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에서를 만난 야곱
본문: 창세기 33장
설교자: 이병권

 

저는 오늘 본문을 “에서를 만난 야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로 도망갔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20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야곱이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20년 만에 만나는 쌍둥이 형과 동생입니다. 그 만남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정말 오랜만에 만났으니 며칠 동안 잔치를 벌이며 그동안 있었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밤을 지새웠을까요? 그런데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동생은 형의 것을 가로채기 위해 속임수를 썼고, 형은 동생에 대해서 분노하며 동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비록, 많은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두 사람의 과거를 생각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려워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의 만남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중간에서 중재하거나 말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곁에 이삭이나 리브가가 있으면 뒤에 숨기라도 할 텐데,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야곱은 이렇게 핑계를 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건 모두 엄마가 시킨 일이야! 난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한 것뿐이야!’

일이 어찌되었든 이제 야곱의 눈에 에서가 보입니다. 에서가 야곱에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1a) 야곱은 에서가 오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400명과 함께 자신에게로 오고 있는 에서를 봅니다.

야곱은 이 짧은 순간에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나름의 머리를 씁니다. 자신의 아내들과 자녀들을 사랑하는 순서에 따라 나누었던 것입니다. “…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1b-2) 야곱이 빌하와 실바 그리고 그 자녀들을 앞에 둡니다. 그리고 레아와 자녀들은 그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제일 뒤에 둡니다.

야곱은 만약을 대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문제는 야곱의 선택에 따라 누군가는 더 안전한 자리로 누군가는 더 위험한 자리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야곱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양이 되거나 방패막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누구는 제일 앞에 있어야 했고 누구는 제일 뒤에 있어도 됩니다. 야곱이 가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야곱 집안에 계속되는 자녀에 대한 편애와 차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대상은 달라졌지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태도는 훗날 자녀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원인이 됩니다.

야곱의 행동 중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내들과 자녀들을 앞에 보내고 뒤에 숨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앞으로 나아가 에서를 맞이합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3)

특별히 야곱은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나아가는데, 한 곳에 가만히 서서 한 것이 아니라 차츰 가까이 가면서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왕이나 높은 사람들을 만날 때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멀리서부터 일곱 번 절을 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던 방식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앞에 두고 최대한 예의와 존경을 표시합니다.

이에 대해서 에서는 어떻게 했을까요? 야곱을 본 에서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4) 절뚝거리는 다리로 절을 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야곱, 에서는 그런 야곱에게 달려가서 그를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서로 울기 시작합니다. 20년 만에 만난 형과 동생, 그동안의 후회와 아쉬움, 미안함, 모든 것이 눈물로 흘러내립니다. 형도 울고 동생도 웁니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형과 동생은 다시 만났고, 지난날의 아픔을 씻어버립니다.

에서가 보여준 이 따뜻한 환영은 에서가 야곱을 용서했고 야곱에 대해 복수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서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하나님이 에서에게도 복을 주셔서 그도 번성하였기에 야곱에 대한 시기나 원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을 껴안고 울던 에서가 곁에 있는 무리를 보고 묻습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5)

야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가족이라며 그들을 소개합니다.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가정의 달인 5월이 지나기 전에 가정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나의 가정이, 나의 가족, 나의 배우자, 그리고 나의 자녀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진심을 담아서 고백할 수 있는지요? 우리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의 가족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이게 은혜인가? 싶을 때도 있고, 이 인간을 통해서 주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되고 주님께 매달리게 되니까 그래서 은혜인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족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라고 믿는다면, 가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가족을 보호하고 보살피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거창한 일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고 영혼을 위해 생명을 불사르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일, 그런 하늘의 구름 같은 일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가족을 사랑하며 가족을 위해 수고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고 야곱의 가족들은 순서대로 에서에게 나아가 몸을 굽혀 절을 합니다. 가족 소개가 끝나자 이번에는 수많은 가축들에 대해서 묻습니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8)

에서는 야곱을 만나러 오면서 만났던 많은 가축 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습니다. 물론 야곱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에서의 질문은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자신에게 주느냐하고 묻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만나러 오는지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그의 마음을 돌이키려 했습니다. 에서로부터 은혜를 입으려고 선물공세를 펼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물에 대해서 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9)

에서의 대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에서가 달라졌어요. 에서가 철들었어요.’ 이런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에서의 대답을 통해서 우리는 에서가 야곱을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야곱이 주는 예물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의 마음을 바꾼 것은 야곱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에서가 야곱의 예물을 거절하자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10-11)

야곱은 형이 자신을 용서한 것이 예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강권하면서 결국 에서가 선물을 받도록 했을까요? 에서가 거절할 때 그냥 예물을 돌려받는 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닐까요? 왜 그랬을까요?

  1. 가축이 너무 많아 좀 줄여야 했기 때문에, 어차피 줄일 거면 형에게 주자
  2. 이미 형에게 준건데 다시 돌려받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에
  3.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형과 나누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4. 나중에 형의 마음이 변하더라도 예물이 화해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야곱의 입장에서는 보험과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5. 옛적에 했던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라도 보상하고 싶었기 때문에

학자들이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4번과 5번입니다. 예물을 받는 것은 서로 화해했다는 것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혹시 시간이 지나 뭔가 바뀔 수 있는 사항을 미리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형에게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기에 그 잘못을 갚으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야곱은 간청해서 에서가 예물을 받도록 합니다. 특별히 야곱이 간청하면서 했던 말 중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아부성 발언이라고 보기에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나? 요즘 표현으로 좀 오글거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여기 나오는 얼굴이라는 말은, 야곱이 앞 장에서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고백했던 브니엘의 사건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야곱은 내가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겠다고 했고, 또한 내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했지만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창세기의 저자는 ‘얼굴’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두 사건을 연결합니다. 하나님이었던 낯선 사람과의 만남과 지금 에서와의 만남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두 인물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알 수 없는 낯선 사람,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했던 에서, 그런데 동일하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 사람에게서 야곱은 평화를 얻습니다. 생명이 보전되었고, 화해를 얻게 됩니다. 두려움을 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형으로부터 용서를 얻습니다.

야곱은 브니엘의 경험을 통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지금 에서와의 만남으로 다시 그 하나님을 만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용서하는 형의 얼굴에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이 말을 할 때, 에서의 입장에서는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야곱의 입장에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없이 화해를 이룬 두 형제는 또한 다툼 없이 평화로운 분리를 이루어냅니다. 그 내용이 12절부터 이어지는데 에서와 야곱의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12-14)

야곱은 함께 가자는 에서의 제안을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아직 자녀들이 어리고 짐승 떼도 많아서, 에서가 데리고 온 400명의 장정들과 속도를 맞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무리가 되지 않도록 천천히 에서가 사는 세일로 가겠다고 합니다. 물론 야곱은 세일로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15절에서 보는 것처럼, 에서가 호위병 역할을 할 수 있는 몇 사람을

야곱에게 머물게 하려고 하자 야곱은 이 또한 사양합니다.

양치기인 야곱과 사냥꾼인 에서는 삶의 방식이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전에 야곱이 라반을 피해 도망했을 때 가축들과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강행군을 떠났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야곱이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핑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곱은 에서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세일’이 아니라 ‘숙곳’으로 갑니다. 야곱은 에서가 있는 세일로 가지 않습니다.

두 형제는 화해했고 평화롭게 각자 자기 길을 갑니다. 에서와 함께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했던 서원을 지키는데 방해가 될 것이기에 지혜로운 결정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야곱이 자기 형을 또 다시 속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두 형제의 헤어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16-17)

숙곳은 ‘오두막, 초막’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이곳에 임시 거처를 세웠습니다. 가축들을 위해 우리도 지었습니다. 이는 야곱이 그 땅에 정착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여행을 했던 야곱과 일행은 쉴 수 있는 곳을 마련합니다. 야곱은 숙곳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이 땅에 부자가 되어 돌아왔고 문제없이 정착하게 되었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부터의 말씀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야곱이 세겜으로 이동했고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땅을 샀음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값을 주고 구입했던 것처럼 야곱은 그 땅을 구입했고 자기의 소유로 만듭니다. 땅 값으로 생소한 단위가 나오는데, 야곱은 그 땅을 100‘크시타’에 삽니다. 크시타가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부 문헌에 새끼 양 한 마리의 정도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곳에 제단을 쌓아 하나님을 예배했고, 야곱의 삶에서 계속되는 이름 짓기로 본문이 마무리됩니다.

야곱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 이라고 부릅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제단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벧엘에서 주셨던 약속을 자신이 상속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28:21)

자신이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면,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겠다는 고백입니다.

성경은 야곱의 이 고백을 기억하고 대답하듯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18)

야곱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야곱에게 하셨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의 서원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을 예배합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33장을 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를 가지고 야곱은 왜 이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어찌 보면 너무 비굴하게 보이는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형이 그렇게 무서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불과 몇 시간이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는 일을 보면 그 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면서 어떤 일들을 합니까?

첫째, 야곱은 가족을 순서대로 나누며 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그렇지 않은 가족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둘째, 야곱은 에서에게 절을 하며 에서를 주인으로 치켜세우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다르게 자신의 위치를 경시하는 일을 합니다. 셋째, 야곱은 에서를 따라 세일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갈 마음이 없었고 가지 않았습니다.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만난 야곱을 이처럼 나약하게 만들었을까요?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를 구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야곱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데 야곱은 이 사실을 또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주눅이 들면 세상이 너무 커 보이고 강하게 보이고 무서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필요이상으로 겁을 먹고 걱정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현실 앞에서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나를 향해 오고 있는 에서와 장정 400명이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더 가치 있는 것을 택하기보다 눈치를 보며 적당히 기준을 낮춥니다. 그냥 세상의 흐름에 묻어가는 겁니다. 현실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굳이 구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렇게 정체를 감추며 살아갑니다. 때로 그릇된 방법으로 나의 길을 찾으려 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앞에 있는 현실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쉬운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빛으로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너무 강하기에 빛을 내기를 주저하며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둠이 강할수록 빛은 더 환하게 빛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분이 베푸신 은혜 안에 있기에 당당하게 세상과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야곱에게 여러 가지 연약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바뀌지 않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화해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야곱의 어떠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에서로 하여금 날카로운 복수의 칼을 가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 동생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야곱이 한 일 중에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야곱은 사건이 있을 때 마다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야곱이 자신이 지은 이름을 부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붙인 이름이지만 참 기가 막히게 잘 지었네!’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야곱은 그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왜 그 이름을 짓게 되었는지,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그 일을 잊지 않도록 기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금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주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그리고 그 은혜가 앞으로도 내 삶 가운데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분을 예배함으로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나를 향한 계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브니엘의 하나님을, 계속 기억하며 그 약속을 이루심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끝날 날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인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수학문제처럼 어떤 공식에 넣으면 정답이 바로바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겪는 상황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를 두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 은혜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세상을 향해 가슴을 펴고 주눅 들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과 부딪히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렵게 생각했던 문제들이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겁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생각보다 가볍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보다 단순하고 간단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그런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