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

본문: 마가복음 5장 1-20절

설교자: 최종혁

시리즈의 제목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 이유는 각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이 결국은 모든 사람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각자는 그들의 특별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사실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그런 상황 가운데 있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모두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들이기에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모두가 영적으로 죽었기에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모두가 목마른 자들이기에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이야기였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마가복음 5:1-20에 기록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이 공통적으로 이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기 전 이 사람의 끔찍한 상태를 강조했다. 사람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던 이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한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고 또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우리는 어떤 상태인지,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

예수님을 만나기 전 : 우리는 어떤 상태인가?(1-5절)

5: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하셨다. 4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은 여러 척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중에 큰 풍랑을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었다. 제자들은 그 와중에 잠을 자고 있던 예수님을 깨우면서 마치 예수님을 나무라듯이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다급히 외쳤고(막 4:38), 예수님은 먼저 바람을 꾸짖으셔서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며 그들을 꾸짖으셨다(40절).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능력에 심히 두려워하며 예수님이 진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41절).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바로 이곳 바다 건너편 이방인의 땅인 거라사인의 지방에 있던 귀신들을 통해 듣게 된다.

거라사인의 지방은 마태복음에는 ‘가다라 지방’이라고 되어있는데, 거라사가 가다라의 관할 아래 있었던 마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이곳은 데가볼리(10개의 도시)라는 요단강 동편의 이방인 거주 지역에 속한 도시였다. 5:21을 보면 이 사건 후에 예수님은 바로 다시 배를 타시고 이 지역을 떠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그야말로 이 사건을 위해, 정확히 말하면 2절 이후에 등장하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우리가 흔히 ‘거라사의 광인’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이곳까지 오셨다고 볼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수가라는 도시로 가셨던 것처럼 이방인이면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신 것이다. 그리고 사건은 빠르게 진행된다.

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배에서 나오시자 마자(“곧”)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셨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 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록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찾아 오셨지만, 힘들게 그를 찾아다니거나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마치 예수님이 도착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예수님과 일행을 마중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한 상황이라면 예수님과 같은 유명인이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천천히 이동하셨던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도착지에 있는 사람이 미리 예수님이 오실 것을 알고 준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 경우는 이 사람이 아니라 그를 통제하고 있었던 귀신이 알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귀신’, ‘귀신 들림’에 대해서 우선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귀신이나 악령에 대한 얘기들은 오늘날 주로 무서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접하게 된다. 그렇게 과거의 미신적 사상에 현대적인 상상을 더한 결과물만 보다보니, 그 자체가 허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귀신이나 귀신 들리는 일은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경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실제로는 지금도 목격할 수 있는 현실이다. 영화나 거짓 종교 등을 통해 이런 현실을 왜곡하고 과학과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체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이다. 사탄에게 속지 말고 성경이 말하는 영적 실체를 알아야 한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더러운 귀신’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외에 또 다른 인격적인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바로 천사다. 천사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섬기도록 창조된 존재들로서 사람과 같은 육체는 없는 영적인 존재들이다. 천사는 온전히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사람과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이다. 그들은 영적인 존재로서 죽지 않고, 또한 천사들끼리 결혼을 해서 또 다른 아기 천사를 낳지도 않는다. 즉, 천사는 처음 창조된 숫자가 계속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죽어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은 죽어도 사람이다. 천사는 애초에 천사로 지음을 받은 존재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로서 사람과는 다르게 우리가 아는 물리적 법칙에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 우리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처럼 전능하거나 전지하거나 편재하거나 영원하지는 않지만, 사람보다는 힘이 있고 지혜가 있고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오래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천사가 하나님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이 도착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더러운 귀신도 본질적으로는 천사이기 때문에 사람보다는 훨씬 빠르게 어떤 정보를 알 수 있다. 이 경우 예수님이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가신다는 사실을 더러운 귀신인 어떤 식으로든 먼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일부러 예수님을 찾아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더러운 귀신’은 어떤 천사를 말할까? 많은 수의 천사들 중에 실제로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천사들이 있었다. 바로 성경에서 사탄 혹은 마귀라고 부르는 천사와 그를 따라 함께 타락한 다른 천사들이다. 타락한 혹은 범죄한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말 성경에서는 ‘귀신’으로 표현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고, 성경의 표현도 그렇게 이해하면 안됩니다. 천사들 중에 범죄한 천사들이 있고 그들을 통칭하여 ‘귀신’이라고 부르고 그들 중의 우두머리가 ‘마귀(사탄)’라고 정리할 수 있다.

본문의 ‘더러운 귀신’이 바로 범죄한 천사를 의미한다. 그럼, 더러운 귀신 ‘들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천사는 본질적으로 사람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천사들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과 소돔의 롯을 찾아왔던 천사들을 생각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롯이 그들을 사람으로 생각해서 대접했던 것을 보면 천사가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을 전체적으로 종합해보면 이런 일은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특별한 경우,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일시적으로 천사는 사람이 볼 수 있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숨어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특히 천사들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 외에 범죄한 천사들이 어떤 사람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의 외부에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 안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아 통제하는 것이다.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사탄은 그 주변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기도 했고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물론 하나님의 허락 아래 벌어진 일이지만 욥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욥이 귀신 들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귀신 들린 것은 귀신이 그 사람 안에서 그를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욥은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는 사탄이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의 통제에 따라 행한다. 이어지는 본문이 그런 사람의 모습을 잘 묘사한다. 물론 모든 귀신 들린 사람이 이렇게 되지는 않는다. 귀신 들린 것도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통제권을 가지고 있느냐다.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의 통제 아래있다. 거라사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을 마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5:3–5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어떤 모습인지 어느 정도는 상상이 될 것이다. 마태는 이런 사람이 둘이 있었다고 기록했는데, 마가와 누가는 그 중 한 사람에 포커스를 맞춘다. 아마도 둘 중 한 사람만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는 이 사람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기록했다(마 8:28). 정말 사나운 야생 동물과 같았던 것이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그를 쇠사슬로 매두려고 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쇠사슬로 묶은 것은 아니었을 수 있다. 끈 같은 것으로 묶었는데, 그 것을 끊으니 점점 강한 것으로 묶다가 결국 쇠사슬까지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조차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쇠사슬을 끊을 수 있을 정도 였다.

누가는 이 사람이 항상 그런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기록했다(눅 8:29). 아마 쇠사슬로 묶어 두면 어느 정도 붙잡아 둘 수 있었지만, 귀신이 강하게 역사하면 쇠사슬을 끊어 버릴 정도의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러번 그렇게 해서 이제는 사람들도 포기한 그런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누가는 또한 이 사람이 오래 옷을 입지 않고 지냈다고도 기록했다(눅 8:27). 그 상태로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 사이에서 밤낮 상관 없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 다니고 돌로 자해를 하고 있었다고 마가는 기록했다. 상상해 보라. 옷을 입지 않고 돌로 자기 몸을 자해하고 있었으니 몸을 두른 것은 옷이 아니라 피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안그래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무덤 사이에서 밤낮 소리치며 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누구도 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 위험한 사람을 어떻게든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곳을 지나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에게 그는 위협적인 존재였고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 자체는 어땠을까? 누가는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라고 기록했다(눅 8:29). 즉, 이 사람이 지금까지 묘사한 그런 상태로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때로 그는 이성이 돌아온 상태로 있었겠지만, 그는 여전히 쇠사슬에 묶여 있어야 했을 것이다. 언제 귀신이 그를 사로 잡아 포악한 일을 하게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절망 가운데 살고 있었을 것이다.

19절을 보면 그 사람에게는 집도 있고 가족도 있었다. 그 가족들의 삶은 어땠을까? 가족들은 이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을 것이고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람과 함께 가족들의 삶도 망가졌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족들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 사람이 어떻게 귀신 들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의 기록과 실제 사례를 고려해 보면 그 자신이 귀신에게 주도권을 내어주는 일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신 내림’이라고 하는 일과 유사한 어떤 일을 경험했을 것이다. 아마 그는 그 일을 후회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혀 인간답지 않은 삶, 오히려 짐승에 더 가까운 삶, 혹은 짐승만도 못한 삶,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너무나 비참하고 끔찍한 삶이다. 그 자신도 원하지 않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삶을 그는 살아야 했다. 왜 그랬을까? 그가 사탄의 권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이 그를 지배하여 자신이 원하는대로 그의 삶을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참하고 끔찍한 삶, 그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 사탄이 원하는 것이었고 그의 권세 아래 있었던 이 사람은 그런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의 삶을 보며 참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안타깝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 모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2:1–2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여기서 말하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전을 말한다. 즉, 구원 받기 전의 모든 사람이 이런 상태였다는 말이다. 첫째로 구원 받기 전의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다. 둘째로 구원 받기 전의 모든 사람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사탄을 따른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이다. 난 하나님을 따르지 않지만 사탄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나는 그냥 내가 원하는대로 살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대로 사는 것, 그것이 정확히 사탄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이고, 그것이 우리가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는 증거라고 성경은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면 사탄이 내 삶의 주인이다. 나에게 복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면 나를 파괴하기 원하는 사탄이 내 삶의 주인이다. 사탄이 주인인 삶, 사탄에 사로잡힌 삶,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봤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의 삶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말이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충분히 잘 살고 있고 행복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사탄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라는 사실이다(요 8:44). 사탄은 사기꾼이고 그래서 때로는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는 사실이다(고후 11:14). 멸망으로 가는 기차는 보기만해도 무시무시하게 생기지 않았다. 사탄은 누가 봐도 괜찮게, 누가 봐도 타고 싶게 파멸의 기차를 디자인했다. 사탄은 어떤 경우에는 예전처럼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두려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행복을 주는 방법을 취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속이는 것이다. 세상의 삶의 방식을 따르면 될 것처럼 속인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속이고 그러니 지금을 충분히 즐기며 살 수 있다고 속인다.

속이는 자들은 항상 좋아 보이는 것으로 진짜 나쁜 것을 감춘다.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나에게 엄청난 이익이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너무 좋아 보이는 거래는 일단 의심부터 하라는 말이 세상에서도 통용된다. 그런 일에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영적인 일에는 어리석다. 너무 쉽게, 아무렇지 않게 사탄의 거짓에 속고 있다. 사탄이 만들어 놓은 달콤한 지옥행 열차를 즐겁게 타고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 안에서 즐거울지 모른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열차의 종착지는 정해져있다. 우리가 계시록에서 본 것이 바로 그 종착지다. 영원한 심판, 영원한 불못이다. 사탄과 그의 추종 세력을 위해 만들어진 그곳에 우리가 함께 가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차라리 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의 삶이 더 낫다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늦는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그 때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지옥행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다.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지금이다. 사탄의 거짓에 속지 말고, 하나님의 진리에 반응해야 한다.

다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강력한 사탄의 권세 아래 매여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처참한 삶을 살던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그를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다. 예수님을 만난 그날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꾼 날이 되었다. 그를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은 사탄보다도 강한 분이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때 :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6-13절)

5: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2절에서 봤던 것처럼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제 발로 예수님을 찾아 왔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실상 이 일은 그를 괴롭히고 있던 귀신이 한 일이라고 봐야하고 그 뒤에 이어지는 말도 마찬가지다.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여기서 지금까지 마가복음에 등장했던 어떤 사람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이 나온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앞서 4:41에서 제자들이 “그가 누구이기에 …”라며 의문을 가졌던 부분에 대한 답이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과 바다도 그분에게 순종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 이 귀신도 자신이 그런 바람과 바다와 같은 상황에 있음을 알고 예수님을 먼저 찾아왔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했지만, 귀신들은 믿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을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고 그에 합당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는 능력과 권세에 대한 비자발적인 반응일 뿐이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하지 못할 뿐이다. 그들은 참된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런 귀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순종하고자 한다.

여튼 여기서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정하면서도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며 자신의 일에 관여하지 말아주실 것을 요청했을 뿐 아니라, 주제 넘게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무례하게 말하기도 했다. 괴롭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5: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즉,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즉각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명령에 귀신들은 바로 바로 반응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마 이 경우 예수님은 일부러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귀신에게 스스로 나올 것을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다.

마태는 귀신이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묻기도 했다고 기록했다(마 8:29). 즉, 이들은 아직은 자신들의 심판의 때가 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계시록을 통해서 배운 것처럼 이들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다시 오실 때가 될 것이다. 특히 천년왕국이 끝난 후 사탄과 그의 모든 추종 세력, 천사든 사람이든, 모든 하나님의 대적들은 둘째 사망, 곧 불못에 영원히 던져지게 된다. 귀신들이 어느 정도 자세하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 때는 예수님께서 왕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자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우리를 심판하시려고 하시냐고 예수님께 반문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과 잠깐 대화를 나누신다.

5: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군대’는 로마의 병력 단위로서 최대 6000명의 군사를 포함한다. 이 귀신들의 실제 숫자를 알 수는 없겠지만, 꽤 많은 수의 귀신들이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귀신들은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는데 그 수가 2000마리 정도였던 것을 보면 정말 엄청난 수의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 또한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하실지가 두려웠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0절을 보면 그들은 그 지방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5: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누가복음 8:31에서는 무저갱에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구했다고 말한다. 무저갱은 범죄한 천사들이 심판의 날까지 갇혀 있는 감옥과 같은 장소다. 즉, 이들은 계속해서 이 땅에 특히 지금 있는 거라사인의 지방에 있으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근처에 있던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주시기를 예수님께 구했고 예수님은 허락해 주신다. 예수님의 허락 아래 이들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고 돼지 떼는 바다에 뛰어들어 몰살하게 된다.

5:11–13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정말 많은 질문이 생기는 장면이다. 왜 귀신들은 다른 것도 아니고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여 주시기를 구했을까? 왜 들어가자마자 돼지들은 바다에서 몰사했을까? 돼지가 몰사하면 귀신들도 같이 죽는걸까? 아니면 자유롭게 되는걸까? 예수님은 2천 마리나 되는 불쌍한 돼지들은 왜 죽게 내버려 두셨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고민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최소한 이 장면에서 보여지는 세가지 분명한 사실에 먼저 집중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이 장면은 한 사람을 괴롭히던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하며 파괴적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은 누구도 보지 못했던 끔찍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제는 귀신이 떠나서 정신을 차린 그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던 사탄의 권세가 얼마나 파괴적인 것인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많은 돼지떼를 단숨에 죽음으로 몰고갔던 세력이 그 자신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이 장면은 한 사람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긍휼을 보여준다. 돼지 2천 마리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보다도 한 사람의 영혼을 더욱 가치있게 보셨다. 동물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많이 있지만, 동물은 동물일 뿐이다. 예수님은 돼지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우리도 이 차이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 장면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보여준다. 엄청난 힘을 가진 귀신들이었지만 그들조차도 예수님의 허락을 구하고 움직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왜 그냥 멸하지 않고 돼지에게 들어가게 허락하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을 때에야 귀신들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마 10:29)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드러낸다.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신 것이다.

퇴마 혹은 엑소시즘을 주제로 하는 영화는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요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점이 한 몫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영적인 세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선과 악의 대결은 없다. 오늘 사건만 봐도 그렇다. 그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힘겹게 이 귀신들을 물리치신 내용은 없다.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이 귀신들을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셨던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하기를 허락하셨을 뿐이다.

계시록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봐도 그렇다. 그 어디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쟁이나 싸움은 없다. 일방적인 심판일 뿐이다. 6일 창조에 대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왜 6일이나 사용하셨는지가 진짜 문제인 것처럼 심판에 대한 말씀도 그렇다. 사실 당장이라도 하나님은 사탄과 그의 세력을 멸할 수 있으신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천년왕국 때도 굳이 사탄을 1000년만 가둬두셨다가 또 풀어주신다. 가둬둘 수 있는 한계가 1000년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어떤 이유로 그렇게 하실 뿐이다.

귀신을 쫓아 내시고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신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이 아니라, 예수님의 절대적 권세다. 사탄을 비롯한 그의 모든 세력은 예수님의 권세 아래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허락 없이는 그들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귀신들린 자가 만났던 예수님은 바로 이런 예수님이셨다. 이런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셨고,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그를 더 높은 권세이신 예수님께서 해방하신 것이다.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렇게 하셨다. 속이는 자 사탄은 예수님이 이런 분이 아니라고 여전히 우리를 속이려고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할 힘도 없고 의지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정말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처럼 거짓을 말한다. 처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탄이 계속해서 하고 있는 거짓말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탄이 바라는 것은 우리의 멸망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국은 사탄의 권세를 멸하실 것이다. 어느 편에 서야할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린다.

예수님을 만난 후 :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14-20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완전히 빠져나오자 그는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5:14–15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그가 앉아 있었다는 것은 처음에 묘사된 모습과 대조가 된다. 그는 제어할 수 없는 산짐승 같았지만 이제는 온전한 정신으로 차분히 앉아 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구했다.

5:16–17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참 흥미로운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귀신들을 쫓아 내신 사실이 그들에게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그 지방에 예수님 없이 계속 머물기를 원했던 귀신들처럼 이 사람들도 그렇다. 그들도 그곳에 예수님 없이 머물기를 원한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님께서 떠나주시기를 구했다. 이들도 예수님을 만났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알아갈 놀라운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귀신 들렸던 사람은 달랐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실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했다.

5: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가장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허락 하지 않으신다.

5: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중요한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일을 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에 귀신들렸던 자는 순종했고 그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은 놀랍게 여겼다.

5: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처럼 들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명령에 따라 바르게 복음을 전했는지가 중요하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가 받은 은혜와 능력을 선포했다. 순종으로 예수님께 반응했던 것이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도전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만났다. 가장 큰 권세를 가지신 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래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얼마나 지금 내 삶에 만족하느냐에 관계 없이 이것이 사실이다. 난 단 한번도 사탄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사탄이 그만큼 일을 잘하고 있다는 방증일 뿐이다. 안타깝지만 속으며 살아 온 것이다. 이 현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사탕과 초콜렛만 먹고 싶어하는 어린 아이들과 같다. 사탕과 초콜렛만 주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것을 자제시키고 영양소를 골고로 섭취할 수 있도록 다른 음식을 주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일까? 어린아이는 사탕과 초콜렛을 주는 사람이면 무조건 내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유괴를 당하거나 하는 일도 많다.

사실 어린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도 사탕과 초콜렛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똑같다. 진짜 문제는 그런 어리석음이 영적인 부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뭔가 나에게 좋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것 같고 큰 희생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시는 부모와 같으시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신다.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신다.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는 사탄의 권세 아래 살거나 혹은 아들의 나라에서 산다. 불편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인정해야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나는 귀신들렸던 자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지, 아니면 다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 않은지,  내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능력의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끝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면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는거냐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 사탕을 먹지 못하게 하고 초콜렛을 먹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더 잘 아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확신 가운데 순종하여 참된 기쁨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런 기쁨의 삶이 되어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더욱 원하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