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신앙생활의 핵심 – 하나님과의 관계 2
본문: 미가 6:1-8
설교자: 최종혁

미 6:1-8 [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2]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신앙생활의 핵심’이라는 주제로, 지난 번에 이어 두 번째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두 달 만의 설교이기 때문에 많이 잊으셨을 것 같아서 지난 번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신앙생활의 핵심은 교회에서 하는 어떤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에 참석하는 것과 봉사, 헌금, 전도 등의 일들은 모두 좋은 일들이지만, 그 일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없이 이뤄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가,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다시 그 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회복된 관계는 우리가 짓는 일상의 죄로 인해 다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3-5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변론하시는 장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인 율법을 괴롭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는가’하며 그것을 짐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왜 율법으로 옭아매십니까?’라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3)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4, 5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신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4). 하나님은 그들이 바로의 압제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해내셨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4). 뿐만 아니라 온유한 지도자 모세를 비롯한 인도자들을 세워주셨습니다.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갈 때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5). ‘싯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머물렀던 곳이고, ‘길갈’은 요단강을 건넜을 때 처음으로 머물렀던 장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요단강을 마르게 하셔서 백성들을 건너가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도 스스로에게 복음을 다시 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앎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주님을 더욱 닮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분은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끝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실하게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합니다(6-8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할 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6절과 7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질문은 진심어린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진지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앞에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에 대해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게 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셨다고 하시는데 정말 그렇습니까?”라는 반문입니다.

3절과 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내 백성아”라고 하시며 관계를 드러내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어디에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하면 만족하시겠습니까’라며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문하는 질문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첫째는 제물의 질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6). 구약의 여러 제사 중 번제는 제물을 완전히 태우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오늘날의 바비큐 파티와 비슷한데, 제사를 드리면서 그 일부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번제물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온전한 희생의 제사인 것입니다. 그것도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송아지는 태어난 지 7일만 지나면 번제로 드릴 수 있었는데 가장 좋은 제물이 일년 된 송아지였습니다. ‘번제물로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면 되겠습니까’라는 것은, 즉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물로 나가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7).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은 그 수가 얼마를 가리키냐와 상관없이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많은 양의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조금씩 과장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드릴 수 없는 제물을 열거하면서 이렇게 하면 기뻐하시겠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7). ‘맏아들’, ‘내 몸의 열매’는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질 좋은 제물과 가장 많은 양의 제물에 이어, 이제는 가장 소중한 제물인 자녀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암몬 사람이 ‘몰렉’이라는 신을 섬길 때 했던 의식으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아하스와 므낫세 왕 때 그런 예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레20:1-5에서 분명히 금하신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겠습니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많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을 들어 말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하나님께 너무나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게 여기는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드려야 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지 내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짐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드려도 만족하시 않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7절에 “내 허물을 위하여”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죄를 짓고 싶어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들을 마지못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죄의 결과로 인한 관계 회복에 초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죄에 대한 보상, 대가 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운 남편이 이를 보상하기 위해 아내에게 옷과 가방 등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죄를 짓는 일을 반복할 것입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마도 진심어린 사과와 회개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자신들의 죄를 무마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예배일까요?

시편 51편에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가지고 나온 사람의 고백입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6). 이 말은 하나님께서 제사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 없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다윗 역시 구약의 율법 아래 있던 사람인데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대조적으로, 율법을 짐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뒤 율법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1,12). 그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5).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번제를 드리고 어떤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께 용서를 빈다고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17-19).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먼저이고 제사는 그 다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보여야 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 때문에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눈물로 회개를 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다시 시작되는 한 주를 믿지 않는 자처럼 살아갑니다. ‘믿지 않는 자처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주 동안 죄를 짓고는 다시 주일에 교회로 돌아와 눈물로 회개합니다. 지은 죄를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보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삶인 채로 교회에 나가서 일하고 섬기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1:10-15).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 예배드리면서 삶 속에 악을 행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가리킨 사람은 당시 천대받던 세리나 창녀, 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롭다고 여기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위선을 견디지 못해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 ‘왜’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나오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가, 마음의 동기인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질 좋은 제물, 많은 제물, 가장 소중한 제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하나님께서 처음 율법을 주셨을 때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드리겠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아닙니까. 우리 자신을 빼고 나머지를 다 드리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 그 마음에서 나오는 진심어린 순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도를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다해 섬기는 것입니다(신10:12,13). 또한 그 명령과 규례는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후에 오는 순종,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때 진심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이 말씀에서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것, 즉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물고 뜯고 험악하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의 시작은 마지막 구절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에 있습니다. ‘겸손히 동행한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동행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걸어갈 때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걷는다는 것은, 내 맘대로 먼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그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는 것, 그가 어느 곳으로 갈 지를 주의하면서 걷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와 같이 걸으라는 것입니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 말은 곧, 그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거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그분께 겸손하게 순종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생활과 다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도, 죄악 중에 있는 사람도 모두 주일에 이 자리에 와서 앉습니다. 똑같이 예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주중에 죄를 범한 사람이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 더 많이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분명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고 행위로 일한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외식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각자의 마음을 살펴보고 ‘내가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고 있는가, 나의 죄의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을 때 마음이 아프고 어떻게든 회복하고 싶어하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일에 교회에 나오니까 됐다고, 주중에는 내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6:24). 여러분에게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고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순종을 원하십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기억하시고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당신이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하시고 당신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다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과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교회에 나오고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