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새해가 되면 새로운 마음으로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올해 통계를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다른 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이어트, 금연, 금주와 같은 것이 최상위권에 있을 것이고 외국어 배우기나, 해외여행, 돈 모으기와 같은 것들이 많은 사람의 계획 혹은 결심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왜 그런 목표를 세웠는지 물어보면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 자기계발을 위해서, 휴식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등이 그런 이유들일 것이다. 그런데 새해 목표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아마 그런 이유들이 확실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일상 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있지 않으면, 혹 지장이 있더라도 그게 크지 않으면, 필요성은 어느 정도 느끼지만 절박성이 없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매우 크다. 집에 빨래걸이로 사용되는 러닝머신이나 실내자전거(?)가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헬스장도 회원 수 대비 실이용자가 적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만약 1년에 5kg을 감량하지 않으면 kg 당 1000만원을 내야한다면 실패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어떤 목표를 세우든, 그 이유가 확실해야하고 내가 그 이유를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로 통계를 한정하면 아마도 많은 것들 중에 두 가지가 거의 최상위권에 있을 것 같다. 바로 성경읽기와 기도하기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경일독, 매일 QT, 하루 몇 분 기도, (새벽기도를 하는 교회 같은 경우) 새벽기도 빠지지 않기 같은 것을 새해 목표로 세우는 성도들이 많다.

그 이유는 뭘까? 교회 다니면 다 그렇게 하는거 아니야라고 쉽게 대답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아마 대부분은 주님을 더 알기 위해서, 가까이 하기 위해서, 영적으로 더 성장하기 위해서와 같은 이유들을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고 필수적이다. 기본적으로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말한다.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사소통이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개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항상 강조되는 것이 기도와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 해야죠”라고 말하고 “국제화 시대에 영어는 해야죠”라고 말하는 것처럼 “주님 알기 위해서 성경은 읽고 기도는 해야죠”라고 말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진짜 그것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면서 그냥 보편적인 답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상태가 더 안좋아지기도 한다. 다이어트가 필요하지만 결국 하지 못한 사람은 다음에는 꼭 성공해야지라고 다시 결심하지만 결국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 그러다 이런 합리화를 한다. ‘어차피 사는데 지장없고 다이어트 한다면서 스트레스 받느니 그냥 먹고 싶은거 먹으면서 사는게 훨씬 행복한 삶이야.’ 자신의 실패를 실패가 아니라 선택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살면서 영어할 일도 없는데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시도도차 하지 않게 된다.

사실 다이어트든 영어든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정말 문제는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대해서 그런 태도를 가질 때다.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 다 좋지만, 그렇다고 신앙 좋은 것은 아니더라. 성경 많이 읽어 봐야 어차피 아는 얘기들이고, 정말 중요한건 실천인데 책상 앞에서 성경만 읽고 있으면 그게 되겠어? 나도 다 해봤는데, 달라지는 것 없더라. 기도도 마찬가지지. 기도만 하고 있으면 뭐가 되나.”

이런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단순히 성경을 읽는 행위, 기도를 하는 행위를 한다고 해서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무슨 경건해지는 수련법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과 기도에 대한 이런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왜 읽는지, 왜 기도를 하는지에 대한 무지의 문제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시간에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와 기도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나 혹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말씀들을 통해서 구체적인고 긍정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기를 원한다. 당연히 모든 이유를 다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이유 없이 그냥 행하거나 반대로 이유 없이 그냥 행하지 않거나 했다면, 이 시간들을 통해서 최소한 우리가 말씀을 읽는 이유와 기도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정말로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분명한 이유를 알고 성경읽기와 기도하기에 더욱 힘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닮고 동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시편 119편은 누가 기록했는지를 알 수 없다. 표제도 없고 내용을 통해서도 특정할 수 없다. 시편 19편과 유사한 면이 있고 여러 표현들이 다윗의 시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면이 있어서 다윗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다니엘이나 에스라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저자가 누구든 분명한 것이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시편에서 최소한 8개의 다른 단어로 지칭된다. 율법, 증거, 법도, 율례, 계명, 판단, 말씀, 약속(말씀)이 그것이다. 이 단어들은 각각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모두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공통적인 의미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무엇이라고 표현되었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고 멀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보물처럼 간직)
119:15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계속해서 되뇌이며 생각하는 것)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깊이 생각)
119:31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꼭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119: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표현들만 봐도 이 시편의 저자가 얼마나 말씀을 계속해서 가까이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저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씀 앞으로 나아갔다.

119:55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119: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119:147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119:148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119:164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23절을 보면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고 있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고 말한다. 83절에서는 자신이 “연기 속의 가죽 부대”처럼 쪼그라들고 까맣게 탔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간에 관계 없이, 상황에 관계 없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가까이에 있었다. 말씀을 읽었고 되뇌이며 묵상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119:98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어떻게 주의 계명들이 항상 그와 함께 했겠는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사람이었다.

그럼, 그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까?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 비할 수 없는 유익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주는 비할 수 없는 유익이다. 성경을 읽는 것은 시간을 사용하고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일이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런 것들에 비해 성경이 주는 유익이 없다면 성경을 읽을 이유가 없다.

시편 119편은 사실 이 유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한다.

119:1–2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편의 말씀처럼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 참된 행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행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세상의 기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게 행복이고,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행복의 장애물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결국 우리가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증거다. 서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하니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아군이 생기고 적군이 생긴다. 싸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원하는 것을 다 얻지 못한다. 설령 얻는다고 해도 만족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행복이 없다.

행복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따라갈 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말씀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인도한다.

자, 그럼 말씀은 어떻게 그리고 어떤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할까? 시편 119편에는 성경이 주는 유익이 정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70개 이상을 찾아서 적어두기도 했는데, 찾아보면 더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될 때 형광펜이나 색연필같은 것을 들고 한 번 찾아보기 바란다. 오늘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와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또 살게 한다는 것이다.

119:93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여기 “때문에”가 조금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표현인데, “때문에”보다는 “로”나 “통해서”로 이해하면 된다. 주께서 이것들(주의 법도들)(통해서) 나를 살게 하신다고 시편 기자는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주의 법도들을 절대 잊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살게 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죽은 영혼을 살게 하시고 또한 넘어진 영혼을 일어나게 하신다. 잠자는 영혼을 깨우시고 메마른 영혼에게 단비를 내리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도 고백한다.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여기서 살게 한다는 말은 참된 삶을 누리게 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면서 고난을 피할 수 없고 심지어 하나님은 그런 고난을 사용하신다.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 말씀을 보면 시편 기자는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잘못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주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그를 바로 잡으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계속해서 고난 중에 고통 받으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고난이 우리의 궁극적인 행복에 포함되는 것이라면 천국에서도 고난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은 뜻을 가지고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지만 거기서 또한 벗어나게 하시고 삶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신다. 그 모든 것을 말씀을 통해 하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한다.

119:107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고난 중에서 살아나기 위해 말씀이 필요하다. 매일의 삶을 살기 위해서도 말씀이 필요하다.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한다. 애초에 말씀이 없이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날 수 없었다. 구원 받을 때 받은 말씀이 있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을 수 있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으로 생명을 얻은 우리가 지금은 말씀이 없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한다. 구원받은 자가 말씀을 읽는 것은 산 사람처럼 살 것이냐 죽은 사람처럼 살 것이냐의 문제라는 말이다. 그러니 말씀을 읽어야 한다.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하는 방법으로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119:24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119:98–100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99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100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119:104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지금의 나는 그동안 내가 해 온 선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을 할 때 대충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중요하지 않은 선택은 대충한다. 짜장면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를 두고 고민하면 주변 사람만 피곤해진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 둘 다 먹지 않는 선택을 신중하게 할 수도 있다. 크든 작든 우리는 계속해서 선택을 해야 하고 그때마다 지혜와 통찰력, 분별력 등이 필요하다. 그런 우리에게 최고의 상담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내가 어디 가서 살아야 할지, 어느 교회를 나가야 할지, 어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해야할지, 누구를 만나 결혼을 해야할지와 같은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을 찾으려고 성경을 열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결정을 하기 전에 말씀을 가까이 해서 지혜와 통찰력과 분별력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선택을 하면 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신을 훈련하는 운동 선수와 같다. 운동 선수는 지겨워도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같은 동작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하나하나를 코치가 가르치지 못한다. 기본기를 잘 잡아주면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인도하심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말씀에 능숙해져야 실제 삶에서 바르게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는 것이다. 지혜와 통찰력, 분별력은 하루 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대충 이렇게 살라는 거잖아’라고 생각하면, 결국 운동을 대충 배운 사람처럼 살 수 밖에 없다. 제대로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배워야 한다. 그럴 때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고 내 길에 빛이 된다. 그냥 성경책만 들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비슷하게, 말씀은 우리를 죄악된 삶에서 보호한다.

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죄악된 삶은 어떤 면에서 좋아보일 수 있다. 처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이 세상으로 떠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세상의 친구들이 즐기는 문화가 좋아 보이는 것이다. 그동안은 어차피 성인이 아니어서 큰 차이가 없었는데, 이제는 차이가 크게 보이고 나보다는 그들의 삶이 더 즐겁고 재밌어 보이는 것이다. 죄악된 인간의 눈에 죄악된 삶이 좋아보일 수 밖에 없다.

사회 초년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나 죄악된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아간다. 구원 받은 사람들도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다. 죄악된 생각이 있고 죄악된 갈망이 있다. 죄악된 삶의 습관과 태도가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탄은 어떻게든 우리를 죄에 넘어지게 하려고 하고 죄의 종으로 살아가게 만드려고 한다. 우리 눈을 어둡게 만드려 한다.

그럴 때 우리 눈를 뜨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나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죄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죄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다. 따라서 지금 괜찮다고 가만히 있으면 어느새 우리는 다시 죄에 물들어 있게 된다. 존 번연은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이 당신을 죄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이 책에서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 마음에 두어야 한다. 잘 때 성경책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자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펴서 읽어야 한다. 읽고 묵상하여 내 마음에 항상 있게 해야 한다.

이 외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96절) 소망을 준다(49절). 위안을 준다(76절). 시편 기자는 성경에 이런 유익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었다. 성경을 읽는 것이 그에게 좋은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반대로,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이 모든 유익을 거절하겠다는 의미와도 같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주시는 유익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유익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들이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의 유익을 꼭 다시 한번 묵상해 보고, 성경을 펴서 그 유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시편 119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가 성경을 읽는 첫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어서였다. 다음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어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싶기 때문에 읽는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다 – 자연스런 동기

시편 119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읽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사실은 여기에 있다. 119편을 읽으면 저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지, 그렇기 때문에 더 알기 원하는지, 배우기 원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119: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119:16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119:20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119:24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119:35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119:40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47–48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48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119: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119:77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19: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19:111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9:113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9: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119: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19: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19: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19: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19:162–163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63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119:167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119:174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왜 시편 119편의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밤낮 없이 항상 읽고 묵상했는지 너무 명확하다. 그는 우리가 돈을 좋아하듯이 성경을 좋아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즐거워하듯 성경을 즐거워했다. 우리가 유튜브나 넷플릭스 보는 것을 기뻐하듯이 그는 성경을 기뻐했다. 성경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더 알고 싶었다. 더 깨닫고 싶었다. 잠시라도 말씀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119:12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119:43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그럼,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성경을 읽고 싶어할 수 있을까?”

첫째로, 이것은 자연스러운 반응, 동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따라서 나에게 이런 자연스러운 반응이 없고 이런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봐야 한다. 말씀을 전혀 읽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하나님과 전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약 구원 받은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성경을 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면, 구원 자체를 점검해볼 필요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내가 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는지를 점검해 보라. 바빠서 우선 순위를 계속해서 놓치고 있을 수 있다.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것을 해결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둘째로, 이것은 경험에 의한 반응이기도 하다. 전혀 먹어보지 못한 음식은 아무리 설명을 잘해줘도 먹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크게 생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는 맛’은 그렇지 않다. 누구는 어차피 아는 맛이라고 말하지만, 그 아는 맛이 내가 정말 원하는 맛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다.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말하는 것은 말씀을 읽어 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어떤 재물보다 좋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읽어보면 그 맛을 알 수 있다.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그런 유익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 더 말씀을 즐거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라면 이 시편 기자처럼 말씀을 기뻐하고 싶을 것이다. 더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이 넘쳐 나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말씀을 읽으면 된다. 읽고 싶어지지 않게 만드는 요소들을 좀 줄이는 노력도 필요하다. 좀 더 쉽게 번역된 성경을 읽는 것도 방법이다. 작년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말씀을 읽지만 말고 들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하루 1시간이 힘들면 하루 10분, 5분이라도 읽어 보라. 일년 몇 독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꼭 1월 1일에 시작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언제라도 기쁘게 읽으면 한 절이라도 내 마음에 그것이 보물처럼 남을 것이고 내 삶을 바꿀 것이다. 더 하나님을 알게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고 또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 마땅한 의무

시편 119편을 읽어 보면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저자의 기쁨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저자의 의무감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종종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면서 종으로서 주인의 말을 듣고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 시킨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원해서 읽기도 하지만 원하지 않아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이 사실을 말해준다. 성경은 ‘율법’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순종을 요구한다. 성경은 ‘증거’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증언이며 또한 하나님의 높은 기준과 그에 따른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다.

성경은 ‘법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잘못된 우리나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다. 특히 하나님은 작은 것들까지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율례’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성경은 ‘계명’이다. 분명한 하나님의 권위로 씌여진 말씀이란 의미다.

성경은 ‘판단’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말씀’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성경은 ‘약속’의 말씀이다.

성경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 권위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다면, 성경을 읽는 것은 단순히 우리 선택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일차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읽으라고 성경을 주셨다. 책장에 꽂아두는 것, 교회 가방에 넣어두는 것, 책상에서 잘 때 배게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이 주어진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래서 우리에게 읽으라고 이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한다면, 이것이 어떤 우선 순위를 가져야하는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쁘다는 것, 시간이 없다는 것, 성경이 어렵다는 것, 대충 다 안다는 것 등 무엇이든 성경을 읽지 않을 이유는 될 수 없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읽으라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읽으라고 하니까, 읽어야 하니까 읽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렇게 해야해서 하는 일은 잘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학교 졸업하면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은데, 학교 다닐 때는 하기 싫은 이유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성경도 읽어야 한다고 하니 더 읽기 싫은 것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해야해서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도 경제 활동을 해야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씻기 싫어도 씻는 이유도 해야하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그 ‘중요성’ 때문에 해야하는 일들이 많고, 성경읽기는 사실 그 중에서도 최우선 순위에 있어야하는 일이다. 믿는 자라면 성경을 읽지 않아도 되는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도전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 유익하니까 읽는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싶으니까 읽는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니까 읽는다.

성경을 읽고 있는가? 혹 그렇지 않다면 오늘이라도 성경책을 꺼내기 바란다. 그리고 읽기 바란다. 오늘 말한 성경을 읽는 이유를 생각하며 읽어 보라. 그런 것들을 기대하며 읽어 보라. 당장에 엄청난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 아마 그럴 확률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시편 119편의 저자처럼 계속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고 멀어지지 않는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기도하며 기대하며 성경을 읽기 바란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이유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