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Part.2

본문 : 시편 79편

설교자 : 최종혁

유한한 인간의 입장에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전부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성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에 대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 48:9–11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11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였다. 여기서 뿐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영광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였다.

시 106:7–8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8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동일하게 우리를 포함한 교회를 구원하신 목적도 하나님을 위하여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한다(고전 10:31).

사람 중심, 더 나아가서 나 중심의 사고에 익숙한 우리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짝 사랑에 빠져서 우리의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로 비하하곤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낮춰서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듯한 노래의 가사나 설교들도 결국 그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데 방점이 찍히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큰 희생을 감수하신 것은 맞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애초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포장해서는 안된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삶은 항상 불행과 불만으로 가득하게 된다. 반대로, 이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시고,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한 구원하셨다.

이것은 우리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포한다. 죄와 하나님의 영광은 그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없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 것을 명하셨고 그렇게 살 수 있는 자원도 주셨다.

즉, 죄는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 없이 사는 것이고, 구원 받은 자는 그런 죄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다.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구원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죄는 차이가 있다. 죄의 본질은 동일하지만 그 죄가 가지는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구원 받은 자라도 죄를 범할 수 있지만, 그 죄는 단순히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왜곡해서 드러내는 것이 된다. 사랑하지 않는 죄는 하나님을 사랑 없는 분처럼, 공의롭지 않은 죄는 하나님을 공의롭지 못한 분처럼 드러낸다는 말이다. 거짓의 죄는 하나님을 거짓된 분처럼, 분노의 죄는 하나님을 감정에 따라 멋대로 행하시는 분처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의 의미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두셨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하시면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자기 이름을 그들에게 두셨다. 율법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그런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아이성에서 패배한 후에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하나님께 물었던 것이다. 그들의 패배가 단순히 그들의 패배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해내시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 민족이었다. 그들의 패배는 곧 하나님의 패배로서 가나안 민족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여호수아의 기도는 바로 그 부분에 중점을 둔 기도였고, 오늘 살펴볼 시편 79편 역시 같은 의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심지어 우리의 죄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우심을 구해야한다는 교훈을 오늘 시편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아삽의 시편인 시편 79편은 내용을 보면 같은 저자가 기록했을 74편과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적인 재난의 상황으로 BC586년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폐허가 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74편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자체에 주목했다면 79편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더 주목한다. 아삽은 백성들에게 주목하면서 특히 그들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었는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만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먼저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

1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아삽은 먼저 예루살렘에 일어난 일을 묘사한다. 1절은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땅에 들어온 것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경우는 그냥 들어온 것이 아니라 침략한 것이고 그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 문제다.

땅을 빼앗겼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살아갈 터전을 잃었다는 것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땅은 그들의 육신의 조상이자 영적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 땅에 대한 약속은 너무나 중요해서 야곱은 자신을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했고,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가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 땅은 약속의 땅이었고 하나님의 땅이라 불릴만 했다.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땅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가나안의 백성들을 쫓아내고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악한 바벨론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애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애 4:12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방인들이 약속의 땅의 심장부인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와 그 땅을 차지했다. 여러 나라와 민족을 굴복시키고 있었던 바벨론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을 버린 상황이었고 그래서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지만, 이 시편을 기록한 아삽을 비롯한 신실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남유다의 타락을 보면서도 ‘설마’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설마 하나님께서 이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그냥 두실까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그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목격했다.

이방인들은 단순히 땅만 차지하고 자치권만 가져갔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전을 더럽혔고 성을 무너뜨렸다. 전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전의 보물과 기물들은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이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백성들에게 경고하셨다.

렘 26:18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이런 하나님의 경고에도 사람들은 우상 숭배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은 하나님의 경고대로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된 것이었다. 2-3절은 예루셀렘의 주민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2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3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이 상황은 예레미야 7:33에 예언되었다.

렘 7:33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임을 당한 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여기서 아삽이 더 강조하여 기록한 것은 그 죽임당한 자들은 제대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새와 짐승의 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죽음 자체도 비극이지만 더욱 비극적인 것은 죽은 자들조차도 존중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길에 버려졌고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무시되었고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것은 어쩌다보니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이 바벨론의 침략자들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였고, 그 의도는 이들을 조롱거리로 삼는 것이었다.

4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여전히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참담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이 이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는 이웃 민족들이 두려워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애굽에서 나왔는지, 어떻게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까지 왔는지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그로 인해서 두려워했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비웃으며 조롱한다.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10절을 보면 이방 나라들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다. 아마 앗수르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와 백성들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로 유다의 이웃들은 조롱했을 것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더니, 뭐 별거없네’라는 식으로 이들을 조롱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네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구원해 주실거다”와 같은 류의 조롱을 이들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조롱을 들어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 눈 앞의 현실이 그런 조롱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조롱하는 자들에게 아무리 설명해 봐야 더 큰 조롱과 비웃음으로 돌아올 뿐이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님을 아삽은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에 바벨론과 유다의 전력차가 너무 심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지금의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상황이고 바벨론은 그 심판의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삽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진다.

5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7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삽이 구하는 것은 이제는 우리를 향한 노를 멈추시고 주의 대적들에게 노를 쏟아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불의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심판의 대상이 바뀔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 상황은 하박국에서도 볼 수 있다. 하박국은 유다의 타락한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왜 유다를 심판하지 않으시냐고 물었었다.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타당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러자 하박국은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더 악한 자들을 통해서 심판하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바벨론도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합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은 확실히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그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 더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절대 늦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아삽은 바로 이 시점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디다고 느껴지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제는 자기 백성에 대한 심판을 멈추시고 주를 알지 못하는 민족,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나라들을 심판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황폐하게 하고, 그 주민들을 죽이고 조롱거리로 만든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영광과는 관계없이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것이 이들이 1-4절과 같이 행동했던 이유다. 이들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종들, 하나님의 성도들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연관 관계를 아삽은 1-2절에서 강조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땅은 하나님의 기업이다(1절). 그들이 예배하는 곳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성도들이다(2절). 따라서 유다의 대적들이 유다를 조롱거리로 삼은 일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없다. 이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8-12절이다.

8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이런 상황에 오게 되기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하지 못하게 행했던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이렇게 ‘가련하게 된’ 상황을 보시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가련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아주 낮게 내려왔다는 의미다. 바닥까지 떨어진 우리의 상태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은 모든 면에서 바닥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에서 패배하여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을 잃었다. 풍요로운 삶이 아니라 생존조차 버거운 상황이다.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남아있는 자들도 살육을 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기대할 것이 없었다. 심지어 하나님께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이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이런 바닥을 경험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도 그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많은 좋은 것들, 은혜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되는 상황들을 만날 수 있다. 욥처럼 재물을 잃을 수도 있고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 건강을 잃을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이다. 욥의 경우는 달랐지만, 때로 그런 일들이 분명한 나의 죄의 결과일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큰 잘못을 한 어린아이가 부모를 두려워해서 숨는 것처럼 하나님에게서도 숨으려 할 때가 있다. 더 이상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시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인해 그렇게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 궁극적인 이유는 처음에 읽었던 이사야 48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삽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이 사실을 언급한다.

9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여기 ‘행사’와 ‘증거’는 번역상 자연스러움을 위해 추가된 것인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이 기도는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는 기도다. 즉, 하나님의 죄사함과 구원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을 그 최종 목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구원도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0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11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2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이방 나라들은 유다의 상태를 보고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이것은 조롱이다.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들이 이런 상태가 되었냐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이 말은 사실 “주를 향한 비방”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 이름을 두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지 않는한 이 관계는 영원히 유지된다.

이 관계에 기초해서 아삽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구하는 것이다. 백성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그 능력으로 생명을 보존하여주시기를 구한다.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보면서 “너희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더이상 조롱하지 못하게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고 그 모습을 이방 나라들에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한다. 12절에서 말하는 “칠 배”는 완벽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조롱한 그 죄에 대한 완벽한 심판을 내려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 민족들에게 드러나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아삽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관계와 그 의미를 기록했다.

13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에서도 붙들 수 있는 진리다. 이스라엘은 주의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행하지 못했고 그래서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잃었다. 약속의 땅에서는 쫓겨났고 그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로인해 그들은 이웃에게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이 섬기던 하나님도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목장의 양이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자기 이름을 두셨다. 자기 영광을 두셨고 찬송을 두셨다. 때문에 그들에 대한 조롱과 비방은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비방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원하는 자라면 언제든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사실 불필요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고 절대 실패하지 않으신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정확히 일하신다.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오늘 말씀에서 살펴봤던 두 가지 교훈으로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우리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그저 이스라엘이 모욕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되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이유없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시는 것은 다르다. 개인의 죄는 개인에게만 영향을 주고 끝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름을 두신 하나님의 영광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내 삶을 통해 바르게 드러낸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 관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라들은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 정도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양이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시기를 멈추지 않으시는한 하나님은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심지어 그것이 분명한 죄의 결과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주저하지 말라. 죄 가운데 머물려는 마음을 버리고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대대로 주를 찬송하겠다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더딘 것 같아도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정하신 때에 일하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이름에 합당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