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소망, 오늘과 내일을 바꾸다

본문: 로마서 5장 1~11절

설교자: 이병권

로마서 5장이 좀 다른 분위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구분할 때 4장까지가 편지의 첫 번째 본론이고 5장에서 8장까지가 편지의 두 번째 본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4장까지 바울의 설명이 좀 논쟁적이었다면 5장에서는 좀 달라집니다. 5장 1절이 그러한 전환을 만들고 있습니다.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바울은 지금까지 설명했었던 복음의 핵심, 의롭다 하심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요약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라는 말을 하면서 복음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특히 오늘 본문에서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우리 성경으로 계산하면 15번이나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에게” “우리로” “우리”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가 경험하는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딱딱한 말로하면 ‘칭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고 친숙한 말로하면 ‘구원받은 우리가 누리는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가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소망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복은 하나님과 화평입니다.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로 되어 있는데, ‘누리자’로 번역하는 것보다 ‘누린다’, 혹은 ‘누리고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다른 모든 성경들은 청유형이 아니라 평서형으로 ‘누린다’로 번역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고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에 하나님과 어떤 관계였습니까?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원수였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전쟁 중에 있었습니다. 누가 주인이냐를 두고 그 통치권을 내가 차지하기 위해 계속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무지했기에 상대를 모르고 까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진멸하지 않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전쟁을 끝내셨습니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질병이나 가난이나 재난이나 전쟁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신들이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 자료에서 보니까 당시의 사람이 신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했던 행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러운 누더기를 두르고 자기 집 밖에 앉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여러 가지 죄와 잘못을 고백하면서 종종 벌거벗고 진창에 구른다.‘ 방법이나 모양은 다르지만 지금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고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부적을 쓰기도 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갖가지 일을 하는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화를 풀게 하려고 이렇게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과 노력을 다한다 하더라도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화목제물이 되셨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이 화평을 10절과 11절은 화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복은 은혜에 들어감입니다.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그 은혜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표현을 두고, 학자들은 두 가지의 상황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는 왕을 알현하기 위해, 왕을 만나기 위해 왕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으로, 또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리 성소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합니다. 어느 것이든 아무나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허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왕이 계신 곳, 그 특별한 곳에 들어가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로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왕의 원수 집안이었던 므비보셋이 언제나 왕의 식탁에서 왕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그런 원수였는데 왕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이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자기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생각해서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나의 상태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할 때 완료시제를 사용합니다.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일은 전에 있었고 그 결과는 계속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갔다가 상황에 따라 다시 쫓겨나오고 또 상황이 괜찮으면 다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변덕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것처럼, 흔히 역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왕의 곁에 있더라도 계속 그 안에 머물기 위해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눈치보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은혜의 자리에 굳게 서 있습니다. 언제든 그분께 나아갈 수 있고 친밀한 관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감을 얻은 그 은혜의 자리는 안전합니다.

셋째 복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5:2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는 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그날에 우리가 하나님처럼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로운 상태로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9절과 10절에서도 이러한 미래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그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연약해서 실패하고 자주 넘어집니다. 괴로울 때도 많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홍해의 그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기대하며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여전히 거친 광야의 길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잊을 때도 있고 그 영광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우리가 소망으로 그 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장막이 걷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이 변화되어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누리는 복,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그러면 이 복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어지는 3절부터의 본문은 좀 특별한 방법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2절과 3절을 무엇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요? 2절과 3절에 나오는 같은 말이 무엇입니까? ‘즐거워하다’입니다.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만납니다. 기쁜 일도 있지만 슬픈 일도 있습니다. 문제가 없고 인생이 잘 풀릴 때 그럴 때 즐거워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환난 중에 있을 때 즐거워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우리는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여기 이 말씀은 환난 그 자체를 즐기라는 말은 아닙니다. 환난 자체를 좋아하고 환난 당할 때 웃고 그러면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환난 자체는 괴롭고 힘든 것입니다. 즐거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환난을 통해서 얻는 것, 하나님이 그 환난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환난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 환난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6:33).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행14:22). 환난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환난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환난을 가지고 특별하게 훈련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특별 훈련과정은 이러합니다. 환난을 통해 인내를 이룹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고 연단은 다시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훈련 프로그램입니다.

우리가 각 단어의 의미를 알면 이 훈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환난은 쉽게 말하면 ‘압박’입니다. 당시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을 짜기 위해 누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삶을 힘들게 짓누르는 것을 환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형태의 압박을 경험합니다.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이런 압박을 만나고 경험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자로서 겪게 되는 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이나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환난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환난을 말합니다.

이러한 환난은 인내를 이루게 됩니다. 인내는 ‘밑에 남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끈기 있게 견디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 왔을 때, 그런 압박이 있을 때 위에서 나를 누릅니다. 계속 밑에 남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피하는 것입니다. 압박이 고통스러우니까 그 자리를 피하고 그 사람을 피합니다. 힘든 일을 피하고 부담스럽고 어려운 것, 하기 싫은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내하면, 압박의 자리 그 밑에 남아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환난이 나를 누를 때 도망가지 않고 그 밑에 남아서 끈기 있게 견디면 우리는 그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연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한다는 것은 압박에 대해서 끈기 있게 밑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운동을 할 때 어떻습니까? 힘듭니다. 하지만 힘든 운동을 계속하면 근육이 생깁니다. 그리고 근육이 생기면 그 일이 더 쉬워집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핑계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근육은 생기지 않습니다. 나에게 압박이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피하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님을 위한 환난을 계속 피한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단단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내한다면 우리는 그 열매로 연단을 이루게 됩니다. 연단은 문자적으로 ‘시험’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시험을 통과한 상태를 말하는데 비유적으로 단련된 인격을 의미합니다. 끈기 있게 압박을 견디면 우리는 단련된 인격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선하신 뜻대로 환난을 통해 우리를 빚으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더 하나님을 닮게 하시려고 우리의 성품을 다듬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더 분명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소망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열매를 기대하며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환난을 이기는 위로가 됩니다. 소망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바꿉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었다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국가대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축하하며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국가대표가 되고 나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고생입니다. 엄청난 훈련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생이 훤히 보이는데 왜 사람들이 축하하고 기뻐합니까? 열매를 기대할 수 있고 그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국가대표로서 가질 수 있는 소망이 있기에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에 영광을 바라보고 오늘을 다르게 삽니다. 내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바꾸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환난 어떤 압박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환난으로 채워진다 하더라도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환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소망이 아닙니다. 환난이라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 밝은 빛을 내서 진짜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소망으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우리의 소망을 현실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4절과 5절은 무엇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요? ‘소망’입니다.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이유 다시 말해,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소망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있는 소망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음 단락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6~8절의 단락을 5절과 연결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의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 놀라운 일입니다. 선인을 위해, 좋은 사람 혹은 착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명을 주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나의 원수를 위해 할 수 있을까요? 뉴스에 나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죄인을 위해 사람들이 사형이 마땅하다고 죽여야 한다고 소리치는 죄인을 위해 그 죄인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음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십자가를 봐라! 너를 대신해서 죽은 나의 독생자 예수를 봐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경건하지 않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로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을 흔들리지 않는 것이며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증거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최악인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우리를 품어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오늘은 평화롭고 우리의 내일은 안전합니다.

무엇으로 6~8절의 단락과 9~11절의 단락을 연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 그 구원의 시작을 경험한 자로서 미래에 있을 완전한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 구원의 완성을 소망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망으로 오늘을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그 하신 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된 소망은 이렇게 우리의 과거를 바꾸었고, 그리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바꿉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시간을 여행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주인공이 과거로 가서 뭔가를 바꾸면 그로 인해 미래가 바뀌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지난날의 아픔이 있고 바꾸고 싶은 과거가 있기에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대해서 그와 같은 일을 하신 것이 아닐까? 예수님이 과거 십자가에서 하신 일, 그 일이 나의 현재와 미래, 나의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나의 영원한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나에게 소망이 되어서 그 소망으로 내 삶이 바뀌고 있습니다.

폴트립은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은 다만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소망은 모든 일을 지혜롭고 강한 손으로 쥐고 계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 그 소망은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안에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을 즐거워할 수 있고 환난 중에 있다 하더라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과거에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셨고, 뿐만 아니라 지금도 보여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기에 안전합니다. 그래서 소망을 가진 자의 삶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소망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