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로 문안하라

본문 : 로마서 16장 1-16절

설교자 : 이병권

로마서의 마지막인 16장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로마서도 다른 바울 서신과 비슷하게 마무리가 됩니다. 서신의 마지막에서 볼 수 있는 명령이 나오는데, 문안하라는 명령입니다. 다른 서신과 비슷하지만 구별되는 로마서만의 특별함이 있습니다. 문안하라는 명령이 좀 많이 나옵니다. 본문을 보면 계속해서 문안하라는 명령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이름들이 나오는데 대부분은 오늘 본문에만 나오는 사람이고 간단히 언급되기 때문에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오늘 본문을 보면서 바울이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구나! 생각하면서 본문을 가볍게 넘기게 됩니다. 우리가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을 잘 모르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교회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이름들이 다르게 느껴지고 그들에게 교훈과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이름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이 이름들은 참으로 귀하고 감사하게 되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기에 우리는 그냥 읽고 지나가는 이름이 되지만 여기 기록된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 안에서 정말 귀한 분들입니다.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복음을 위해 바울을 도우며 헌신했던 분들입니다.

섬김의 모양이나 그 분량에는 차이가 있지만, 또 본문에서 각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은 특별히 이 이름들을 언급하면서 교회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서로를 격려하도록 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편지에 여러분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면 어떨까요? 온 교회가 나의 수고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면 그것이 나에게 큰 격려가 되고 기쁨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인정을 구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수고를 아시기에 우리의 초점은 항상 주님께 맞춰지고 우리의 마음은 항상 주님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성경은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세워주라고 말씀합니다. 서로의 섬김에 대해서 감사하며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표현을 우리는 문안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문안하라는 명령이 많이 나오는데, 17번이 나옵니다. 우리 성경은 자연스럽게 번역하기 위해 한 번 더 추가되어 18번이 나옵니다.

문안하는 것은 인사하는 것입니다. 인사하며 안부를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인사는 단순히 ‘안녕’을 전하고 안부를 묻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서로를 더 알아가고 서로를 더 이해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인정하며 격려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어쩌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로마서 16장을 ‘신약에서 가장 교훈적인 장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의 사랑의 관계를 장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교회 안의 사랑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으로 형제, 자매에게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은 서로를 향한 그 사랑은 서로가 알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속에 담아두고 감춰두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문안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행하지 않으면,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사랑은 사랑으로써 그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놀랍고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그냥 하게 됩니다. 수고하고 희생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상이면 하지 않을 일들을 그냥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람을 비정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사람을 비정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 사람의 기준과 논리로는 비정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받은 자로서 계속해서 사랑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정상이지만 그렇게 사랑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서로의 수고를 알아주고 사랑으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사랑으로 행하는 것, 그것이 문안하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문안하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적용해서 순종하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두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러 사람들 중에 좀 구분해서 먼저 살펴볼 사람이 있는데 뵈뵈입니다. 뵈뵈는 로마 교회의 성도가 아니라 바울이 로마 교회로 천거하는 사람이기에 구분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16: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뵈뵈라는 이름은 ‘순수한, 밝은, 빛나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합니다. 교회가 뵈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그녀를 도와줄 것을 부탁합니다. 당시에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에 안전을 위해서 추천서를 가지고 다니며 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의 추천을 받은 뵈뵈는 로마서를 로마 교회에 전달했을 것입니다. 뵈뵈가 있었던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11킬로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고린도와 겐그레아는 가까운 거리라 왕래하기 쉬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지내면서 개인적으로 뵈뵈를 알 기회가 많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뵈뵈를 추천하면서,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일꾼, 자매, 보호자입니다. 뵈뵈는 교회의 일꾼이었습니다. 이 일꾼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뵈뵈가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자였고 교회에서도 자매로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뵈뵈는 주님 안에 있는 자매였고, 바울과 여러 사람의 보호자였습니다. 여기 보호자는 ‘후원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뵈뵈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주님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교회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드림으로 여러 사람들의 보호자가 된 것입니다.

뵈뵈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또 그녀가 로마에 갔을 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녀를 환영하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뵈뵈는 그 이름처럼, 교회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밝고 빛나는 자매입니다. 천국에서 그녀의 이름은 더 밝게 빛날 것이고 주님의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3절부터의 말씀은 로마에 있는 형제, 자매를 향한 바울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나오는데 26명의 개인이 나오고 두 가족이 나오고 세 그룹의 가정교회가 언급됩니다.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인데 어떻게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 거지?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바울이 문안하라고 명령할 때, 제일 먼저 언급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을 때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고 바울과 함께 했습니다. 함께 에베소에 가서 교회를 위해 함께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추방령이 폐지될 즈음에 다시 로마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로마에서 나와야했던 유대인 성도들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로마에서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성도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특별히 이름을 언급하며 문안하라고 명령했던 로마의 형제자매들은 귀하게 여겨야 하는 성도들이지만,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학자들이 자료를 가지고 연구한 결과들이 있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인물들을 설명하는 것이기에 확실하지 않아서 말씀드리기 어려운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이럴 때는 이 말씀을 기록한 목적을 생각해보는 것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접근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도들을 언급할 때 사용한 표현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 단어로 요약하면, 첫째는 가족이고 둘째는 수고입니다. 차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러 이름이 나옵니다. 많은 이름이 나온다는 것은 다양하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당시의 이름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출신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노예나 노예 출신은 그에 맞는 이름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자노비는 태어난 월에 따라 삼월이, 사월이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남자노비는 말똥이, 개똥이, 돌쇠, 마당쇠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러 이름이 우리에게는 다 비슷한 이름이고 그냥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일 수 있지만, 이름의 의미를 따져보면 다양한 출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있지만 이방인도 있습니다. 자유인이 있지만 노예도 있습니다.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있지만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여자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여자는 당시에 사람의 숫자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언급하는 26명 중에서 9명이 여자입니다. 당시 여자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볼 때 이 기록은 특별한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언급된 뵈뵈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특별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교회로서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큰 건물이 있어서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부유한 성도가 자신의 집을 개방하고 그곳에서 함께 모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교회로서 서로를 섬기고 각 사람에게 주어진 지체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가족’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문안하라는 명령과 함께 계속 반복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과 ‘주 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9번이 반복되었습니다. 2절까지 포함하면 총10번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 ‘어머니’라는 가족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사용되고 ‘사랑하는’ 이라는 표현이 4번 반복됩니다.

정리하면, 교회는 주님 안에서 가족이 되었기에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신분과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주님 안에서 가족이기에, 주님의 사랑으로 가족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교회의 모습을 ‘수고’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동역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함께 수고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어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고난을 언급하는데,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음’(4)을 ‘나와 함께 갇혔던’(7)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6절과 12절에는 ‘수고하다’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여기 사용된 수고하다는 단어는 고통이 따라오는 수고를 의미합니다. 의미가 강한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함께 고통당하며 함께 수고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함께 수고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고로 인해 고난을 겪기도 했고 수고에 대한 고통이 따르기도 했지만, 여러 사람의 수고가 있었기에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복음이 로마를 거쳐서 서버나까지 전파되길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 함께 하는 수고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과 함께 수고한 그들처럼 로마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서 바울과 함께 수고해줄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께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을 받은 자로서 수고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 주님의 명령에 따라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수고합니다. 사랑은 수고함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16: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는 것은 문화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형태는 달라지겠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서로 문안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표현하지 않고 속으로만 하는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문안하라는 명령에 따라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가족이 되었기에 서로를 사랑함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세워주는 그렇게 서로를 문안하는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수고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가족이 되었으니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상적인 사랑을 회복해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가족이 되었으니 사랑으로 서로 수고하는 일을 계속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