람만이 발견하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셨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몰라서, 또는 어떤 증거가 필요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어리석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사람들은 어리석은 결정으로 자신을 속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말하는 것입니다(시 10:4,11). 그들은 왜 하나님을 알면서도 없다고 말할까요? 하나님이 있으면 큰 일이라도 생기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정말 큰 일이 생깁니다. 그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우리를 감찰하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관찰하신 것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나아가서 회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원하지 않는다”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의 어리석은 결정은, 그들의 어리석은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절). 이것이 하나님을 부인한 결과이고, 다르게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이 정말 원했던 삶입니다. “부패했다”는 말은 다른 성경에서 샘이 더러워 진 것(잠 25:26),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된 것(렘 13:7), 도시가 멸망할 때, 왕이 몰락할 때, 약속이 파기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본래 의도에서 벗어난 것, 정상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 단어는 주로 도덕적인 타락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창 6:12).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 행실이 가증하니”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물건을 훔치지도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죄인이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증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를 가리킵니다. 무엇이 가증한 일인가,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모든 일들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표준, 기준]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기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고 또 하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사실 이 두 개의 명령은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그러나 어리석은 자의 행실은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4절) 것입니다. 그들이 이웃을 착취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먹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들을 보시며 하나님이 내리신 결론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2절). 하나님은 하늘에서 인생을 보고 계십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 내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의 결론과 상관없이 살아계셔서 인간의 삶을 살피고 계십니다. 여전히 주권자로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굽어살핀다”는 말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보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굽어살핀다”는 표현은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기 전에 사용하였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그러했고, 바벨탑 사건 전에,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전에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굽어살피시며 그들 중에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십니다.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고 찾는 자가 있는지 살피시고 그런 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이것입니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3절).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펴보시고 내린 결론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입니다. 사람들이 다 치우쳤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가 말했던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사 54:6)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 중에 어떤 이들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어리석은 자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하나님께서 이러한 땅을 보고 계십니다. 노아 때에도, 인간들이 탑을 쌓아 하나님께 도전할 때에도, 소돔과 고모라가 심히 타락했을 때에도 그렇게 굽어보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이 땅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만 오래 참으셔서 그것을 연기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런데 5절에는 지금까지 말했던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모든 사람이 어리석은 자라고 말했는데, 여기 “의인”이 등장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부패하며 행실이 가증하고 선을 행하지 않는 자들인데, 그들 중에 하나님께 피한 자, 하나님이 피난처가 된 자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누군가는 의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5절). 악인들이 의인을 잡아먹고 있는(악인이 의인을 착취함) 그 장소에 악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이기고 있는 상황인데 왜 그럴까요. 바로 “하나님이 의인으 세대에 계심”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악인들이 자신이 잡아먹고 있던 의인들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그림입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6절). 악인들이 약한 자들의 계획을 무너뜨리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의인들의 세대 중에 계시고 그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이 원어로는 “두려움으로 두려워한다”입니다. 이것은 크게 두려워한다는 강조 표현입니다. 그들에게 이것은 참 비극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며 살 때 그냥 그렇게 끝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 내리고 살아도 언젠가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에 그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만나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지만,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오고 그러면 그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누구도 하나님에 합당한 기준에 이르러 살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아가며 그분을 참된 신이라고 인정하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들”, ‘죄를 행하는 자들’, ‘선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어느 누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태어난 우리 모두가 처한 현실입니다. 우리 안에 소망은 없습니다. 소망은 다시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7절). 이 시는 다윗이 쓴 것이니 여기서 말하는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가 이스라엘의 포로기를 말하고 있을 리는 없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포로시대 이전 사람이기 때문) 다윗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된 인간이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 잃어버린 즐거움을 되찾는 것, 우리가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때 회복이 되고 다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기도입니다.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거절했으나 언젠가 때가 되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6).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고(“혈통으로나”), 그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육정으로나”), 다른 사람이 나를 구원시켜 주는 것도(“사람의 뜻으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죄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소망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어리석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할 수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은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고, 원수가 아니라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결정할 수도 있고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그렇게 말한다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것을 보시고 그것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는 무신론자들이 많지만, 지옥에는 그런 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지옥에 가서는 하나님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그가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현실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대부분 그리스도를 영접하신 의인들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어리석은 자들 중에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우리는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께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 끌고 오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뭔가 대단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보여달라 그러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바로 믿는 자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들, 그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존재하신다고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 삶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