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둠만이 나의 친구일 때

본문: 시편 88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중 ‘탄식시’로 분류되는 시편들이 있다. 시편의 약 1/3을 차지하는 이 시편들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고통 중에서 탄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읽다 보면 ‘하나님 믿는 사람이 이렇게 기도해도 되는건가’ 싶은 의문이 들기도 할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담대하게 표현하지만 계속 읽다 보면 “그러나(오직) 나는”과 같은 표현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도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대부분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감사의 서원을 드릴 것에 대한 소망으로 마무리된다.

시편 88편도 탄식시로 분류되지만 분명한 특징이 있다. 바로 “그러나 나는”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편에는 그런 분명한 신뢰의 표현도 없고, 찬양과 감사는 더더욱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시편 중 가장 슬프고 우울하고 어두운 시편이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메시아적 예언을 담고 있는 시편 22편의 전반부가 이와 유사한 분위기이지만, 88편이 훨씬 더 절망적이다. 시편 22편은 지금의 고통을 말하지만 88편은 지금까지의 고통을 말하기 때문이다.  긴 고통의 시간 끝에 시편 88편의 저자인 헤만은 더 이상의 어떤 소망도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시편 39편도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88편만큼은 아니다. 88편에서 헤만은 계속해서 죽음과 어둠에 대해서 말하고, 심지어 마지막 절인 18절의 마지막 단어가 ‘흑암’, 즉 어둠이다. 이 기도의 결론이 어둠인 것이다.

성경에서 시편 88편과 가장 유사한 말씀을 찾으라면 욥기에서 욥이 했던 말들일 것이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표현했고 어떤 소망도 발견하지 못했다.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던 그는(욥 1:21), 자신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며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다(욥 3장). 그를 위로하던 친구들은 그를 정죄하는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답답함과 절망으로 그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욥의 입장에서는 그가 평생을 믿고 섬겨왔던 하나님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시고 마치 그의 원수인 듯이 행동하셨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처럼 죽어가는 자신의 결말을 이해하지 못했었고, 시편 88편의 헤만도 정확히 그렇다.

헤만은 시편 23편의 다윗의 표현에 따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고, 지금 그 끝, 즉 사망에 다다랐다고 느끼고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언급한 다윗은 아마 그 당시에는 푸른 풀밭에 있었을 것이다. 푸른 풀밭에서는 높은 봉우리도 보이고 낮은 골짜기도 보인다. 그 어느 곳이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골짜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골짜기가 깊고 길수록 어둠도 짙어진다. 봉우리도 보이지 않고 풀밭도 보이지 않는다. 그 상황에 매몰되기 쉬운 것이다. 그렇게 외부의 어둠이 짙어질 때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내면의 어둠이 시작된다.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견디기 힘든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주변의 상황이 아무리 어두워도 빛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식시의 기도는 ‘하나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언제까지 멀리 계십니까. 언제까지 숨어계십니까’와 같은 내용이 많다. 외적인 상황이 달라지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편 88편을 기록한 헤만은 지금 그런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깊은 골짜기의 어둠 가운데 있다.

저자로 언급된 헤만은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표제에서 그는 “에스라인”으로 소개가 되는데,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세라의 아들(자손)이라는 의미이거나 토착민(본토민)이라는 의미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헤만”이란 이름은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모두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노래하는 자로서 아삽, 에단과 함께 언급된 인물일 것이다(대상 15:19). 우린 아삽의 시편을 봤었고 89편에서 에단의 시편도 보게 될 것이다.

헤만이 언제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 알 수 없다. 역사적인 시점도 알 수 없고, 그의 생애에서 언제 이런 상황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정확히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상황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그에 따른 그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이 시편의 마지막 구절이다. 개역개정은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라고 번역했는데, 대부분의 다른 한글 번역은 “내가 아는 자는 어둠뿐입니다.”, “오직 어둠만이 나의 친구입니다”와 같이 번역했다. 그가 걷고 있는 사망의 깊은 골짜기에서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둠 뿐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어둠 만이 그의 곁에 있었고 어떤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기록한 것이 시편 88편이다. 먼저 시편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고 그 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시편 88편에는 주께 부르짖었다는 표현이 1, 9, 13절에 나오는데, 비슷한 의미이지만 모두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를 중심으로 1-8절에서는 시편 기자의 고통을, 9-12절에서는 시편 기자의 변론을, 그리고 13-18에서는 시편 기자의 혼란을 볼 수 있다. 먼저 고통을 살펴보자.

고통(1-8절)

88:1–2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1-2절의 내용은 사실 다른 시편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편에서 특별한 것은 이 부분이 이 시편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는 표현이 그렇다. 이 시편 전체를 읽어보면 헤만은 계속해서 “주께서”라고 말한다. 즉 그의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에서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주야로 그렇게 한다. 밤낮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니, 쉬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이다. 이 고통의 시간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15절(“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평생을 그렇게 고난 당한 것이 아니고 과장법이 사용된 것이라고 해도, ‘평생’이라고 느낄 정도로 오랜시간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간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으면 기도도 달라진다.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뭐든지 해주기만 하시기를 구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 하다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기도 한다. 헤만이 이 시점에게 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88: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하나님께서 들어주기나 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사실 이 시편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구하는 내용은 이것이 유일하다. 오랜 하나님의 침묵에 이제는 무엇을 구하기보다 그저 하나님께서 내 말을 들어주시기만해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구원은 사실 다음 문제다. 그러면서 이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

88:3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여기 “가득하다”는 표현은 대부분의 맥락에서는 “만족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음식이든 하나님이든 좋은 것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오직 재난이 그에게 가득하다. 그렇게 재난과 고통이 가득한 그의 삶은 당연히 산 자보다는 죽은 자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구약에서 ‘스올’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옥’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지옥은 심판의 장소이지만 스올은 꼭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스올은 죽은 자의 세계로서 ‘죽음’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래서 문제는 스올로 내려가느냐 마느냐 자체라기 보다는 어떻게 내려가느냐다. 충분히 삶을 누리고 평안히 내려가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괴로움과 슬픔 가운데 스올로 내려가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심판을 받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이 곧 ‘악인’의 전형적인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55편 15절을 보면 악인을 저주하면서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어진 삶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곧 심판이었던 것이다.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의롭게 사는 삶 가운데 거의 넘어질 뻔 하였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이었다. 그 형통함에 대해서 그가 언급한 것 중 하나가 죽는 모습이었다.

73: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이런 고통 없는 죽음은 악인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말은 곧 의인에게 고통스러운 죽음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욥도 그랬고, 시편의 다른 저자들도 그랬고, 여기 헤만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정말 ‘소망’ 없는 사람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부활에 대한 확신이 아직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이 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 더구나 고통이 길어지고 죽음이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은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욥의 말들을 보면 그는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가 되어서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부활에 대한 소망도 막연할 뿐 분명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헤만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88:4–5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헤만은 자신을 점점 더 죽음과 가까이 묘사한다. 3절에서는 스올에 가까웠다고만 했는데, 4절에서는 이미 무덤에 내려가고 있고 힘없이 축쳐진 시체와 같이 자신을 묘사한다. 5절은 그가 원하는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그는 죽임을 당하여 죽은 자 가운데 던져졌다. 실제로 누군가가 그를 살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죽음이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같은 고통 속에 있다.

그리고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다. 그런 고통스러운 죽음은 악인의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 하나님께서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실 자들이 죽음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헤만은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에게 하고 계신 일을 이렇게 묘사한다.

88:6–8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이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하나님도 이런 고통이 헤만에게 미칠지는 모르셨을까? 그럴 수 없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난 일은 없다.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욥은 끝까지 이해못했던 고통의 원인이 욥기의 시작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허락’이라는 표현으로 조금 뉘앙스를 낮추기는 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셨으면 욥은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이다. 욥을 고통스럽게 하신 것이다. 욥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을 때 응답하지 않으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욥에게 어떤 고통의 이유도 설명하지 않으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선하신 뜻 가운데 그런 일들을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고통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고통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나쁜 일’에서 하나님을 보호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분명 ‘모든 일’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이고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있었던 헤만은 이런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노하시고 자신을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만이 보였다. 더 이상 하나님이 그의 편에 계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의 친구들에게 그는 ‘가증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혐오스러워서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의 친구들이 그들을 비방하거나 정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여기 표현을 보면 그것보다는 헤만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그 친구들은 두려워서 그를 피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헤만이 나병에 걸렸을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원인이 있을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의 친구들이 그를 떠났고 그도 갇혀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저히 어둠 가운데 홀로 버려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이 놀랍게도 헤만을 원망과 불평으로 몰고 가지 않았다. 오히려 헤만은 그렇기에 여전히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유일한 해결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노를 거두시는 것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간절함을 호소하며 하나님께 변론한다.

변론(9-12절)

88:9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눈이 쇠하였다는 것은 눈에만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하고 활력이 없는 상태를 묘사할 때도 성경은 종종 눈이 어두워졌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활력이 없고 몸이 약해졌음을 나타내는 숙어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런 상태였지만 그가 여전히 하는 일이 있다. 바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도움의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1절에서는 “주야”로 그렇게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매일” 그렇게 한다고 한다. 이 고통이 지속된 만큼 쉬지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이다. 어떻게 해달라는 요청은 없다. 다만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음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면서 헤만은 변론하며 하나님께 묻는다.

88:10–12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헤만는 하나님께 무엇이 좋은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이 질문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죽음에 대한 관점에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욥과 같이 헤만도 지금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욥의 친구들처럼 누군가 헤만에게 “네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거야”라고 말했다면 헤만은 충분히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에게 원수처럼 행하고 계시지만, 헤만 자신은 하나님께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기 원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세상의 사람들에게 선포하길 원한다. 하나님의 공의를 알기 원한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악인처럼 죽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된다.

그래서 헤만은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 고통을 끝내주시고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 시편에서 직접적으로 그렇게 구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기도가 하나님께 닿기를 구할 뿐이다.

13-18절에서 헤만은 그런 자신의 소망과 함께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한다.

혼란(13-18절)

88: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주야로 매일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헤만은 매일을 그런 부르짖음으로 시작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새로운 아침이 되면 또 다시 기도했고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기를 바랐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나 나는”을 기대한다. 이제는 뭔가 찬송과 감사의 말이 나올 것 같다.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고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주를 높이겠다는 내용이 나올 것 같다. 성전에 들어가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는 내용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88: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여전히 그는 버림 받은 것 같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숨기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어찌하여(왜)”라고 묻고 있지만 답은 없다. 그리고 이 고통은 너무 오래된 고통이다.

88: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이 고통으로 인해 헤만은 두려웠고 또한 당황했다. 심란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그 마음에 평안이 없다. 그의 지금 삶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88:16–17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그로 인한 멸망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 아니라 원수의 것이다. 헤만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백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원수로서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심판 받아 멸망하는 하나님의 원수처럼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의 곁에 있어야할 사람들은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88: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이제 내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흑암 뿐이라는 말이다. 그의 곁에 아무 것도 없고 어떤 소망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이 이 시편의 결론이다.

교훈

이 어둠의 시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1. 신실한 자도 어둠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헤만이 이 시편을 언제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성전에서 예배 인도자였던  그가 결국은 이 어둠을 견뎌내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예배했는지, 아니면 이 시편이 그의 죽음 직전의 고백이었는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가 이 고통을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경험했다는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경험했다.

교회 나오고 예수님 믿으면 다 잘될거라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미끼 상품처럼 내걸고 예수님 믿으면 좋은 일만 있을 것처럼 사람들을 속여서 자기 배를 불리려는 사기꾼들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끝을 모르는 고통 앞에서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왜 신실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에게 고통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신실한 사람도 어둠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예는 당연히 예수님이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신실하셨던 예수님은 겟셋마네의 어둠을 견디셔야 했고 십자가 위에서 어둠을 견디셔야 했다. 그리고 그분의 종인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

어둠의 시간은 우리에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 저는 신실하게 사는데 왜 이런 일만 저에게 일어나나요라고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실함과 어둠은 반비례 관계에 있지 않고 정비례 관계에 있지도 않다. 그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내가 끝까지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둘째 교훈으로 이어진다.

2. 어떤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한다.

어둠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아니, 항상 그럴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선에서의 어둠은 우리가 어둠이라고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헤만이 경험한 어둠은 그를 두렵게 했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고통스러웠고 외로웠다. 그의 삶이 헤피엔딩이 아니라 새드엔딩으로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런 깊고 긴 어둠의 골짜기에서 그가 했던 것이 바로 기도였다. 그가 선택했던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야로 기도했고 밤낮으로 기도했다. 절망적인 하루가 또 지나면 아침에 일어나 다시 기도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낙심했겠지만, 단 하나 구원의 하나님은 잊지 않았다. 그래서 기도했다. 그의 마음 속에 좌절과 낙심, 두려움 등의 어쩌면 옳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며 그 복을 거두시면 욥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셨을 때 욥은 고통 중에 많은 말들을 했지만 하나님을 욕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고통 중의 말이었지만 그는 하나님께 나아갔다.

이것이 긴 어둠의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해야할 일이다. 이유는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이 어둠을 주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바로 잡으시려고 어둔 골짜기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때로는 우리를 더 자라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다. 우리의 어둠을 통해 누군가를 세워주기 위해서,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신다.

우리가 그것을 다 알 수 없다. 특히나 지금 어둠의 골짜기를 걷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을 안다고 우리가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빛이신 하나님께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의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실 것이다. 물론 그게 언제일지는 하나님께 달린 문제다. 어쩌면 우리의 바람과 다르게 이 땅에서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수도 있다. 헤만도 어쩌면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헤만이 염려했던 것처럼 영원히 하나님께 잊혀진바 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와 관계없이 그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끊임없이 찬송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둠이 시편 88편의 결론일수는 있지만 헤만의 결론도 아니고 우리의 결론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둠을 아신다. 우리와 우리의 어둠을 하나님은 주권적인 손 안에 두시고 우리에게 그분을 신뢰하며 따라오라 하신다. 다윗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헤만의 고백처럼 어둠 만이 나의 친구일 때, 멈추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