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본문 :  로마서 8장 31~39절

설교자 : 이병권

여러분은 삶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으십니까? 내가 믿는 것과 다르게 삶이 흘러갈 때,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즘 워낙 사람들을 속이는 것들이 많으니까 나도 그렇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삶의 어려움과 현실의 무게 때문에 힘겨운 날을 보내고 있을 때면 주님을 믿으며 사는 것이 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과는 다른 현실의 어려움을 마주할 때 생기는 갈등이 있습니다. 삶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느껴지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럴 때 우리의 할 일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확신하는 일입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확신입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확신입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바와 다른 현실을 만나고 삶이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그럴지라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확신은 무모한 믿음이나 이유 없는 맹신이 아닙니다. 그럴만한 이유와 근거가 있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에게 있는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크게 두 단락으로 살펴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첫 번째로, 하나님이 하신 일 때문입니다.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오늘 본문은 로마서 두 번째 본론 5장에서 8장까지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고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선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완벽한 계획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그 일에 대해서 바울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이러합니다, 제가 더 할 말이 없네요.’ 이런 식으로 그냥 덤덤하게 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의 놀라움에 압도되어서 벅찬 감동으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말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미리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결국 영화롭게 하시는 구원의 계획과 하나님의 하신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우리 마음에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벅차오르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 뜨거운 마음을 연속되는 질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질문들로 우리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들을 통해 우리 마음도 바울처럼 감격으로 뜨거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지는 바울의 세 개의 질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8:31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첫째 질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이 어떠합니까? 우리의 대적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대적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를 맞서는 대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바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대적들의 공격과 방해와 위협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대적들이 끈질기게 바울을 괴롭혔고 공격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했을 때 고난과 핍박이 따라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과 마귀와 타락한 영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항하기 어려운 적들입니다.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도 많고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는 바울의 질문은 우리에게 대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대적이 되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와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적들은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적은 단순히 우리를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맞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곧 하나님의 대적이 됩니다. 친구의 친구는 나에게도 친구입니다. 그리고 친구의 적은 나에게도 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이기에 우리의 적은 하나님의 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십니다. 우리 편에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 편에 있는 우리를 궁극적으로 해하거나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되는 대적이 있으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두려움 되고, 무엇으로 인해 염려와 걱정이 되십니까? 바울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정도로 위하시는지 보십시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이 어느 정도로 우리를 위하십니까? 우리를 하나님 편에 있게 하시려고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면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이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의 완성으로, 그 영광으로 나아가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들 영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까지 그 모든 것들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생각될 때, 그런 의심이 생길 때,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이 일을 생각하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삶의 문제나 내가 만나는 현실의 어려움, 그런 힘겨운 일을 만날 때 하나님이 하신 일, 그 십자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이 계속해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보증합니다.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둘째 질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범하는 죄로 인해 끊임없이 고발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짓고 있는 무수히 많은 죄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또 죄를 지었군,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냐! 가중 처벌이야! 도대체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 이 많은 죄를 어떻게 하려고 또 그러냐!’ 여러분도 이런 고발을 생각한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계속해서 우리를 고발하고 참소하는 마귀와 타락한 영들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고발하고 우리를 낙심케 합니다. 우리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고발은 그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에 대한 그 모든 소송은 궁극적으로 모두다 무죄로 끝나게 됩니다. 우리 죄를 고발하는 그 모든 시도들은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셋째 질문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하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어떠한 고발도 우리를 향한 어떠한 정죄도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의롭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정죄 받아야 했던 그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이 받아들여졌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근거가 되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그 권위를 행하시며 최종적인 승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넷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대언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 구원의 보증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둘째 질문과 셋째 질문에 나오는 고발하다는 말과 정죄하다는 말은 모두 법정 단어입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우리는 고발되어 법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너무도 명백하기에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에게 마땅한 것은 우리 죄에 대한 영원한 형벌이고 심판입니다. 하지만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무죄를 판결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없음을 선고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변호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형사 소송법에서 ‘일사부재리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한번 판결이 난 사건에 대해서는 다시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에 대해서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판결은 없습니다. 이미 끝난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어떤 고발도 어떤 정죄도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확신할 수 있는 변하지 않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가 적대적인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은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목록으로 일곱 항목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이 목록에는 없지만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일들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는 것은 칼로 묘사되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우리 마음을 흔드는 가장 큰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들을 만났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고난 중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시편 말씀을 인용합니다.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믿는 자가 세상에서 만나는 어려움, 부당한 일들, 그러한 여러 가지 고난들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 그러한 모든 고난에서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깁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설령, 최악의 상황을 만난다 하더라도 결국은 우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확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사랑으로 역사하셔서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고 그 사랑을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것도,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존재도,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시간이나 공간에서도, 그 어떤 세력이라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뭔가를 해서 우리가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먼저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나오는 ‘황금사슬’을 끊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여정에 대해서 ‘황금사슬’이라고 표현하는데(30) 저는 개인적으로, 끊을 수 없는 ‘황금사슬’의 성분을 분석할 수 있다면, 황금사슬의 성분은 ‘사랑’으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 우리가 겪는 고난과 어려움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고 사랑을 바꿀 수 없고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사랑에 대한 의심이 생깁니다. 끊어지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나를 좀 외면하지 않으실까?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를 받아주시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죄가 주는 영향이고 죄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자백함으로 깨끗함을 받아 언제나 그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절대로 잊지 마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뭔가를 해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상태나 나의 행위에 따라 사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조금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사랑에서 떨어질까 불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방적으로 먼저 사랑하셨고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하기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 사랑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짝사랑으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작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지만, 계속해서 일방적인 사랑으로 받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짝사랑으로 만들지 마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나도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돌로 치기 전에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정죄와 그에 따른 처벌이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날아올 돌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돌에 맞아 죽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녀의 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편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0-11)

우리가 이 여인과 같은 자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고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를 위해 대신 하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고발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 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일을 만나든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다르게 만듭니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그 사랑의 힘으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