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본문 :  시편 70편

설교자 : 최종혁

 

시편 70편은 시편 40:13-17과 약간의 차이를 빼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유사성 때문에 두 시편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다. 70편이 먼저 기록되었고, 거기에 내용을 추가한 것이 40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반대로 40편이 먼저 기록되었고 70편이 좀 더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따로 떼어져 사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71편에는 표제가 없기 때문에, 본래는 71편으로 이어지는 시의 첫부분으로 보기도 한다. 하나의 시를 40편은 결론에, 70-71편은 시작에 배치했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과정이 있었든, 결과적으로 시편 70편은 독립된 하나의 시편으로 우리에게 전해졌고, 그렇게 독립된 시편으로 보지 말아야할 이유는 없다.

70편은 짧은 시편이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다윗의 시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다. 오늘은 이 기도의 상황과 내용을 살펴보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자.

상황

이 시편의 구체적인 상황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1절에서 도움을 구하는 모습은 어려움 중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고, 2절의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나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보면 그 어려움이 원수들로 인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5절에서는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경제적인 필요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이 상황을 이겨낼 자원과 힘이 없다는 의미다.

저자인 다윗은 이런 상황을 많이 경험했다. 아니 항상 그런 상황에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러했고 왕이 되고 나서도 평안한 삶은 아니었다. 많은 다윗의 시편의 배경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시편 70편은 어떤 특수한 상황, 특정한 고난을 강조하려는 목적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표현들이 있다. 1절은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시고 여호와여 나를 도우시기를 속히 하소서”다. 즉, 구하는 내용에서 핵심은 “속히”에 있다는 말이다. 5절은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라고 하려 다시 한번 “속히”가 나오고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하여 부정형으로 같은 의미를 강조한다. 즉, 이 시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지금, 즉시, 가능한 빨리 응답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핵심이다.

만약 시편 40편에서 어떤 목적으로 따로 떼어낸 시편이 시편 70편이라고 본다면, 그 목적은 이런 상황의 긴급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즉, 시편 70편은 어떤 상황이든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기도의 내용을 보자.

내용

내용은 누구를 위한 기도인지를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다.

자신을 위한 기도(1절)

1절은 자신을 위한 기도다.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절)

5절도 자신을 위한 기도로 마무리가 되는 것을 고려해보면, 70편은 전체적으로 다윗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여기서 좀 더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자체보다는 그 일을 언제하시느냐에 있다. 즉, 타이밍에 대한 기도다.

고난은 그 강도보다 길이 때문에 더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군대에서는 계속해서 훈련을 한다. 그런데 훈련이라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더 잘하기 위해 몸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격훈련이라는 것이 있어서 여러가지 힘든 훈련을 일주일정도 집중적으로 할 때가 있다. 힘들다는 것을 아니까, 어떻게든 빠질 궁리들을 하지만, 결국 대부분은 훈련을 받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을 뽑으라면, 단연 화생방과 행군을 들 수 있다. 행군은 군장을 메고 먼 거리를 걸어서 이동하는 훈련이고 화생방은 좁은 창고 같은 곳에 들어가서 맵고 따까운 연기 같은 것을 들이 마시면서 참고 견디는 훈련이다. 눈물, 콧물을 줄줄 쏟아 내는 데, 실수로 눈이라도 문지르면 정말 큰 일이 난다. 행군은 주로 밤새 걸어서 새벽에 끝나고, 화생방은 길어야 몇 분정도가 걸린다.

어쨌든 둘 다 고통스러우니까, 훈련이 끝나고 나면 이 두 훈련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많이 오고 간다. 서로 자기가 제일 힘들었다고 자랑을 한다. 그러다가 뭐가 더 힘드냐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가곤 하는데, 의견이 갈린다. 행군을 두번 하게 되도 화생방은 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쨌든 짧게 끝나는 화생방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행군이 훨씬 더 힘들었다. 길기 때문이다.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내가 걷는 것인지 걷는 기계가 된 것인지 헤깔릴 때 쯤, 익숙한 장소가 보이기 시작하고 드디어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힘이 난다. 그런데 한번은 다른 장소에 가서 행군을 했던 적이 있는데, 얼마나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힘들었던 행군이 없었던 것 같다.

고통이라는 것이 그렇다. 처음에는 고통의 크기가 우리를 압도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사람은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견딜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가 되면 더 큰 문제는 언제 그것이 끝나느냐이다. 그래서 성경의 시편을 보면 “어느 때까지 입니까?”라고 하나님께 묻는 내용들을 종종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장에 끝나면 가장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느 때에 이것이 끝날지라도 알면 좀 나은 것이다. 작아도 긴 고통은 더 우리를 힘들게 하고,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지 못하면 더욱 그렇다.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긴급한 상황에서, 더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 또한 우리의 죄에 대한 고백 등이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한 간구보다 선행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의 기도는 더욱 그렇다. 다윗은 어느 단어 하나 뺄 수 없게 간결하게,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을 구했다. 그만큼 절박하고 절망적이었던 것이다.

대적을 위한 기도(2-3절)

대적을 향한 기도라고 하는 것이 더 맞겠지만, 다윗의 기도는 대적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다윗은 자신의 구원이 대적에 대한 심판이 전제되어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대적과 관련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구했다.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2-3절)

 

다윗은 그의 대적들에 대해 세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 그들은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다.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윗의 고통을 즐겼다. 다윗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를 괴롭게 했다. 그들은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윗을 조롱했다. 이런 표현이 시편 35편에 사용되었다.

시 35:21 또 그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격하였다 하나이다

시 35:25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아하 소원을 성취하였다 …

아마 다윗의 영혼을 찾고 그의 상함을 기뻐하던 자들은 고통 받는 다윗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와~ 위대한 다윗 왕이네. 저 초췌한 모습 좀 봐.” 마치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를 손에 들려주고 경배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했던 로마 병사들처럼, 또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서 자기를 구원하라고 조롱했던 유대인들처럼 다윗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다윗은 이들의 악한 계획이 다 무너지고 그로인해 그들이 수치와 무안과 수모를 당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 그들이 뒤로 물러가서 더 이상 이런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구한다. 악한 자들에게 있어 최선은 그들이 악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를 구했다.

의인을 위한 기도(4절)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절)

앞에서 그의 대적들을 다양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다윗은 여기서 의인들에 대해 두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그들은 “주를 찾는 자들”이고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다윗의 영혼을 찾고 그의 상함을 기뻐하던 자와는 상반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다윗은 그들에게 합당하게 하나님께서 행하여 주시기를 구한다.

이 말씀은 69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윗은 이와 비슷하게 69:6에서 이렇게 기도했었다.

시 69: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여기는 주를 바라는 자들, 주를 찾는 자라고 표현되었지만, 같은 사람들에 대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의로 인해 고난 당한 것으로 인해 그가 속한 신앙 공동체가 수치를 당하고 욕을 당하지 않기를 기도했었다. 69:30-32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시 69:30-32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으로 인해 하나님을 “위대하시다”라고 찬송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 자들도 힘을 얻고 함께 그렇게 찬송할 수 있기를 다윗은 바랐던 것이다.

여기 70:4이 이 말씀들의 짧은 요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기서 다윗은 “주를 찾는 모든 자들”, “항상 말하기를”과 같은 표현을 통해 그런 일들이 더 일반적인 일이 되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냥 살다보면 한번쯤은 경험할 수 있는 일, 혹은 어떤 특별한 누군가에게만 일어나는 일처럼 보이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이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두 가지 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항상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마땅한 일이다. 지금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위대하지 않게 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기뻐해야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다윗처럼 이렇게 기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삶에서 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나타나주시기를, 역사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찬양이 되고 예배가 된다. 즉,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할 수 있기를, 특히,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고통의 상황 중에 하나님께서 속히 개입하셔서, 60편의 기도처럼 모두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기를 구한 것이다.

악인은 그들의 악한 계획이 무너짐으로 수치를 당하고, 의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수치를 면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게 해달라는 것이 다윗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했던 기도다. 그리고 5절에서 다시 자신의 상황으로 돌아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며 시편을 마무리 한다.

자신을 위한 기도(5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5절)

1절은 정말 꼭 필요한 단어만을 통해 자신의 상황의 긴급함을 표현했다면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 간구한 믿음의 기초를 표현한다.

첫째는 그는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이 선택하지도 원하지 않은 외부 환경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궁핍하다는 것은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의미한다. 즉, 절망적이고 절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진게 없어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또 다른 다윗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그의 도움이시고 그를 건지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그럴 때가 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도 이것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할 수 없고 따라서 도움이 필요하다.

살면서 정말 다윗처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이렇게 말씀을 준비해서 앞에 설 때마다 그렇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한다고 했을까 하는 후회가 파도처럼 찾아온다. 내 가족들도 내가 제대로 돌볼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나만 아니었으면 내 아내가, 내 자녀가, 내 부모님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성도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집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업을 해서 원하는대로 일자리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훌륭한 상담자였으면 좋겠다. 내가 엄청난 전도자였으면 좋겠다. 내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와 같은 생각들이 든다. 생각해 보면 결국 이거다. “내가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그런 좌절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도울 수 있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그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길 원하신다. 우리는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도움이시고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냐 하시지 않을 것이냐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언제 하실 것이냐가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 그런 믿음 가운데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교훈

오늘 시편을 통해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구하는 기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두 극단 중에 한쪽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 지극히 나 중심의 기도를 하거나 반대로 지극히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둘 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어서 그렇다.

나 중심의 기도를 하는 경우, 하나님은 그저 자판기와 같다. 하나님은 내가 필요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하는 존재다. 내가 시험을 보면 잘 봐야 하고 면접을 봐도 잘 봐야 한다. 나는 아프지도 말아야 하고, 계획하는 일이 다 되어야 한다. 차가 꽉 막혀 있어도 내가 있는 차선은 빨리 가고, 주차장이 만차여도 내가 들어가면 엘리베이터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차가 때마침 빠져 나가야 한다. 내 배우자는 나를 왕처럼 혹은 왕비처럼 항상 대해 주어야 한다. 자녀들은 신앙도 좋고 공부도 잘한다. 돈 때문에 걱정하는 일도 없다. 열거하자면 끝도 없는 이런 나의 기대, 나의 바람을 채워주는 존재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고 기도하면,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게 된다. 특히 기도를 열심히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하고 그러면 더욱 그렇다. 마치 자판기에 돈을 넣었는데, 음료는 나오지 않을 때와 같다. 자판기가 내 돈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자판기를 때리고 발로 차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이 한가지나 두가지일 수 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당장에는 “이것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것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정확히 ‘종교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종교 생활이다. 이럴 때 속히 도우소서, 지체하지 마소서는 어린 아이가 욕심을 부리면서 떼를 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지나치게 하나님 중심의 기도도 있다. 기도가 하나님 중심인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 생각이 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자판기처럼 여겼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을 냉혈한으로 여긴다. 은혜로운 왕이 아니라 무자비한 독재자로 여긴다.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기도해 봐야 하나님 뜻대로 되는데 기도할 이유가 어디있느냐고 묻는다.

비슷하게 하나님은 나의 사소한 기도 같은 것은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기도의 경중을 나누는 것인데, 결국 이 경우도 기도는 하지 않게 된다. 기도할만한 큰 일이 없고, 그래서 막상 큰 일을 만나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잊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 역시 표현만 달라졌을 뿐, 앞서 말한 나 중심의 기도와 다르지 않다. 결국은 둘 다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어야 하는 분으로서만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시편에서 우리는 균형잡힌 시작을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 기도했지만, 그 기도는 하나님 중심이었다.

먼저는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나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아마 살면서 그런 기도를 한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여기 다윗처럼 하나님 지금 정말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라는 식의 기도를 해봤을 것이다. 지난 월요일에 들었던 간증에서도 그 자매님은 북송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다윗과 같은 기도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드렸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정말 다급한 마음으로 지금 하나님 응답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정말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드리는 그런 다급한 기도에 비해서, 내가 다급한 마음에 드렸던 기도가 뭐였는지를 생각해 보니까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런 것들을 다 계산하고 하나님께 “속히 도우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할 때는 계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 필요하다. 진실되게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된다.

시편 70편의 시작이 그러했다. 다윗은 이런 저런 상황에 대한 말이나,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부분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 속히 도와주실 것을 구했다. 그의 상황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다만 그가 느끼기에 더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렇게 기도했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지체하지 마소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생각해야할 부분이다. 정말 죄악된 것, 야고보의 말처럼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실지 아닐지, 하나님께 기도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것이 아닌지 등에 대한 생각은 일단 내려놓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것은 5절 말씀처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고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을 때 가능하다. 그 때 우리는 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죄송하든 염치가 없든,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나만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기도일 수 있지만, 결국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이런 기도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십자가를 앞두셨던 예수님의 기도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런 고통 중에 아버지 하나님께 세번이나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마 26:39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것을 모르셔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만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이해했던 사람은 없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밝히신 것처럼 구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기도를 하셨을까?

그 결과를 생각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결국 이 기도를 통해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삶에서도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셨고, 그 죽음에서도 그러함을 이 기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신 모든 구원의 일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괴롭지도 않은데 괴롭다고 하셨을까? 그냥 말로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분명 괴로우셨고, 할수만 있다면 그 잔을 피하기를 원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영원 전부터 누려왔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의 즐거움이 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말도 안되는 역설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를 만든 유일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과에 관계 없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셨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 뜻이 나의 고난 중에 나의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나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는 것이 곧 내가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의미이다.

도전

고난 중에, 어려움 중에, 어떤 상황이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우리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다윗처럼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구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타이밍이 잘못되진 않는다. 하나님께서 때를 놓치셔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일들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좀 더 고난을 견뎌야할 때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진실함으로 기도하며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기도 밖에 할게 없는 상황이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선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