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참된 기쁨의 이유

본문 : 누가복음 10장 17~24절

설교자 : 조정의

주께서 따로 세우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70인이라고 부르는데 예수님께서 이들을 따로 세우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시려는 동네에 이들을 미리 보내셔서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앞서 보낸 대사의 역할이었습니다. 말씀으로 회개를 선포하는 일과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병을 고치는 일 등의 권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영접할 수도 있었고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섬김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들을 거절하는 자에 대해서는 너희를 저버리면 곧 나와 아버지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70인이 돌아와서 주님께 보고하고 그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 대상에게 말씀하셨는데 첫 번째는 70인에게는 기뻐할 것을, 두 번째는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고 세 번째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참된 복이 있는 자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승천하실 기약에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시점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3년 반이라고 보고 이 시점은 3년을 마쳤을 무렵입니다. 3년의 기간은 초기 공생애기간으로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신 장면, 가나의 혼인잔치, 사마리아여인을 만나신 장면, 누가복음의 갈릴리 사역이 1년 반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보다 제자들 중심적으로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대해 집중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가는 9-19장까지 긴 장을 할애하여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주제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인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아마도 유대지역이었을 것입니다.

70(72)명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둘씩 짝지어서 보냈으니 35지역을 다녔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뻐서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놀라움과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랐다면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급히 필요할 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베푸실 때 우리는 기쁨과 놀라움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70인도 이러한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또한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았을 때 기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그저 전달했을 뿐인데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생각하며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또한 70인은 말씀과 함께 전해지는 이적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욱 놀랐을지 모릅니다. 그들의 손으로 베풀어진 놀라운 권능들 주님의 이름 앞에 귀신들이 굴복하는 것을 볼 때 놀라고 기뻤을 것입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 70인은 자신들을 자랑하며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의 권능으로 귀신들이 항복했다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더 기뻐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주님의 말씀에 대해 존 맥아더 목사는 주석을 달았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지 말라. 그들의 대장이 하늘에서 쫓겨나는 것을 내가 보았으므로 그의 앞잡이들이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존 맥아더, 스터디바이블, 1078.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권능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사단에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마귀의 몰락의 시작이라면 십자가는 마귀의 멸망의 확증인 것입니다. “그(예수)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 2:14).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통하여 마귀는 힘을 잃게 됩니다. 70인이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역사할 때 마귀의 세력이 힘을 잃게 되었다고 그들을 격려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18). 독사, 뱀, 전갈의 공통점은 독이 있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들입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대적하는 악의 세력들, 마귀의 세력들을 말합니다. “독사를 밟으며…뱀을 발로 누르리로다”(시 92:13),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고”(겔 2:6). 그 모든 원수를 제어할 권능을 너희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너희를 해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너희를 보호할 것이다, 그 기쁨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승천하실 때 이와 똑같은 명령을 제자들에게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마귀의 모든 악한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주님은 “그러나”라고 하십니다. 그 사실이 기쁨이 되고 격려가 되지만 그보다 더 기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 참 의아하고 놀라운 평가입니다. 이것은 귀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굴복할 때 기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기쁜 것은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앞서 말한 것이 더 직접적인 기쁨의 이유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악한 자의 공격에 대해 간구했을 때 이겨낼 힘이 주어지고, 간구로 질병이 즉시 사라지거나 여러분에게 필요한 물질이 기적적으로 공급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 직접적인 기쁨으로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는데 그것이 기쁨으로 작용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어서 그분과 동행하여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의복과 신발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았지만 옷이 해어지지 않게 신발이 닳지 않게 하셨으며,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이들에게 양식을 공급할 것을 걱정했지만 하나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셨습니다. 또한 이 소수민족이 광야를 둘러싼 악한 무리로부터 공격받지 않은 것도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필요를 공급하신 것과 보호하시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으로 감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성령으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결을 보게 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이것”이 주께서 앞서 말씀하신 그들이 더 기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생, 구원입니다. 두 가지 다른 대상에 대해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 두 대상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어린아이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구원에 이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오직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천지의 주재’라는 표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실 때 어떤 자들에게는 숨기기도 하시고 어떤 자들에게는 나타내시기도 하십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필요없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어린아이들은 매우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겸손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고 택하시기도 하시고 택하지 않기도 하십니다. 미련하고 약한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을 하나님은 택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지혜롭고 강하다,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복음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겸손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복음을 나타내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예수님은 영생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입니다. 이것은 지식적인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형성되고 친밀하게 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관계 속에서 그 분을 알아가는 것이 영생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누가 그 아들과 아버지를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라서 하나님을 본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직 아들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아들의 소원대로 아들의 계획, 택함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는 랍비가 있어서 랍비의 제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전했었습니다. 그들이 다닐 때 그들을 영접하고 필요를 공급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쩌다 기적을 행했을지도 모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공급을 받거나 안전하게 보호를 받거나 이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택하셔서 계시를 받는 자들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와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토록 함께 누리십니다. 영생은 우리가 그 연합에 들어가 그것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랑하고 영생에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들은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천국 문을 열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속에 초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에게 주어진 은혜와 권능에 대해 기뻐하지 말고 너희가 받을 영생에 대해서 기뻐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4). 하나님은 창세 이후에 인류의 구원 계획을 조금씩 보여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란 말씀으로 처음으로 예언을 하셨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보여주셨지만 그것은 모형과 그림자였습니다.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 1:10). 제자들의 눈앞에서 그 구원을 성취하실 분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증언하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요 6:68)라고 말했습니다. 영생,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알 수 있는 진리가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1-3).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확실한 계시를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연합된 관계 안에 들어와 영생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영생을 맛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들은 것을 복음서를 통해 기록했고 사도들과 그 영향권 아래 있는 이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서신서와 계시록을 통해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5).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이 땅에서 제자들에게 선포하셨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영생을 가진 백성들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성령이 말씀하신 성경을 통하여 아들과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생 안에 있음을 확증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 분을 더욱 알아가고 친밀한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천국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확증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의 삶이 기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장례식에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인생이 덧없다, 헛되다고 말합니다. 그 인생 가운데 여러분을 기쁘게 하는 일은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기쁨은 제한적인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고 그 관계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가장 큰 기쁨, 영원토록 지속되는 기쁨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이미 영생의 복을 누리고 계신 분들은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상실하지 않는 기쁨을 가진 내가 왜 기뻐하지 못할까? 왜 즐거워하지 못할까 생각해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왜 우리의 기쁨을 빼앗길까 생각해봅니다. 미국에는 할로윈데이가 있는데 아이들이 귀신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며 사탕을 받습니다. 어떤 티비쇼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그 사탕들을 다 먹었다고 말하고 그 반응을 찍어서 방송에 내보냈습니다. 아이들의 반응이 어떠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부모에게 따집니다. 그러다 마지막 부분에서 한 아이가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이는 잠깐 슬픔이 찾아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평온을 되찾고 말합니다. “괜찮아요, 나는 단지 엄마 아빠가 그것을 먹고 행복했으면 만족해요.” 이미 영생을 맛본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것들로 화와 짜증을 내기보다 ‘저에게 허락하신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그것으로 기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 것으로 만족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