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믿는자의 성화-죽음과 부활의 삶
본문: 로마서 6장 1~14절
설교자: 최종혁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유평교회의 목표는, ‘모두가 주님을 만나고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입니다. 지난달에 우리는 첫 번째 목표인 ‘모두가 주님을 만나고’에 해당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며’라는 목표에 맞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성화’라고 합니다. 성화는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롬6:1-14을 통해 ‘믿는 자의 성화-죽음과 부활의 삶’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은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거하기 위함이고,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하나님의 기준, 거룩함에 이를 수 없고, 우리 중에 다른 누구도 그런 능력을 대신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세상은 기쁜 소식(복음)이 아닌 절망적인 소식 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믿고 영접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끝내셨습니다. 우리는 할 수도 없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하나님이 먼저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행위로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은혜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의 복음이 로마서 1-5장까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을 어떻게 의롭게 하셨는지, 인간이 어떻게 칭의를 얻게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정죄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이것은 복음이 값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치르지 않았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 ‘은혜로 받는 구원’은 세상 어느 종교에도 없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종교도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신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이 신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고행을 하거나 그에게 무언가를 바쳐야 합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세상의 종교와 다르지 않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의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은혜로 받는 구원에 대해 말하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사해져서 의롭게 되었다면 이제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 아니냐’가 그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 중에는 ‘사람을 죽여도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묻습니다. 당연한 질문입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심지어는 ‘죄를 지으며 살면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으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더욱 죄를 지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 위와 같은 논리로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야 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료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6:2)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강한 부정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강하게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믿는 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논리적인 전개가 두드러집니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며 설명하겠습니다. 그는 ‘우리가 왜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느냐’에 대해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포하신 사람들로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분리’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됩니다. 최호의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해서 분리된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있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에 ‘나는 죽은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6:3). 여기 ‘세례를 받은 우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물로 받는 세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없고,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예수님이 실제로 함께 하시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 예수님과 합하여 예수님에게 잠겨있다(침례)는 것, 예수님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우리’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일은 ‘영적인 침례’입니다. ‘육적인 침례’, 즉 물로 받는 세례는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성도들 앞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교회가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인정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일어나는 일은 예수님과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 예수님 안에 있는 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표해 죄를 지어서 인류가 죄인이 되었듯, 예수님께서 인류를 대표하여 죄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순간으로 가서 우리도 죽은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 우리가 죽은 이유는 ‘새생명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데 그가 이미 다른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가진 생명이 죽어야 새로운 생명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기 위해, 죄에 대해 죽도록 하신 것입니다.

믿는 자의 새생명에 대해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이것은 기존의 무엇이 잘못되어서 고친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 고친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생명을 주셨습니다. 새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전의 삶이 죄를 따라 가고 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5).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도 그렇게 새생명을 얻은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6:6). 우리가 알고 있었지만 잊었던 사실은,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시간적인 표현이 아니라 ‘낡고 소용이 없어진 쓸데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런 쓸데없는 사람,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은 죽었습니다.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죄의 몸은 옛사람과 같은 의미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몸을 가리킵니다. 선을 행할 수 없는 사람, 죄의 몸이 죽었습니다. 반대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가 우리에게 아무리 무언가를 요구하더라도 그것에 순종하고 싶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기 전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 6:17).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고 새생명을 입은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빚을 졌는데 빌려준 사람이 그것을 담보로 나에게 이것저것을 시킵니다. 빚진 것 때문에 그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다 갚거나 다른 사람이 갚아줬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전에 빌려줬던 그 사람이 와서 이것저것을 명령하더라도 ‘나는 너한테 빚진 것이 없다’, ‘너는 나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6:8,9) 무한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지 상관없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무한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사망이 뭐라 할 수 없고 우리를 위해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10). 우리의 죄값은 단번에 영원히 치러졌습니다. 그 다음은 마침표입니다. 내가 더 죄를 지은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죄값이 치러짐과 동시에 죄의 모든 권세도 파괴되었습니다. 죄는 더 이상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하듯이 그와 연합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생명의 삶은 죄에 대해서 죽은 삶이고 하나님에 대해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에서 멀어져서 하나님께 향해 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제는 내 안에 죄와 옛 정욕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6:1,2)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올바른 모습, ‘성화’입니다.

그러나 나는 왜 여전히 죄를 범하고 때로 쓰러지기도 하는 것일까요? 아직 우리는 완전히 변화된 몸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죄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옛 기억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마치 콜라병에 물을 담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병에 아무리 새롭고 깨끗한 물을 부어도 그것은 예전에 콜라병이었기 때문에 그 냄새가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달라졌지만 육신은 예전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여전히 콜라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면서 되는대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제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11-13절에서 “여기라”와 “드리라”는 두 가지 명령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6장 11절은 로마서에 등장하는 첫 명령입니다. “여기라”는 말을 오해해선 안 됩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닌 것을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확실히 붙잡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여겨야’ 할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자이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있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이런 생각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염려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함으로, 영적인 진리를 확신하지 못하게 함으로, 진리를 듣고 그것을 곧 잊어버림으로 우리의 삶과 생각을 흐트려 놓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고 죄를 짓는 것이 즐거움을 준다면 여러분의 구원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새사람이 된 사람은 쓸데없는 것을 쫓아가며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으로 그럴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지 않은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콜라병에서 냄새를 빼내는 방법은 여러 번 물을 넣고 빼고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의 가치관과 죄의 생각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6:12). 죄는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자신이 지배권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 지체라는 것은 우리 몸의 각부분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상황에서 내 손이 불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고 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불의의 무기는 사단을 기쁘게 하는 무기이고 의의 무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무기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의지적인 결정을 내려 여러분 자신을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큰 것은 하나님께 드리지만 작은 것은 포기하지 못하곤 합니다. 나는 아내를 위해 죽어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피곤한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은 힘들어 합니다. 가정의 큰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남편의 의견을 따르지만, 뒤에서 다른 여자들과 남편을 흉봅니다. 교회에서는 큰일을 하고 있지만 가정이라는 작은 왕국의 왕이 돼서 다른 가족에게 상처를 줍니다. 큰 결단은 잘 내리지만 매일매일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우리를 의의 무기로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거의 우리는 죽었습니다. 이 말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떤 것도 하면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지 않다, 육신의 소욕에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체 하나 하나가 예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강해져서 자신을 드려 강력한 의의 무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에서 큰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의롭고 거룩하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6:14) 여러분이 스스로 주도권을 내어주지 않은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기준을 주고 방법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낳았지만 은혜의 구원은 거룩을 낳습니다. 구원을 받으시면 여러분은 거룩한 열매를 맺어갈 것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19-21).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육의 열매가 줄고 성령의 열매가 삶속에 더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부활한 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