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의 말씀, 성경 – 1

본문 : 시편 19편 7-10절

설교자 : 최종혁

시 19:7-10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지난 시간에 저는 ‘하늘’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조금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일반계시). 이제 오늘은 그보다 익숙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특별계시).

 이 성경에 대해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히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성경은 그저 오래된 책일 뿐이라고 말하고, 그보다 낫게 평가하면, 성경은 여러 교훈을 담은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살아갑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의 일부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전부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경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면 학자가 아닌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 정도로 성경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어왔습니다.

 성경에 대한 공격은 최근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처음 타락했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이것은 하와에게 사탄이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격은 곧 하나님에 대한 공격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모함하고 싶어 했습니다. 의심을 심어주어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믿으십니까? 성경은 믿을 만합니까? 성경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오늘날에도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것을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에게 직접 증언하시는 내용입니다. 앞에서 던졌던 우리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본문의 저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시적으로 짧으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경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7).

“여호와의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모세오경’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세오경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법조문만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고 사랑하셨는지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말씀이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완전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흠이 없습니다. 이 단어가 강조하는 것은 부족하지 않고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가 많이 와서 지붕에 물이 샌다면 방수포를 준비할 것입니다. 여기 흠이 없는 방수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크기가 손바닥만 하다면 어떨까요?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그것은 흠이 없지만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방수포는 지붕을 덮을 만큼 충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영혼을 소성시킨다고 말합니다. ‘소성시킨다’는 상태를 변화시킨다, 살아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적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0). 하나님께서 죽어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죽었던 영혼이 말씀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 살아난 사람이 생명력 있는 삶을 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7).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데 있어서 말씀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 영혼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구원받고 말씀으로 살아가며 말씀으로 하늘나라에 갑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7).

“여호와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증언하고 그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며 분명한 증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하지만, 성경은 그 하나님이 태초전부터 계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시다고 말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해 분명하고 자세한 계시를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줍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면서 그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특별한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거가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잘못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확실하다’는 움직이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는다, 확고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절대적이 것입니다. 어떤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확실성’입니다. 어떤 짐작은 증언으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만 원짜리 한 장과 오백 원짜리 사탕을 보여주면 무엇을 선택할까요? 아이는 사탕을 선택할 것입니다. 부모는 그 모습이 어리석다 할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가치를 가르치겠지요.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분명하게 가르치시고 지혜를 주십니다.

 ‘우둔한 자’라는 표현은 ‘열린 문’이라는 의미입니다. 문이 열려 있으면 아무나 들어오고 아무나 나갑니다. 아무런 분별력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참된 지혜, 분명한 기준, 즉, 분별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필요하다면 다른 것을 찾기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증거로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8).

“여호와의 교훈”은 삶에 대한 원리, 안내서라는 의미입니다. 모르는 길을 갈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잘 아는 사람의 안내나 지도, 네비게이션 등이 필요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살다가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이 땅에 두 번 태어나서 두 번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처음 살기에 다들 불안한 가운데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인생에 지침서, 네비게이션, 어두운 길을 알려줄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합니다. ‘정직’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쓰는 말입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고 옳고 그름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는 사람을 정직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구부러지거나 돌려서 말하지 않고 사실을 말합니다. 분명한 의미를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우리를 잘못된 길로 안내하지 않고 올바른 목적지로 알려줍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궁극적인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바로 이 ‘기쁨’과 ‘행복’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바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의 행복’을 생각할 때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나의 행복이 서로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고 원하는 것을 가지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남편에게 순종할 것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에게 존경받고 싶고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내를 사랑할 것만 말합니다. 나는 돈이 충분하면 행복할 것 같은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은데,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쪽에 있고 나의 행복은 저쪽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나의 행복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0-11).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의 목적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성경의 원리와 지침들은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정말 맛있고 건강에 좋은 진수성찬이 차려져있습니다. 그리고 한 편에 라면이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먹을까요? 저는 라면을 좋아하기에 라면을 먹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몸에도 안 좋은 음식을 왜 먹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것일까요? 저를 나쁜 길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그는 정말 좋은 것을 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내 눈에는 라면이 더 맛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자녀가 하찮은 것에 만족하고 부모가 주는 더 크고 좋은 것을 거부한다면 어떨까요? 그것을 주기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 안에 진정한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세상은 재물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재물을 하늘나라에 쌓아놓은 사람이 진정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많은 여자를 만나보고 바람도 피워봐야 인생이 즐겁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결혼 관계 안에서만 남녀 사이의 최고의 행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끔찍한 일을 당하면 불행한 것이고 삶에 아무 어려움이 없으면 행복한 것이라 말하지만, 성경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말씀에 따라가면서 평안을 누렸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인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까요? 말씀이 그렇게 합니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8).

“여호와의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단어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제안이나 추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권위를 가진 명령입니다. 그 말씀이 순결합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의미보다는 ‘밝다’, ‘맑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맑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의미입니다. 분명하지 않은 명령은 위험합니다. 이렇게 하라는 것인지 저렇게 하라는 것인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이 이해한대로 해석하고 살아가면서 그 명령에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혼란에 빠트리지 않습니다. 물론 난해한 말씀들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하여 어두운 세상에서 밝히 보게 합니다. 성경을 볼 때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도, 은사를 가진 사람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그분이 창조주이시고 심판주이시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 그러나 지금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죄에 대한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해, 그 구원 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의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마지막 날 이 땅에 불타고 새하늘과 새땅이 어떻게 나타날 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정결하다’는 것은 결함이 없는 것, 잘못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정되거나 수정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1.0에서 끝났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우리는 이 말씀이 변하지 않고 영원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과거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주어진 교훈이지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특정한 대상을 향해 쓴 것이 맞지만 그것이 그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9).

“여호와의 법”은 하나님의 결정, 판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종적인 판결으로서 진실,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판결이 다 의롭습니다. 인간 재판관들은 기준이 바뀌면 다시 판결을 내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판결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하고 확실하고 올바르고 분명하고 흠이 없고 신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말씀 앞에는 “여호와의”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그 성경의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0).

금보다 순금보다, 그 순금이 정말 많더라도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사모할 만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과 금을 놓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를 빼야 하기도 합니다. 금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말합니다. 아마 가장 맛있고 달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보다 더 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정말 그러하다고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하고 확실하고 올바르고 분명하고 흠이 없고 신실하다고 믿으십니까? 그럼 다윗과 같이 고백할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날마다 읽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며,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지키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가치를 알고 그것이 삶과 영혼에 유익을 준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여전히 말씀을 읽기 위해 힘을 내야 하고 격려를 해야 할까요? 처음 인간이 범죄했던 때를 생각해봅시다. 하와 앞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더 사모할 만한 것이었습니까? 물론 하와에게는 나무의 열매가 그러했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선악과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을 선택한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결과 명령, 올바른 길로 인도해줄 말씀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 우둔한 자들이 되었고 진정한 기쁨을 상실하였으며 눈이 어두워 무엇이 옳은 지 그른지 분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삶을 혼란스러워 하며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영혼은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런 상태가 되어 그런 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중 몇 사람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다시 말씀으로 소성케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예전의 가치관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것 중에 ‘먹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요리해서 먹는 것을 보여주는 방송입니다. 그것을 보면 참 맛있어 보이고 먹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맛있다, 귀하다라고 실감나게 말하면 정말 그렇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만으로 말씀의 맛을 알 수 있을까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먹어야 합니다. 누가 설명하고 보여줘도 내가 먹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배우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다른 것은 주지 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가치는 세상의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내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읽지도 않고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별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의 삶을 살아보지 않고 그것은 충분하지 않다, 효력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있어서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지금도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효과적인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정말 믿으신다면, 그 가치를 깨달으신다면, 다른 것보다 먼저 그것을 선택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참된 기쁨과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