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 앞에 떨며 즐거워하라

본문: 시편 95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93-100편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하나의 주제를 공유하는 시편들이다. 93편과 94편을 통해서는 그 말의 의미를 주로 살펴봤었고, 나머지 시편들을 통해서는 그에 합당한 반응인 ‘예배’에 대해서 여러 측면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오늘은 시편 95편을 통해서 특히 예배의 태도를 배우게 될 것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자기소개서를 쓰라고 하면 항상 ‘엄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로 시작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자녀 양육에 있어 각자 역할 분담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같은 잘못에 대해 누구는 엄하게 혼을 내고 누구는 그렇지 않다면 자녀 입장에서는 혼란스럽게 되고, 성경적인 기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눈치를 배우게 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예외와 상대성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각자가 가진 기본적인 성향을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부부는 이런 면에서도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녀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똑같이 존중하기를 배워야 하고, 그 존중에는 두려움과 즐거움이 공존해야 한다. 그렇게 자녀는 하나님 섬기기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엄하기도 하시고 자애롭기도 하시다. 하나님은 거기 계시기도 하고 여기 계시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너무 다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기도 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마땅한 반응이다. 이는 시편 2:11에서 이미 왕에 대한 합당한 태도로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었고(“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요구하시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나님 앞에서 떨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말은 모순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 중에 나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있다면 우리는 이런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과 어떤 유명한 배우나 가수를 좋아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강아지를 좋아하면 귀여워해주면 된다. 쓰다듬어주고 먹을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데 있어 어떤 두려움도 없다. 하지만 유명 스타를 좋아하는 것은 좀 다르다. 좋아하지만 가까이 가기가 쉽지 않다. 혹시라도 내가 하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그 사람이 싫어할까봐 걱정되기도 한다. 너무 좋은데 두려움이 함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혹은, 서글프게도) 이것이 정말 예배하는 자의 태도다. 그 대상이 다를 뿐 정확히 예배하는 자는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도 그렇다.

시편 95편은 1절과 6절의 “오라”라는 명령을 기준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명령은 참된 예배로의 초청인데, 1절과 6절의 “오라”가 같은 단어는 아니다. 1절의 “오라”가 일반적인 초청이라면 6절은 좀 더 적극적인 초청으로서 “들어 오라(합류하라)” 정도의 의미다. 말씀을 읽어 보면 “오라”로 구분되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전반부는 정말 초대이지만 후반부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각 부분은 “오라”는 명령 다음에 “우리가”로 이어지는 권유의 내용이 나오고 그 이유도 나온다. 전반부인 1-5절은 ‘오라, 위대하신 여호와께 즐겁게 노래하자’로 요약할 수 있고, 후반부인 6-11절은 ‘오라, 좋으신 여호와께 떨며 순종하자’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태도로서 즐거움과 떨림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권유의 내용과 언급된 여호와의 어떠하심이 바뀐 것 같다. 하나님의 좋으심이 즐거움과 더 잘 어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두려움과 더 잘 어울린다. 하나님의 크심 앞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 자연스럽게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편은 위대하신 여호와께 즐겁게 노래하자고 말하고 좋으신 여호와께 떨며 순종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속성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나누어질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떠는 자가 즐거워하지는 않거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떨지 않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그렇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치우치는 성향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런 경우에는 이렇고 상황이 이렇게 달라지면 결론도 이렇게 바뀝니다라는 식의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라는 식의 단순한 말을 좋아한다. 그것이 명료하게 들리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이 더 확신을 준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에게 편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우리에게 편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우신 분으로만 이해하거나 혹은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즐거움을 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두려움을 잊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나눠져서 부분으로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하면 안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순간 성경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치우치게 이해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그러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묵상하며 즐겁게 노래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면서 떨며 순종해야할 이유를 생각하기도 해야하는 것이다. 시편 95편은 그렇게 우리의 예배 태도의 균형을 잡아주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반부의 말씀을 먼저 살펴보자.

오라, 위대하신 여호와께 즐겁게 노래하자(1-5절)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이는 예배하라는 명령이자 초대다. 조금 뒤에 보게 될 시편만 봐도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지만, 시편 95편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자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마치 예전 주일 아침에 울리는 예배당의 종소리와 같다. 차이가 있다면 그 종소리는 좀 더 조용하고 엄숙한 느낌의 예배로의 부름이었다면, 여기 시편의 부름은 훨씬 더 시끄럽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우리 모여서 함께 예배해볼까요?”라며 조용히 부드럽게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지 않다. 그는 온힘을 다해 외치고 있다. 함께 여호와께 노래하며 즐거이 외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요즘 가수들이 콘서트를 하면서 관객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라고 하는 딱 그런 모습이다. 그들은 별 의미없이 소리를 지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한 굳건한 반석이신 여호와께 감사함으로 소리를 지른다. 즐겁게 그렇게 한다.

또한 이것은 진짜로 시끄럽기한 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함께 노래하자고 하고 시를 지어 즐거이 노래하자고 한다.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를 쉬운 성경은 “음악과 노래로 주를 높입시다”로 번역했는데, “시”라는 표현이 주로 악기를 동반한 노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시편 기자는 반주에 맞춰서 힘차게 노래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반드시 악기가 있어야만 예배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악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다. 이에 대해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가 잘 이야기 했다. “(예배에) 악기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기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예배입니다. 또한 기악은 그저 하나의 퍼포먼스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이 시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든 음악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옳고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를 동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합시다.”

때로 악기가 예배에 방해가 될 때도 있다. 충분히 숙련되지 않는 반주자로 인해서 온 성도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반주자를 응원해야하는 경우가 그럴 수 있다. 악기 자체의 소리가 너무 커서 모든 다른 소리가 묻힐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때로 조용히 가사를 음미하며 찬양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예배에 있어 음악적 요소는 고려할 부분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예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우리는 악기를 비롯한 여러 음악적 요소들을 활용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모습이든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다는 사실이다(2절). 2절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의 얼굴을 만나러 나아가자’이다. 예배자가 크게 소리치는 이유가 멀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께까지 들리려면 소리를 크게 내야해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그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나아간다. 우리가 크게 소리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잘 못들으셔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감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우리 안에 갖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큰 비가 왔을 때 수문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우리 안에 그냥 머물러 있지 못하고, 우리 입술의 찬양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사실 1-2절만 가지고도 예배에 대해서 한시간 설교를 해도 부족하다. 간단하게 몇 가지만 정리해 보자.

    1. 우리의 예배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면 항상 죄 지은 것 밖에 생각나지 않고, 뭐 하나 하나님 앞에서 잘한 것이 없어서 예배의 자리로 나올 때 항상 ‘죽을 죄인’으로 나아오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된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죽을 죄인인지 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로 인해 더 큰 기쁨이 우리의 예배에는 있어야 한다.
    2. 기쁨은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향이나 문화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분명히 겉으로 표현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예배드려야 하는데, 그 모든 것에는 우리의 ‘육체’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임을 주님은 말씀하셨는데, 그 예배는 항상 개인적이거나 보이지 않게 드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겉으로 표현되는 것이 자연스럽다.우리는 다른 것들은 잘 참지 못하면서 이상하게 주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은 잘도 참는다. 어찌나 날 참는지, 몇 년을 같은 학교를 다니고 십수 년을 같은 직장에 있는 사람도 모를 정도다. 심지어 같은 교회에 있는데도 모르겠는 경우도 있다. 잘 참는건지 애초에 그런 감사가 없는 건지는 하나님 만이 아시겠지만, 확실한 것은 참된 마음은 겉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3. 예배를 위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편 95:1-2의 초청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우리가 왜 모여서 예배해야하죠?”라고 되물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모여서 예배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느 곳에서나 예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이제는 모이지 않고 혼자서만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를 보기 위해, 좋아하는 가수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모인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말하고 싶어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그런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왜 모이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강조를 해야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르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모이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연스럽게 예배하기 위해 모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여서 하나님 앞에 즐겁게 나아가자고 초청한 후에 이제 그 이유를 밝힌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이유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구원과 같은 것이 제시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강조되어 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만, 그 앞에서 방종해서는 안된다.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는 잊지 말아야 한다.

3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절대적인 이유다.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시더라도, 심지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어도,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분은 그 자체로서 “크신”, 즉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종종 나오는 다른 신에 대한 표현들은 좀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하나님과 비슷한 다른 신의 실제적 존재를 인정하는 표현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신에 대한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신들은 천사들을 의미하기도 했고, 해, 달, 별, 산, 동물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사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일 뿐이고,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신이라고 섬겼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유일하게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들이 신이라 부르는 그 어떤 것들보다 위대하신 왕이시다. 그분이 유일한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4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생각할 수 있는 땅의 가장 깊은 곳이라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반대로 우리가 알고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도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알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손을 벗어난 곳은 없다는 말이다. 바다와 땅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양 극에 있는 것들을 언급하여 “모든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셨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소유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왕이시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의 손을 벗어난 어떤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것은 없다. 따라서, 왕에게 합당한 예를 갖춰야 한다면,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은 바로 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를 갖춰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사실을 누가 알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누구도 3-5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바알이 왕이라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애굽의 왕 혹은 앗수르, 바벨론의 왕이 크신 왕이라고 주장했다. 로마의 황제가 왕이라고 주장했다. 지금도 이런 주장은 많다. 사람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크신 왕’이있다. 자기들이 만든 신, 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손에 두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의 예배가 바로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선포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지만(시 19:1), 사람들은 듣지 못한다. 우리가 소리를 내야 하고 우리가 그들로 듣게 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 1-2절과 같은 예배를 드린다면, 그 자체로 전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예배의 주인공은 결국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 듣든 듣지 않든 크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기쁨으로 즐겁게 노래하며 크신 왕을 높여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나아가는 자의 마땅한 반응이다.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떨며 순종해야 할 것을 말한다.

오라, 좋으신 여호와께 떨며 순종하자(6-11절)

6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앞서 말한 것처럼 여기 “오라”는 좀 더 적극적인 초청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이다.

이에 이어지는 청유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세 단어가 사용되어 그 의미를 강조한다. 굽히는 것, 경배하는 것, 무릎을 꿇는 것이 그것이다. 각각의 단어가 다 예배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비슷한 단어들인데, 시편 기자는 이 유의어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기본적인 태도가 어떠해야하는지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존중과 복종의 의미를 강조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예배의 기쁨을 말할 때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여기 예배의 떨림을 말할 때는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라고 표현한다. 이는 앞선 4-5절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기에 그들에 대한 소유권과 주권을 주장하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소유권과 주권을 주장하실 수 있으시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크신 하나님이시며 크신 왕이시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는 낮아진 마음으로 마땅히 떨며 순종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마음으로’ 이렇게 하자고 말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태도를 의미한다. 당연히 마음에 없는 태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앞서 우리의 기쁨이 표현되어야 했던 것처럼, 여기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존중과 복종의 마음도 겉으로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쁨의 표현이 개인과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었던 것처럼 존중의 표현도 그렇다. 다를 수는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표현되는 것이 맞다. 상견례를 하는 자리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지 않는 이유는 옷이 예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문화에서는 그렇게 상대에 대한 나의 태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마음으로 상대를 존중한다고 해도 트레이닝복을 입은 나의 모습을 본 상대는 무시 당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은 나의 마음은 여호와 앞에 나오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시편 기자는 균형 잡힌 태도를 놓치지 않는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는 절대적인 왕이시지만 우리에게 공포로 다가오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분명 두려우신 하나님이시지만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

하나님이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 관계는 단순히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주인과 종의 관계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친밀한 사랑의 관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맡기고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평가하며 심판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의 손은 우리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사랑으로 기르고 돌보신다. 양을 이용하기만 하는 삯꾼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언약의 관계에 스스로를 묶어두셨고 이스라엘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굽혀 경배하는 것은 순종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행위이기도 하다.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이런 사랑의 순종은 예배의 장소에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7절 끝의 반전은 갑작스러울 수 있지만 꼭 필요한 말씀이다. 예배는 모이는 장소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과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7…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여기서 언급된 “므리바(맛사)” 사건은 출애굽기 17장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에게 불평했고 모세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치면 거기서 물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그렇게 했을 때 물이 나와 백성들은 마실 수 있었다. 이 사건의 끝에 모세는 이렇게 기록했다.

출 17: 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 경험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들에게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하며 하나님을 의심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인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반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 마음이 완악했던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빼앗겼다.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에게 이 사건을 경고로 삼을 것을 여기 시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7-8절)

참된 예배는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갈 뿐 아니라, 그 삶도 함께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기쁨의 예배도, 그 어떤 떨림의 예배도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위선으로 보시고 하나님에 대한 모욕으로 보신다. 말라기 시대에 그런 예배가 드려지고 있을 때 하나님은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 1:10)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이 경고의 말씀은 “오늘”을 강조한다. 이전에 얼마나 순종했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앞으로 얼마나 순종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오늘, 지금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예배는 없다. 순종이 없이는 예배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자비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신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방종으로 이끌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쁘게 행해도 상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따라서 좋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떨며 순종해야 한다. 순종의 삶을 살고 순종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좋으신 하나님께 드릴 마땅한 예배다.

도전

이 시편은 우리를 위대하고 좋으신 하나님께 ‘와서’ 예배하라고 초대한다. 신학자 리건 던컨은 우리가 이 시편의 “오라”는 명령을 들을 때, 우리는 그저 예배의 장소로 나오라는 초대 이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복음,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최초의 사람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에서 쫓아내시며 “가라”고 하셨고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오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것이 곧 복음이다.

그리고 던컨은 이렇게 덧붙인다. “당신에게 ‘오라’고 초대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의 피를 흘려야 했음을 아십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인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실 수 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그 일을 당신에게 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라’는 명령을 들을 때,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어 주신 하나님의 값비싼 자비의 서곡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편의 말씀을 통해 “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 음성에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이 초청을 거절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당신에게도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여호와 앞에 떨며 즐거워하는 예배를 드리기 바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라. 마음껏 죄 짓고 살아도 예배하러 나와서 회개만 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 반대로 하나님이 나를 항상 감시하면서 책망하고 벌만 주시는 분처럼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예배하라. 순종의 삶을 살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와 즐겁게 예배하는 것이 참된 예배다. 우리의 결단의 고백으로 이 시편의 말씀을 다시 읽으며 우리 귀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시 95:1-3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시 95:6-7 6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