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배자의 사랑 노래

본문: 시편 84편

설교자: 최종혁

 

무언가를 좋아하면 티가 날 수 밖에 없다. 축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일 년 동안 축구 한 번 하지 않고 중계도 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축구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독서가 취미라는 사람 집에 제대로 된 책장 하나 없고 최근에 읽은 책이 20년 전에 읽은 교과서라면 그 사람이 스스로 뭐라고 말하든 그의 취미는 독서가 아니다. “취미는 독서가 맞는데 돈이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는 책 읽기 싫은 사람의 핑계일 뿐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위해 무엇이 되었든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시간을 사용하고 돈을 사용한다. 에너지를 사용한다. 거기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티가 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정상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티가 난다. 그 사람을 자주 생각한다. 일부러 생각하기도 하고 생각하지 말아야지 해도 자꾸 생각이 난다. 심하면 그래서 어떤 일에 집중하기 어렵기도 하다. 함께 있고 싶다. 그 사람 집 근처만 가도 좋다. 그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도 좋다.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다. 좋은 일이 있든 슬픈 일이 있든 그것을 나누고 싶다. 뭔가 좋은 것을 주고 싶다. 그렇게 나에게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오히려 더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상한가? 아니다. 그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물론 전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행동하면 집착이고 스토킹 범죄가 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면 이런 마음이 있고 그것이 겉으로 티가 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 때 그 진정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전에 주일오후성경공부를 할 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던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며 따르는 자들이며 사랑하는 자들이며 섬기는 자들이며 본 받는 자들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기 사용된 동사들은 목적어만 바뀌면 다른 종교들에서도 다 사용할 수 있는 동사들이다. 세상이 우리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무엇을 혹은 누구를 믿는지, 따르는지, 섬기는지, 본받는지만 다를 뿐 종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방금 의도적으로 하나의 동사를 뺐다. 바로 ‘사랑하는’이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목적어를 바꿔도 다른 종교에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신을 믿으라고 하고 섬기라고 한다. 따르고 본받으라고 한다. 하지만 사랑하라고는 하지 않는다. 종교는 어떤 면에서 보면 신과의 계약 관계를 말할 뿐 그런 인격적인 관계를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시는 분이시고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할 때 왜곡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한편 옳은 면이 있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르고 본받는 것도 다른 종교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는 다르다. 다만 겉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티가 나기 때문이다.

시편 84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노래로 그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시를 읽어보면 저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티가 난다. 마치 연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혹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즐거움으로 흥얼거리며 노래하듯 이 시편은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저자는 ‘고라 자손’이다. 고라는 모세에게 반역하여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세 아들은 살아남아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했다. 찬송하는 일도 했지만(대하 20:19), 빵 굽는 일과(대상 9:31) 문지기로서의 일도 했다(대상 9:17-19; 26:1). 따라서 이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 예배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하고 또한 하나님께 함께 하기를 원한다. 아마 후대에는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성전을 찾아 오는 사람이나 같은 마음으로 이 사랑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예배자의 사랑 노래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노래다. 오늘은 이 시편을 통해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함께 점검해 보고 또 도전을 받기 원한다.

이 시편은 ‘셀라’(4, 8절)를 기준으로 3단락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리고 각 단락에는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지가 선포된다. 또 하나 주목해 볼 만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다양하고 반복되는 표현들이다. 저자는 하나님을 그냥 당신(“주”)라고만 하지 않고 다양한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모함(1-4절)

시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저자는 감탄으로 시작한다. 사랑스럽다는 것은 장막 자체가 로멘틱한 장소라거나 미학적으로 뛰어남을 의미하기 보다는 장막이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 장막은 “주의 장막”이다. “여호와의 궁정(뜰)”이기도 하다. 비록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은 아닐지라도 “만군의 여호와”, 즉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지니신 왕이 거하시는 장소(집, 4절)이기 때문에 그곳은 왕궁이며 많은 사랑을 받는다.

시편의 저자도 그렇게 주의 장막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다. 사실 그의 사랑은 상사병에 가까울 정도다. 그는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해질 정도였다. 사모한다는 것은 간절히 원한다는 의미로 부정적으로는 욕심과 탐욕이 포함되기도 한다. 시편 17:12에서는 사자가 그 움킨 것을 찢고 싶어한다고 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그만큼 강하게 원하는 것이다. 쇠약함은 ‘끝나다. 소진되다’는 의미다. 이사야 15:6에서 풀이 마르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여호와의 궁정을 사랑해서 거기 거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고 그 감정에 잠식당할 정도였다는 말이다.

또한 저자는 ‘나’라는 일반적인 표현 대신 “내 영혼”, “내 마음과 육체”라고 표현했다. “내 영혼”은 그의 진심을 드러내는 표현이고, “내 마음과 육체”는 그의 전부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내가 진심으로, 나의 전부가, 거짓된 것 하나 없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그 장막이 뭐길래 그러는 것일까? 장막 자체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곳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지만 그곳에 특별한 임재를 두시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타지에 가면 집이나 내 방을 그리워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단순히 건물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사람들) 때문에 그리워한다.

특히나 구약 시대에 성막이 가지고 있던 상징적인 의미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하나님으로 생각할만큼 타락했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나 그것이 놓여있던 성막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종교인들은 멀리 계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버리고 보이는 것을 섬겼던 것이 문제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서의 성막을 자연스럽게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사랑을 시편 기자는 또 이렇게 표현한다.

시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여기서도 참된 예배자의 올바른 자세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지만 동시에 나의 왕이고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시다. 즉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서 높이지만 동시에 나와 가까우신 분으로서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다. 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분으로 느끼고 있다. 하나님과 더 친밀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참새가 부럽고 제비가 부럽다.

어떤 학자들은 “제단”에 참새와 제비가 둥지를 틀었으니 제단이 사용되고 있지 않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여기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제단의 사용 여부가 아니라 ‘누가 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느냐’다. 참새와 제비가 더 가까이에 있다. 물리적으로 더 가까이에 있기도 하고 시간적으로도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살림을 차렸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거하고 있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이 부러웠던 것이다.

짝사랑을 해본 사람은 무슨 감정인지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누가 같이 있으면 그 사람이 부러운 것처럼, 여기 시편 기자는 다른 사람들(제사장들)은 고사하고 하찮은 새들도 부러울 지경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가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정말로 복된 사람은 이렇다.

시 84: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성소에 예배하러 오는 자들은 어찌 보면 하나님의 집에 손님으로 오는 자들이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잠시 예배하기 위해 오는 사람보다 항상 그곳에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참된 복이라고 말한다. 할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사모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원하고 더 오래 머물고 싶어한다. 다른게 아니라 그것을 진정한 복으로 기쁨으로 여긴다.

다음 절로 넘어가기 전에 “셀라”가 있으니 잠시라도 각자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나는 하나님을 사모해서 다 가까이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은지, 그것을 진정한 복으로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을 내가 즐거워하는지, 아니면 부담스러워하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구약 시대에 누군가 하나님은 너무 사랑하는데 성전에 나아가서 예배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그래서 4년에 한 번 정도만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했다면,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첫사랑을 버렸거나 애초에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돌아보라.

하나님께 나아감(5-8절)
이어서 시편기자는 또 다른 복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시 84: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4절에서는 정말 이상적으로 가장 복 있는 자에 대해서 말했다면, 여기서는 현실적으로 복 있는 자를 말한다.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다. 여기서는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라고 표현되었다. 본래는 ‘시온’이라는 표현이 없지만 결국 7절에서 이 사람은 힘을 얻어 나아가서 시온의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있는 길은 시온을 향해 있는 길이 된다. 그래서 번역자들이 시온을 추가한 것이다.

항상 하나님께서 계신 장막에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은 항상은 아니더라도 그나마 자주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멀리 사는 사람에게는 아주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살 곳도 정해주셨다. 하나님께서 거주하게 하신 곳에 사는게 필연적으로 불행하게 될 수 밖에 없다면 뭔가 이상하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시편 기자의 말이다. 예루살렘에서 먼 곳에 살아도 하나님께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고 또한 때를 따라 실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으면 된다.

골딩게이, 592-3, “절기에 예루살렘에 갈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 뿐 아니라 그곳에 계시는 여호와께서 먼 곳에 살고 있는 백성에게도 힘과 보호가 되어 주시는 진짜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게 된다.”

항상 예루살렘에 있을 수는 없어도 그 마음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로를 둘 수는 있다. 그렇게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삶 또한 복된 삶이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어지는 6-8절의 말씀은 중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시온을 향해 가는 순례길에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힘을 주신다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위에서 말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며 힘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편 84편의 전체 맥락을 고려해보면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서 가는 순례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시편 84편은 삶에서 개인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보다는 실제로 예배의 장소로 나아가는 것을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말로 시온의 대로가 마음에 있는 사람이라면 시온을 향해서 실제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자들의 모습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시 84:6–8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사실 번역상의 어려움이 좀 있는 말씀이지만 전체 의미를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다. “눈물 골짜기”는 대부분 성경의 각주에 표시된대로 본래 ‘바카 골짜기’다. 그런데 그런 골짜기가 성경에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관련 문헌 등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바카’의 발음이 ‘울음, 흐느낌’과 같다는 것에 착안하여 “눈물 골짜기”로 번역이 되어 있다. 바카가 발삼 나무를 의미한다고 보는 경우도 많다.

무슨 골짜기든지 뒤의 말씀을 보면 메마름으로 상징되는 골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메말라 목마른 곳을 지날 때라도 하나님께서 샘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실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시온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그 길에도 계시기 때문이다. 시온에 있는 자들에게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 길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힘을 얻고 더 얻어 순례자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사모하던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살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다시 “셀라”가 나왔으니 잠시 묵상을 해보자. 예배의 장소에 대한 부분이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요 4:21). 장소에 관계 없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예수님을 통하여 임할 것임을 말씀하셨고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배의 장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몸을 가진 사람은 모이려면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배당 혹은 일반적으로 교회라고도 불리는 장소에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구약의 성전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이 성전을 대체했다거나 그런 말이 아니라, 예배의 장소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교회의 정규 예배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예배의 장소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떻게 해야하는가이다. 질병 때문에 그런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직장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가정의 특수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아얘 전체가 모이지 못했던 상황도 종종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좋지만 교회에 올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마음이 편치 않을 수 있다. 앞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교회 ‘못’ 가는 상황이 생겨서 너무 마음이 편하다면 그게 오히려 문제다. 교회에 가지 못해서 마음이 편치 않을 때, 5절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두는 것이다. 교회에 가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자로서 사는 것이다. 그 역시 복이 있는 삶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예배의 장소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더 사모해야 한다. 시온의 대로를 마음에 품고 있지만 말고 그 길을 따라 순례의 발걸음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함께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더욱 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사모하는 것 자체가 평소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배의 장소를 더욱 사모하여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과 함께함(9-12절)
끝으로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 들어온 자로서 기도한다.

시 84: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먼저는 일반적인 기도의 내용 중 하나인 왕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는 “하나님이여, 우리 방패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는 여기 기도의 맥락에서 왕을 말하고 왕이 그 나라를 보호하는 “방패”로서 불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왕조차도 진짜 “왕”이시고(3절) “방패”이신(11절) 하나님의 돌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자신이 진짜 왕의 궁정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감격하여 말한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실제로 예루살렘에 얼마나 머물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의 마음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좋다. 악인의 장막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낫다. 여기서 성전 문지기는 아마 고라 자손이 성전 문지기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되었을 것이다.

사실 성전 문지기는 우리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닌 일을 하는 사람’, ‘하찮은 사람’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누구든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특권을 얻은 사람이었다. ‘내 하나님의 집 문 앞에 서 있는 것이’가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악인의 장막 ‘안’에 들어가 사는 것보다 차라리 문 ‘앞에’ 서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더 좋다는 의미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와 있느냐의 문제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유는 이렇다.

시 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해”라고 표현한 것은 성경에서 여기가 유일하다. 하나님이 해의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유일한 빛이 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풍성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시는 방패시다. 하나님이 없는 것은 해가 없는 삶이고 방패가 없는 전투다. 절대 살 수 없고 이길 수 없다.

우리 삶의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우리도 영화를 누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정직하게 행하는 자, 즉 하나님을 사랑하여 사랑 가운데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이보다 좋은 분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성소에 있든, 문 앞에 있든, 순례길에 있든, 집에 있든, 논밭이나 직장에서 일을 하든,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 밖에는 우리의 복이 없다(시 16:2). 그러니 하나님 밖으로 나가지 말고 하나님 안으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자. 오직 사랑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 삶과 우리의 모임이 의미있음을 기억하자.

도전
언젠가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집에 살게 될 것이다. 어떤 괴로움이나 두려움, 불안함도 없이 살게 될 것이다.

계 21:3–7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롱디’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장거리 연애 정도가 될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과 우리는 롱디 커플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롱디 커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 연락하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관계가 유지된다. 사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정확히 그렇지는 않지만, 비슷한 면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두고 계속해서 시온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그렇게 하고 이렇게 함께 모여서 하는 모든 것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한다.

힘이 들 땐 하나님께서 눈물 골짜기로 지날 때 샘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자(6절).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임을 기억하자(11절). 그리고 결국 우리가 이 순례의 길을 끝내고 이 땅의 시온,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7절), 그리고 그곳에서는 성전 문지기가 아니라(10절) 그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기억하자(4절). 우리는 정말 복 있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