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굳건한 신앙의 원리
본문 : 빌립보서 4:1-9
설교자 : 최 종 혁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1절).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지만 현재 하늘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하늘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3:20). 그날에 우리의 죄악된 몸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 하늘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시민으로서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1절)고 말합니다. 왜 우리가 주 안에서 굳게 서야 할까요? 우리를 굳게 서지 못하게 흔드는 공격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보면 그들도 어려움에 처해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지 못했고 빌립보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사도 바울이 ‘개’라고 표현했던 행악하는 자들이 있어서 성도들에게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하늘의 시민이라고 말하면서 땅의 것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사람들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움들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 안에 굳게 서야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가면 없어질 어려움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살기에 오직 이 땅에서만 겪는 어려움입니다. 신앙을 흔드는 공격이 들어올 때 주 안에 굳게 서기 위해 다섯 개의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는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주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남겨두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이 땅에서만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의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사탄은 그 일을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합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교회 안의 성도들을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한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도 그러한 공격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복음의 동역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에 열심을 내던 성도들인데 한 마음을 품지 못했습니다.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 이것은 이 자매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자매 사이의 문제가 이미 교회에서 드러났고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뤄야 하며 또한 개인적인 책임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힘쓰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 곧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권리로 여기지 않으신 것, 그것이 겸손한 마음의 핵심입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자신의 권리만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개인도 그러하고 교회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3절). 이 문제가 교회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두 자매 사이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잘 해결하였다면 이런 권고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기에 교회에서 이를 다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각 개인이 다른 사람과 하나 되어야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하나 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인 3각 달리기는 두 사람이 다리를 묶어서 함께 뛰어가는 경기입니다. 그때 나의 경쟁자는 나와 다리를 묶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만약 그 상황에서 옆에 있는 사람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뛰어간다면 어떨까요. 나도 달리지 못하고 팀도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입니다. 복음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렇듯 하나가 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여전히 싸움과 다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벗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약4:1-5). 우리의 원수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를 싸우게 하고 한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성도들이 하나 되도록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교회가 공격에 흔들리지 않고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세상에 화내고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늘 기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뻐하라”는 이 명령에서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라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황이 변하기 때문이고,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며, 나의 기쁨이 그 상황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기쁨의 이유를 항상 “주 안에” 두라고 말합니다. 자녀가 변하고 통장에 잔고가 변하며 우리의 외모가 변합니다. 직장이 안정되면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만 그것도 역시 계속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의 기쁨의 이유가 거기에 있다면 우리의 기쁨도 변할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께 우리의 기쁨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기쁨이 있을까요? 세상은 계속해서 주님 안에는 기쁨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안에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인류가 처음 타락할 때부터 이것은 사탄이 계속해서 우리를 속이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기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인간의 기쁨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사탄이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라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너희가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을 염려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서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과 정 반대가 되었습니다. 사탄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속이는 것은 동일합니다. ‘참된 만족은 하나님이 아니라 네 안에 있다’, ‘네가 좋은 것을 따라가라’.

인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참 만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참된 만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잠시의 만족, 약간의 재미, 어느 정도의 기쁨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찾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뻐했던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감옥에서 오해를 받고 있었을 때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겸손하게 하나 될 때,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에 대해, 또한 빌립보 성도들 자체가 사도 바울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다가올 영광스러운 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 성도와 함께 교제하는 것을 통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입니다. 주님 ‘밖에’ 있다면 어떨까요? 거기서도 작은 기쁨들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쁨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진정한 기쁨을 놓치며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속일 때 속지 마십시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같지 않습니다. 결코 대체할 수 없습니다. 나의 기쁨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어떤 상황 속에서 명령하는 것이 4절이었다면, 이 말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너그러움’, ‘아량’, ‘포용’과 비슷한 말입니다. 이 단어는 뭔가 ‘어려운 상황’과 ‘자기 부인’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관용은, 겸손의 모습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기적이어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살아갑니다. 더구나 부당한 상황, 억울하고 손해 보는 상황에 처했을 때는 더욱 나 자신에게 생각을 집중하기 쉽습니다. 나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용이라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 나를 위해서(나의 권리, 나의 욕심을 위해서)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욕심, 나의 권리와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운 것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뒤엎으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이것이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관용을 베풀었을 때 나를 이용할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나약한 모습이고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은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삶이 모든 것을 가진 삶입니다(고후 6:3-10).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염려하려고 생각하면 염려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염려는 걱정, 근심,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스트레스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걱정하고 두려워해서 그 상황이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주께서 가까이 계시기에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염려한다면 주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점심에 뭐 먹지, 내일은 뭐 먹지를 걱정한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아버지가 만수르이고 빌 게이츠라면 말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알면서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아빠에게 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아뢰고 드러내라’, ‘하나님이 알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명령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염려할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기도할 것은 모든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을 염려할 수도 있고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 우리의 생각, 뜻, 감정, 의지, 모든 것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지키신다고 말합니다. 우리에 대한 사단의 공격은 계속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공격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염려하고 그 염려로 삶이 지배당하는 것은 마음의 중심에 나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동일한 상황 속에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8-9절). 여기에 예방책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예방책입니다. 사도 바울을 ‘이것들을 생각하고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할 만하고 칭찬할 만한 것, 덕이 있고 기림이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9절에서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라고 말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 배우고 받은 것, 듣고 그를 통해 본 것이 그들이 생각하고 행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또한 서신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고, 사도 바울 자신이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간증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말과 글, 삶으로 전해준 그 모든 것에 자신의 생각을 매워두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과 오늘날 우리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이 땅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완성되지 않은 성경이었지만 우리는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행해야 하는지 이 성경이 말해줍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각을 붙들어두고 성령님의 인도로 그것을 행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절).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때로는 징계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죄인을 심판하는 심판자로서 계십니다. 지옥에 계신 하나님은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진정한 평안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우리는 내가 편안하고 안정되어야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말씀에 우리의 생각을 매워두고 그것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안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환경이 평안해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건한 신앙의 원리입니다. 굳건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무엇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말씀은 계속해서 “주 안에 서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키리시라” 또한 주의 말씀에 우리의 생각을 묶어 둘 것을 말합니다. 나의 눈이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차고 나의 마음이 주님이 원하는 것을 원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다양한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이것이 기쁨의 삶, 평안한 삶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빌립보서 말씀을 배워온 이유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태는 그리스도 밖으로 나갈 때가 있습니다. 충만하게 거할 기쁨이 우리 안에 거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생각의 최우선 자리에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가득 채울 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