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려움은 불가능이 아니다

본문: 창세기 50장 15-21절 외

설교자: 최종혁

우리는 종종 ‘-는 어렵다’를 ‘-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사전적 의미로 둘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에서는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고, 때로는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용서를 ‘어렵다’고 말하면서 어쩌면 ‘불가능하다’를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용서하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서가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계속 마음 속에 있는 생각 중 하나가 ‘용서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용서에 대한 말씀을 시작할 때도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어렵고 불편한 주제이지만 반드시 우리가 잘 알아야 하고 또한 실천해야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었다. 용서를 다룬 책들을 봐도 항상 처음에는 ‘용서가 어렵다’는 얘기를 한다.

용서가 왜 어려울까?

일단은, 생각해 보면 억울하다. 분명히 상대가 잘못을 했는데, 손해는 내가 감수한다. 그래서 공정하지 못한 것 같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금전적인 것을 통해 그 부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내가 받아야할 (받을 권리가 있는) 돈을 받지 않기로 하는 것은 그만큼의 금전적 손해를 내가 감수하는 것이다. 한 대 맞았는데 나는 때리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상대는 나에게 하지 말아야할 일을 했는데, 나는 해야할 일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손해를 보니까 억울하고 그래서 어렵다.

또 하나, 용서했을 때 같은 일이 반복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용서는 상대의 잘못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상대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한 줄도 모르게 되며, 결과적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갚아주기 어렵다면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라도 뭔가 본때를 보여줘서 다시는 그런 짓, 즉 나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가 어렵기도 하다.

사실 이런 생각이라도 정상적으로 할 수 있으면 다행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내가 큰 피해(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크게 분노하면서 그 분노의 감정에 매몰될 때도 많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 자신의 분노를 어떻게든 표출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분노는 미움이 되고 응어리가 되어 우리 마음에 남아 용서를 어렵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서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혹은 더 나아가서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들이 용서를 더 어렵게 만든다. 용서는 가해자가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제공하고 피해자에게는 오히려 죄책감만 더한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어떻게든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사과하고 용서해 달라고 빌게 만들어야지,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용서해야 한다는 짐까지 지게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용서는 기득권자들이 계속해서 가해 행위를 하기 위해 피해자들에게 강요해 온 악덕이라고도 말한다. 사회 정의나 피해자의 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존중되어야 한다는 오늘날 이런 주장들이 힘을 얻으면서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왜곡되고 오해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용서가 어렵다.

‘어렵다’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그 기저에 있는 본심은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용서를 하고 싶은데 어려워서 그게 잘 안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는 용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용서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이다. 용서보다는 할수만 있다면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 처음 시간에 말한 것처럼 죄악된 본성의 특징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는 그것을 ‘죄’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용서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용서는 원래 어려운 것이니까 못할 수도 있고 혹은 안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려운 것을 불가능과 같은 의미로 슬쩍 사용한다.

용서가 오해되고 오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용서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용서가 어렵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용서는 쉬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로서 하나님 닮은 용서를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용서하는 것 자체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드러낼 수 있고, 그것이 우리가 가장 원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닮은 용서는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오늘은 요셉과 빌레몬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 그럼 무엇이 이 어려운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

하나님 닮은 용서의 예시

먼저 하나님을 닮은 용서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정리해보자. 용서에 대한 확고한 의지, 죄에 대한 분명한 태도, 그리고 회개를 통한 온전한 회복이다. 이 세 가지를 요셉의 용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셉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30장이다. 그의 아버지 야곱은 두 아내를 두었는데, 레아와 라헬이었다. 레아와 라헬은 친자매였는데, 본래 야곱은 라헬을 사랑해서 그와 결혼하려고 했었지만 외삼촌인 라반에게 속아서 레아와 먼저 결혼하게 되었고 후에 라헬과도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레아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한 것이고 라헬은 사랑해서 결혼을 한 것이니, 결혼한 후에도 야곱은 라헬을 더 사랑했다. 그러다보니 레아와 라헬 사이에는 긴장감이 있었고 그들은 서로 시기하며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것은 아들을 낳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레아는 아들을 넷이나 낳았지만 라헬은 그러지 못했고, 그러자 라헬은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라고 말할 지경이 되었다(창 30:1). 그러면서 라헬은 자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하고, 이에 질세라 언니 레아도 자기 여종을 주어 아들을 더 낳게 한다. 결국 라헬도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요셉’이었고 이는 ‘더한다’는 뜻으로 또 다른 아들을 원하는 마음이 담긴 이름이었다. 후에 라헬은 요셉의 동생인 베냐민을 낳고 죽게 된다.

이런 역사가 있었으니, 기본적으로 요셉과 다른 형제들 사이가 좋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 거기에 더해서 아버지 야곱은 형제들 중에서 요셉을 편애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더 사랑했던 아내가 어렵게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창 37:3).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아픈 손가락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녀들 중에서 더 마음이 가고 하는 자녀가 있을 수는 있다.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했던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를 할 수는 있지만, 문제는 야곱이 실제적인 차별로 아들들을 대했다는 것이다.

야곱은 요셉에게 특별한 옷(채색옷)을 지어 입혔다. 이것은 단순히 요셉에게만 더 예쁜 옷을 입혔다는 의미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야곱은 요셉을 상속자, 형제들 중의 리더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한 옷을 입히고 또한 형제들을 감독하게 했던 것 같다. 창세기 37:2를 보면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요셉이 철없이 고자질을 했다기 보다는 아버지에게 형들의 잘못을 보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뒤에서 야곱은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요셉을 보내는데 이것도 단순 심부름이기 보다 요셉을 통해 형들을 관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쨌든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요셉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고 알 수 있었다(창 37:4). 그래서 그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 요셉의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결국 요셉이 형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요셉의 꿈 이야기는 형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게 만들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일까? 부모들과 요셉이 가해자고 다른 형제들이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형들은 이렇게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이 당연했을까? 그들의 부모가 그들에게 했던 일은 분명 죄의 문제였고, 요셉의 경우는 그의 동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혜롭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런 것들 때문에 그들이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분노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이기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모두 용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처럼 용서하려고 했다면, 그들에게 저질러진 잘못을 바로잡고 그들의 삶도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용서가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 그들에게 용서하라고 권면했다면 자기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차별을 당하며 불합리한 일을 견뎌야했는지에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들의 경쟁으로 인한 어린시절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부의 영향이 미움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요셉의 형들은 미워하기를 선택했다. 용서하고 회복하기보다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복수하기를 선택했다. 아버지는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동생 요셉은 어떻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창 37:18-20). 그러다가 조금 자비를 베풀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들은 속이 시원했을까? 그렇게 복수하니 이제는 공정해진 것 같고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요셉이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면서 그의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요셉은 과거의 일을 언급하지도 않았지만 이들은 베냐민 얘기가 나오자 바로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를 무자비하게 대했던 과거에 대해서 후회하는 말을 했다. 이들이 지금까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미움과 복수는 순간적으로는 후련함을 줄 수 있지만 궁극적인 평안을 주지는 못한다.

여튼 그렇게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게 되었다. 그렇게 13년을 보내고 그가 30살이 되었을 때 그는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7년의 풍년이 지나고 흉년이 시작된 2년 후 그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게 되었다(창 42:6). 17살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2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기 앞에서 엎드려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요셉은 어떻게 했을까?

내가 요셉과 같은 상황이었다고 생각해 보라. 피해를 당했던 내가 가해자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대로 가해자에게 행할 수 있다. 형들에 대한 미움과 응어리, 원한이 있다면 그것을 풀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동안 복수의 칼을 갈아 왔다면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과거에 내가 겪었던 고통에 이렇게 보상하시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복수할 마음이 있었다면 복수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누구든 요셉의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요셉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요셉의 선택은 한마디로 의아하다.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이라고 의심하면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결국 시므온 한사람을 남기고 나머지 형들을 양식과 함께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올 것을 명했다. 뭔가 복수라고 하기에는 좀 소심한 것 같고, 그렇다고 용서했다고 보기에도 석연치 않다.

복수를 하려면 형들에게 다 사형을 선고하거나 아니면 평생을 감옥에 가둬두어야 할 것 같다. 아니면 형들을 노예로 삼아 자신의 성공한 모습을 보게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잔인한 복수를 주제로 한 영화라면 일정 간격을 두고 형들 스스로 죽일 사람을 선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버림 받았던 고통을 형들이 스스로 느끼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소한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고 무슨 낯으로 자신에게 양식을 구하냐면서 형들을 그대로 쫓아냈을 것이다.

반대로 용서를 하려면 그냥 깔끔하게 자기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형들에게 알리고 지난 일은 다 잊고 이제 다시 함께 잘 살자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할 것 같다. 그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경의 ‘무조건적인 용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은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일을 복잡하게 한다.

이 애매모호함과 복잡함은 요셉이 하나님 닮은 사랑과 공의로 그의 형들을 용서하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요셉의 행동을 보면 그는 분명 처음부터 형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용서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형들을 보고 분노하지도 않았고, 최소한의 억울함이나 미움을 표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형들이 자신을 버린 일에 대해서 후회하는 말을 할 때 요셉은 터져나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따로 울고 돌아오기도 했다(창 42:24). 요셉은 베냐민을 만났을 때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창 43:30).

요셉은 형들이 회개를 했나 안했나 간을 보고 있던 것이 아니다. 처절하게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면 정상참작을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대로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형들을 시험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그 마음으로는 형들을 용서했다. 다만 죄의 문제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고, 그래서 형들이 그들의 죄를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회개했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자신이 그들을 공적으로 용서하고 온전한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복수가 아닌 용서를 원했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죄를 그냥 묵인하지는 않았고 형들의 회개를 통해 함께 회복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하나님 닮은 용서의 과정을 밟은 것이다.

결국 창세기 44장에서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요셉의 노예가 되어 그의 죄값을 대신 치르겠다고 진심으로 말했을 때, 요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을 드러냈다(창 45:1-3). ‘이 정도 했으니 이젠 용서해줘야지’가 아니었다. 요셉은 아마 그 전에도 빨리 자신을 드러내고 용서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용서가 “저는 이미 용서했으니까, 형들은 회개하든 하지 않든 맘대로 하세요”라는 식으로 형들에게 면죄부(면책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용서할 때가 되었을 때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아무 상처가 없었을까? 그에게는 용서가 쉬웠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그와 같은 어려움은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17세의 나이에 자신의 형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갔다. 심지어 형들은 원래 그를 죽이려고 했었다. 창세기 42:21을 보면 그때 요셉은 형들에게 “애걸”했었다. 왜 안그랬겠는가. 얼마나 그 상황이 두려웠겠는가. 살려달라고. 다시는 형들에 대해서 나쁜 말하지 않겠다고 울며 매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형들은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매정하게 은 20을 받고 동생을 노예로 팔았다.

그후의 삶이 평탄했던 것도 아니다. 요셉은 그후 13년을 노예로 또한 억울한 죄수로 보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면서 그에게 은혜를 주셨지만, 인간적인 기준에서 복 받은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삶을 그는 살아야했다. 마침내 요셉은 그 인고의 시절을 다 보내고 애굽의 총리가 된 후 첫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므낫세”라고 하였다. 그 뜻은 “잊어버림”인데, 그 이유를 요셉은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라고 설명했다(창 41:51).

사실 잊을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요셉에게 있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상처를 가려두었을 뿐이다.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이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잊게하신 그 일들이 다시 생생하게 그 눈 앞에 펼쳐지지 않았을까? 이 정도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형들을 용서한다고 하면 아마 오늘날의 심리상담가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용서하려고 하는 그 모습 자체를 비정상적으로 볼 것이다. 자신을 파괴하려는 행동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용서하기를 선택했고 결국 형들을 회개로 이끌어 참된 회복으로까지 나아갔다. 계속 말하지만 그게 쉬웠던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어렵지만 가능했던 일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의 마음 중심에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닮은 용서의 동력

용서에 대한 말씀 첫시간에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용서가 아닌 복수라는 얘기를 했었다. 마음 중심에 내가 있는 죄의 특성상 그것이 당연하다.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 중심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하나님을 닮은 용서로 드러낸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세상 가운데 드러낼 수 있는 차이다.

요셉이 정확히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드러내면서 형들에게 했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45:4–8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한다. 용서를 하면서도 형들이 나에게 악한 일을 했지만 내가 넓은 아량으로 형들을 용서해줄게라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섭리로 이끄셨음을 분명히 하며,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 형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까지 말한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니 원수도 더 이상 원수로 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형들은 불안해졌다. 혹시라도 그동안은 요셉이 아버지 때문에 자신들을 용서한 척, 잘해주는 것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세상의 복수에 익숙한 형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악을 행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경우 일반적으로 복수를 당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꾀를 내어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다.

50:16–17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아마 야곱이 진짜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면 형들을 통해 요셉에게 말할 이유가 없다. 요셉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기회도 충분히 있었다. 형들은 자신들이 살기위해 요셉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마 요셉도 조금만 생각을 해봤다면 이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에게 아버지가 형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형들을 용서했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라 이미 훨씬 전에 형들을 처음 다시 만났을 때부터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했다. 또한 그들이 회개를 나타낼 수 있도록 도와서 회복에도 이르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는 형들을 보며 요셉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울었다.

그런데 형들은 한술 더 떠서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다.

50: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용서를 알지 못하는 형들은 어떻게든 요셉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형들은 한참을 잘못생각하고 있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공의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요셉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은 다르게 하면 만약 요셉이 용서하지 않고 분노하면서 스스로 보복하려고 했다면,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한 것이 되는 셈이라는 의미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내가 피해자이기에 용서의 권리도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뭔데 나에게 용서하라 말아라라고 말하냐고 한다. 왜 내 자리를 하나님이 대신하려고 하냐고 묻는다. 누가 중심에 있느냐에 따라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중심에 있으면 성경의 명령은 어려운 것이 되고 사실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런 명령을 받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애초에 내가 재판하고 심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는 용서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재판하는 것으로 하나님 닮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것으로 하나님 닮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이어서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기서 우리는 다시 요셉의 용서가 하나님을 닮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셉은 죄를 그냥 용인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는 본래 “당신들은 악을 꾀하였으나”의 의미다. 즉, 요셉은 형들이 했던 일이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럴 수도 있었던 일 정도로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행한 일이 ‘악’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도 역사하셨음을 말한다. 형들이 행한 일 자체는 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악을 선하게 사용하셨다. 그러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좀 더 수월하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온전한 회복에 대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의 형들에 대한 감정이 지금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는 없다. 여전히 형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나고 함께 교제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 그랬기 때문에 형들은 아버지의 사후에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현시점에서 요셉의 감정이 어떠한지 우리는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요셉의 약속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악을 선으로 갚겠노라고 약속했다. 형들 뿐 아니라 그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약속했다. 형들은 어떻게 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요셉은 자신의 입장에서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 닮은 용서를 베풀 수 있었고 그 동력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마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요셉은 우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도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율법도 주어지지 않았을 때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하나님 닮은 용서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것이 그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에게 있어 용서는 조금 더 쉬운 일이 되어야 맞다. 최소한 요셉보다 우리가 용서를 잘 하는 것이 정상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중심에 실제로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그래서 용서받은 자는 용서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용서는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이제 빌레몬서의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해 보자.

하나님 닮은 용서의 권고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이라는 성도에게 쓴 개인적인 편지로서, 그가 감옥에서 전도하여 구원 받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아마도 빌레몬의 돈을 훔치고 도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 로마법에 따르면 빌레몬은 오네시모에게 자신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형벌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를 고문하고 죽게 만들 수도 있었고 아무리 관용을 베푼다고 해도 매질 정도는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었다. 이마에 도망자 낙인을 찍어 다시는 도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법적인 관행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런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그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형제로서 받아주고(16절) 마치 바울을 영접하듯이 영접해 줄 것을 권했다(17절). 한마디로 그를 용서해주기를 권고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편안한 상황이 아니다. 먼저 빌레몬에게 가장 그러했을 것이다. 오네시모로 인해서 그가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는 손해를 봤다. 기본적으로 경제적 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또 빌레몬이 애초에 악한 주인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런 자신의 돈을 훔쳐서 도망한 것에 대한 서운함과 억울함, 분노도 빌레몬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또한 돌아온 오네시모를 특별한 징계 없이 그냥 받아준다면, 그것이 다른 종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위험도 있었다. 오네시모를 용서하기 위해서 이 모든 손해와 위험을 빌레몬이 감수해야 했다.

오네시모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주인인 빌레몬을 다시 찾아간다는 것은 도망한 노예로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았다고 해도 도망한 노예들에게 주인들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빌레몬이 어떤 벌을 내리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오네시모는 빌레몬과의 일은 잊어 버리고 그냥 바울을 도우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둘 사이의 중재자가 된 바울도 편안한 상황은 아니었다. 빌레몬에게는 모든 손해를 감수할 것을 말해야 했고 오네시모에게도 내키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냥 적당히 빌레몬에게 편지만 보내서 오네시모가 지금 자신과 함께 있으니 마음 풀고 혹시 나중에 보더라도 뭐라고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굳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었다.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을 했다. 그냥 대충 좋은게 좋은거지하면서 죄의 문제를 덮어 두는 것은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 있었던 일은 드러내서 치유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와 용서를 통해서 회복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했다.

이것을 위해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로 먼저 돌아가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으니 다 끝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이킨 그는 빌레몬에게로도 돌아가야 했다. 마치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던 것 자체가 회개의 증거가 되었던 것처럼, 오네시모가 위험을 무릎쓰고 빌레몬에게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그가 회개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었다. 아마 오네시모는 망설였겠지만 바울은 그것이 옳다고 그를 설득했을 것이고, 오네시모는 그에게 순종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빌레몬을 찾아 갔을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빌레몬의 용서다. 그래야 회개를 통한 온전한 회복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일부러 빌레몬에게 보냈다.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직접적으로 “용서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분명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하나님 닮은 용서의 나머지 두 모습을 보일 것을 요구한다. 바로 용서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죄에 대한 분명한 태도다.

용서하는 것이 빌레몬에게 마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다른 서신에서 바울은 그렇게 믿는 자가 마땅히 어떠해야함을 교리적으로 풀고 그렇게 할 것을 명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8–9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

명령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참된 용서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바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4절에서는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이 기꺼이 그렇게 용서할 것에 대한 확신도 표현했다.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이렇게 기꺼이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영접해 줄 것은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구했다(17절).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서, 바울이 그러라니까 용서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한 분노를 다 풀고 나서 괜찮아지면 용서하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용서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을 바울은 권고한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한 일에 대해서 그냥 잊으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 손해는 감당할 수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오네시모가 회개하고 빌레몬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에는 어떤 식으로든 손해에 대한 배상을 하겠다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용서해줄거면 나한테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말라는 식으로 뻔뻔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오네시모 자신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상태였기에 바울은 만약 빌레몬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면 자신이 갚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용서하는 빌레몬이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면서도 그 빚을 갚게할 수도 있었고 혹은 그 빚까지도 탕감할 수 있었다. 그런 죄의 결과까지도 빌레몬이 감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바울은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바울의 이 말에 빌레몬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궁금하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빌레몬은 바울이 그 짐을 지게 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이 지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죄를 간과하신 것이 아니라 대신 죄의 짐을 지셨던 것처럼, 빌레몬도 하나님 닮은 용서를 그렇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면에서 그리고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바울의 이 편지는 굉장히 정중하게 쓰여졌지만 폭력적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결국 피해자인 빌레몬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것으로 읽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못한 것은 오네시모인데 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을 강요하느냐고, 왜 가해자 편을 드냐고 바울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빌레몬에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편지를 쓰는 바울은 빌레몬이 용서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편지 곳곳에 묻어난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바울은 빌레몬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분명한 증거가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통해 드러났다.

4–7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에게 마땅히 용서하라고 명할 수도 있었다(8절).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가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 줄 것을 확신했다. 빌레몬은 용서받은 사람이었기에 용서하는 사람임을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고 그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될 것에 대해서 말한다(20절).

빌레몬은 가진 자로서 용서가 쉬울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진 자는 복수할 힘도 있기에 용서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것과 관계없이 빌레몬은 용서받은 자로서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렇기에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는 폭력적이지 않다. 용서를 말하는 것은 또 다른 가해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죄를 덮어둘 때가 아니라 회개하고 용서할 때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신다.

적용: 하나님 닮은 용서, 어렵지만 가능하다

3시간에 걸쳐 용서에 대한 말씀을 나눴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불편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해서 피하기만 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바울이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불편한 자리로 이끌지 않았다면 그들은 회복의 기쁨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렵고 불편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닮은 용서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차이다.

용서가 쉽지 않다.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계속 기억해야 한다. 사탄은 어려우니까 하지 말라고 한다. 어려운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속임수다. 우리가 버려야할 세상의 초등학문이다.

2:6–8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짐을 대신지셔서 용서할 수 있게 하신 자들이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런 우리에게도 여전히 용서는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짐을 날마다 지고 계신다. 그렇게 우리가 더 하나님을 닮게 하신다. 용서만큼 하나님과 같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없다.  하나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두어, 내 짐을 대신 지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남을 짐을 대신 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