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요나, 은혜를 배우다

본문 : 요나 4장

설교자 : 이병권

욘 4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오늘까지 우리는 4번에 걸쳐서 요나서를 살펴봤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요나서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4장은 요나에게 은혜를 가르쳐주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 특별히 더 돋보이는 장입니다. 요나는 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운 것 같습니다. 요나가 어떤 방식으로 은혜를 배우는지 “요나, 은혜를 배우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3장에서 요나의 선포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을 본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고, 그는 평생에 가장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요나는 지금 그 현장에 있습니다. 정말 어메이징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기 오산에 나가셔서 복음을 전하는데 듣는 사람마다 꼬꾸라지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회개한다면, 그래서 오산시 전체가 다 하나님 말씀으로 뒤집어 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지금 요나는 그러한 일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가 감격합니다. 기뻐 날뛰면서 춤을 춥니다.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요나서 4장의 시작입니다. 맞습니까?

네! 이래야 하는데 그게 마땅한 일인데, 그런데 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싫어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고, 화가 나는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못마땅한 겁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라는 그 감격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화를 냅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 수가 있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런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용서해주신단 말인가?” 요나는 그들이 심판받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화가 난 겁니다. “그들을 용서하시다니!” 이게 요나를 분노하게 한 겁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제사를 드린다며 난리를 쳤는데, 다른 사람이 그 은혜를 받으니까 그건 아닌 것 같다며 정의롭지 않다며 하나님 앞에서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도 그럽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그냥 좀 넘어갔으면 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냥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랬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내게 상처 준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처벌당하기를 바라고 어떻게든 그 잘못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면 화가 나는 겁니다. 요나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인가요? 요나인가요? 문제는 “요나”에요. 문제는요 “나”에요. 내가 문제입니다. 요나는 어쩜 이렇게 우리와 닮았을까요? 화가 난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쏟아 붓습니다. 2절에서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이 기도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합니다. 먼저 자기가 했던 잘못을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이 이럴 줄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는 이 같은 대형 사고가 일어날 줄을 예상하고, 자신은 이것을 막기 위해 도망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시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요나는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잘못이라도 되듯이 하나님을 몰아붙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요나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거는 좋게 말해 기도지, 보면 기도가 아니라 협박입니다. 요나가 얼굴이 빨개져서 씩씩거리며 하나님께 악을 쓰는 겁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들이밀면서 덤비는 겁니다. “하나님 그냥 나를 죽이세요!”

이거는 진짜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까부는 겁니다. 이런 요나를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래? 그렇게 네가 죽기를 원한다면 뜻대로 해주마!” 라고 말씀하시면서 커다란 폭풍을 보내셔서 요나를 다시 바다로 던져버리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철없는 아이를 설득하는 부모처럼, 슬픔과 실망과 분노의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반항하는 십대 아이를 설득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요나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러면서 질문하십니다. “요나야 한번 생각해보아라. 네가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거냐? 이 일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런데 이 질문에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는 대답도 안하고 성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완전히 막가자는 겁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훈계를 하는데 화가 난다고 확 나가면서 방문을 쾅 닫는 것과 같은 겁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는 니느웨 성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40일 후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 위해 앉아있습니다. “하나님! 저 니느웨 백성들을 벌하시든지, 나를 죽이시든지 알아서 하세요.”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빨리 자라는 박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나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표정이 풀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돕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갑자기 행복해졌습니다. 6절에 보면.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요나서에서 요나가 기뻐했다는 표현이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를 봤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나무 그늘 하나에 엄청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요나입니다. 문제는요 “나”입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았을 때도,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할 때도, 누군가 구원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트에서 1+1 상품을 제대로 하나 건지면 엄청 기뻐하는 겁니다. 제가 최근에 크게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다시마가 들어있는 라면 아시죠? 포장을 뜯었는데 다시마가 3개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 일은 잘 없잖아요. 2개도 아니고 3개라니! 저는 사진을 찍으며 아내에게 자랑을 합니다. 이거보라고 3개나 들어있다고 그러면서 엄청 기뻐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책임이 주어져도 기뻐하지 않는 제가 손가락만한 다시마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저도 요나와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화를 내던 요나가 박넝쿨이 주는 그늘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게 다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음 날 새벽에 벌레를 예비하십니다. 그래서 요나의 초막을 덮은 박넝쿨에 보내시고, 그것을 갉아먹게 하십니다. 박넝쿨은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그늘은 사라졌고 요나의 미소도 사라집니다. 이제 불타는 햇빛이 요나의 머리에 바로 꽂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온갖 거를 다 준비하십니다. 큰 바람을 보내서 바다에 빠뜨렸다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건지시고, 박넝쿨을 준비하셨다가 이제는 벌레와 뜨거운 동풍까지 준비하셨던 겁니다. 철없는 요나를 돌이키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겁니다.

뜨거운 동풍을 맞으며 뙤약볕 아래에 있는 요나는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요즘말로 멘붕 상태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또 화를 냅니다. 8절에 요나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물고기 뱃속에서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감사하다가, 니느웨가 회개하니까 화를 내며 덤비다가, 박넝쿨 때문에 좋다고 기뻐하다가, 이제 그게 없어졌다고 또 화를 내면서 죽겠다고 소리 치고 있는 겁니다.

죽는다는 게 무슨 비장의 무기에요. 뭐가 그렇게 대단한 목숨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걸핏하면 죽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요나가 원하는 대로 동풍의 온도를 300도로 올려가지고 요나를 바비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 아내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렇게 요리했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여러분, 이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인내심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4절에서 하셨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다시 하십니다. “요나야, 이 일이 지금 네가 화를 낼 일이냐? 나의 말을 전하는 선지자인 네가 큰 성읍 니느웨의 회개를 직접 보면서도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화를 내며 죽기를 구하는 것이 어떠냐? 그런 일이 너에게 가당한 것이냐? 네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느냐?”

그런데 요나의 대답은 정말 가관입니다. 9절을 다시 보면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가 대답합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정말 독이 제대로 올랐습니다. 못 말리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에게 마침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씀을 하십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게 요나서의 끝입니다. 혹시 찝찝하게 끝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분명하게 해주면 좋겠는데 뭔가 쓰다가 그만둔 거처럼 요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셨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요나야 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요나는 집착할 가치도 없고 권리도 없는 것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같은, 그것도 자신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박넝쿨을 아끼며 그것 때문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아끼는 것은 어떻습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것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요나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니느웨까지, 자기가 원수로 생각하는 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아끼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박넝쿨을 통해서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시는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화를 냈던 요나가 어떻게 했을까요? 궁금하지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라는 질문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요나서의 요나가요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나도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삶으로 실천하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신지 알았습니다. 그가 2절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알고 있는 것이 자신의 삶과는 잘 안 맞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데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넓고, 그렇게 파격적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는 영적 축제의 현장에서 오히려 화를 냈던 겁니다.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되는데 저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은 안 돼,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화가 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요나처럼,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화를 냅니다. 기뻐하지 못합니다. 나는 괜찮지만, 나는 받아도 되지만, 저런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파격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좀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바람을 일으키시고, 배, 물고기, 박넝쿨, 벌레 온갖 것을 다 동원하셨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빠뜨렸다가 건져내셨다가 다시 니느웨에 보내셨다가 훈계하셨다가 온갖 일을 다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것인지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니느웨 같은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니느웨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마음에 니느웨와 같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아무리 내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내 도덕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생활 방식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고, 두 번째 기회를 주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르쳐주길 원하셨던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 파격적인, 크고도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은혜로운 자가 되어 은혜를 베풀며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언제, 어디에서 맹수가 뛰어 나올지 모르는 밀림 속 같습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경쟁하고 밟고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조금이라도 흠 잡을 것이 있으면 찍어 내리고 비난합니다. 나에게 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냥 막 인상을 쓰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그렇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는 좀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가운데는 뭔가 관대함이 있고 너그러움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한 대로 갚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품어 주고 안아 주고 함께 고통을 나누며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힘이고 우리의 경쟁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삶에 함께하셔서 앞서 준비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가 아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누군가의 삶을 도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