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알・찬・신・비

본문: 로마서 11장 25절~36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제목은 ‘알아두면 찬양하는 신비한 비밀사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신비”를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 신비는 자연스럽게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신비를 알면 자연스레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신비, 우리를 찬양하게 만드는 신비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과 관련해서 복습을 하면 바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실패와 미래의 회복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겸손하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본성을 거스르는 너희, 원가지가 아닌 너희를 구원하셨다면 원래 가지였던 이스라엘은 얼마나 더 확실하게 구원하시겠는가!’(24) 그러니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와 회복,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이 신비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지만, 계시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구체적으로 신비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실패와 회복을 “신비”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지금의 이스라엘을 보면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우쭐하지 않도록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바울은 지금 말하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신비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옛날 개역한글 성경은 이 “신비”를 “비밀”로 번역했었습니다. 다른 성경들을 보니까 신비로 번역하기도 했고 비밀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은 둘 다는 사용해서 “신비한 비밀”이라고 번역합니다.

바울이 신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3단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비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살펴보는 것입니다. 1단계는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를 제외하고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1단계는 이스라엘의 실패라 할 수 있습니다.

2단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옵니다.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2단계는 이방인의 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실패는 지속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는 기간이 정해져있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3단계는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나님이 정하신 충만한 수의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후, 이스라엘의 우둔함은 제거될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한명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전체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3단계 이스라엘의 회복이 되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저절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각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신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이 주인공으로 무대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 자리를 이방인이 대신하게 되고 이스라엘은 무대 바깥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다시 무대 중심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연출하시는 ‘인류 구원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고 하나님의 부요와 화목이 세상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이 되면 이스라엘의 실패는 회복으로 바뀌고 하나님의 버리심이 하나님의 받아들이심으로 바뀔 것입니다. 찍힘을 받아 꺾인 원가지는 다시 접붙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신비를 왜 확신할 수 있는지 그 근거 세 가지를 말합니다. 신비를 알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근거는 성경입니다.

11:26 …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11: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구약 성경, 이사야가 기록한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신비는 성경을 근거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구원자가 오시는데, 그 구원자가 오셔서 하시는 일은 그들의 죄를 없이 하는 것이고 경건하지 않은 것에서 그들을 돌이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것이지만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 구원자가 오십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오해하고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실패를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회복을 이루실 것입니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바울이 생각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성경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근거는 택하심입니다.

11: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둘씩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하면’과 ‘택하심으로 하면’입니다. ‘너희로 말미암아’와 ‘조상들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리고 ‘원수 된 자’와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기준으로 이스라엘을 말하면 어떻습니까?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과 달리 복음을 거절한 이스라엘은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된 자입니다. 복음을 대적함으로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거절하는 상황, 지금의 이스라엘을 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꺾인 가지이며 버림받은 자이며 찍혀서 잘려나간 나무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택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그 자손에게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함께 생각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이 가지는 특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습니다(9:4).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부르시고 허락하신 것들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현재 이스라엘의 상태, 하나님과 적대적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이것을 신비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고 하나님의 택하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라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구원의 계획, 그 과정과 방법을 통해 ‘신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을 거절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그러한 이스라엘의 실패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 이방인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십니다. 또 때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회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세 번째 근거는 긍휼하심입니다.

11: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짝이 되어서 대칭이 되는 말씀입니다. 교차대구법이라고 하는데 이방인의 불순종과 이스라엘의 불순종, 이방인이 긍휼을 입은 것과 이스라엘이 긍휼을 얻는 것이 짝이 됩니다.

여기서 보면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순종하지 않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관계없이 모두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관계없이 순종하지 않는 그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의 상태로 가두어 두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불순종으로 인해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불순종은 마치 감옥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힌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고 풀어줄 때까지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자유도 없고, 미래도 없고, 소망도 없고, 그렇게 갇혀진 상태로 있다가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인해 갇힌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 감옥에서 우리를 풀어줍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주십니다. 모든 사람이 불순종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처벌을 위해 감옥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감옥을 사용하십니다.

32절 말씀은 잘못된 해석이 나오기 쉬운 주의가 필요한 말씀입니다. 특히 구원의 보편주의, 만인구원론 이라고도 하는데 믿든지 믿지 않든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결국은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의 근거로 이 말씀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맥을 떠나서 이 구절만 가지고 이해하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32절 말씀이 있기까지 바울은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구절에서도 이방인의 불순종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모든 사람이 의미하는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두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셨다는 사실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로마서이 주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먼저는 유대인이고 그리고 이방인입니다. 순서는 있지만 차별은 없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기에 우리는 이 신비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유대인을 사용하셨고 유대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방인을 사용하십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불순종했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찬양입니다. 신비는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신비를 알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구원하시는 신비, 그 신비는 성경을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나님의 택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택하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실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긍휼하심은 모든 사람을 향한 차별 없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주신 이 신비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그 놀라운 구원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을 말하고 그 신비를 설명하지만 구원의 신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감탄하며 그분을 찬양하게 됩니다.

정말 멋진 풍경이나 뛰어난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솜씨를 생각하고 그분을 크심과 지혜를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성취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찬양은 세 번에 감탄이 나오고 세 번에 질문이 나오고 세 번에 선언이 나옵니다.

먼저 세 번의 감탄입니다.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 성경은 생략하고 있지만 ‘오!’ 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깊고도 풍성한 지혜와 지식을 감탄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판단과 찾을 수 없는 그분의 길, 그분이 하시는 일을 감탄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성취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세 번의 질문입니다.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끝으로 세 번의 선언입니다.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며 그분의 능력과 사랑으로 유지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광대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께 충고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께 갚으심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없다’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 일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다 이해하고 다 설명할 수 있다면 그런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해와 지혜를 초월하신 분이시며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신비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 가까이 오셨고,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지혜가 어떠한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풍성한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경험하고 우리가 깨달아 알도록 하셨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측량할 수 없는 분이 자신을 제한하시고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셨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알아갑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 우리와 같이 되신 신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11:36 …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신비, 하나님이 알려주신 신비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입니다. 모든 영광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