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이 남는다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8-13절

설교자: 최종혁

 

한 때 유행했던 말 중에 “사랑은 변하는거야”도 있었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도 있었다. 한쪽은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다른 쪽은 사랑이 변한다고 믿는 것 같지만, 사실 동일한 생각이 그 저변에 있다. 우리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고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한쪽은 사랑이 변하지 않는 편이 더 좋고, 다른 쪽은 사랑이 변하는 편이 더 좋아서 그렇게 말할 뿐이다. 상황이 달라지면 또 다르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감춰진 조건이 있다. 차갑게 들릴지 모르지만, “네가 나를 변함 없이 사랑하고 그것이 나에게 득이 된다면”이라는 조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황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면 사랑도 변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 상황과 사람이 변하니 사랑도 변한다. 그런 사랑을 우리 계속 목도하고 경험한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이 말하는 사랑은 이렇게 쉽게 변하는 감정적인 로맨스가 아니라 진짜 사랑이다. 성경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명할 때 의미하는 바로 그 사랑이다. 사람을 바꾸고 상황을 바꾸는 강력한 힘인 그 사랑이다. 나에게 누군가가 4-7절의 말씀과 정확히 반대되는 행동을 해도 나는 정확히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 사랑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4-7절같이 행하는 사람은 나약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쉬워 보이고 휘둘리기 쉬운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나약하고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이 사랑은 ‘어려운’ 사랑이다. 힘든 사랑인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사랑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약한 자가 아니라 강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참지 않고 자기 감정에 따라 분노하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성내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것이다. 복수하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것이다.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자기 권리를 절대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모든 것을 언제든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사람이 진정 강한 사람이다.

사실 이런 사랑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새롭게 창조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강인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사람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며 또한 동시에 난 할 수 없다고 포기해야할 것도 아니다.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모두가 해야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어쨌든 내 할 일만 잘해도 되는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밝힌다. 힘들지만 우리가 그렇게까지 사랑해야하는 이유는 사랑이 남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까지, 사랑이 영원히 남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까지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다. 사랑이 남는다.

고전 13:8–13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의 남은 구절들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낭만적으로 읽히지만, 생각보다 학문적인 논란이 많다. 8절에서 사랑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은사주의와 관련하여 방언이 그치는 시기가 언제인지, 10절에서 온전한 것은 무엇을 말하여 그것이 올 때가 언제인지, 12절의 거울은 품질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 등이 그렇다. 또한 13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있다는 의미인지도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다.

이런 논쟁은 흥미롭지만, 꼭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오늘 설교에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논쟁들이 중요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를 생각해 보면 방언에 대한 부분은 정말 중요한 문제다. 다만 오늘 설교에서 이 부분을 다루지 않는 것은, 그것이 이 본문의 주제가 아니고, 또한 주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에서는 바울이 강조하려고 하는 주제, 즉 ‘사랑이 남는다’에 집중해 보자.

사실(8절)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먼저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 바울은 여기서 매우 강한 부정의 표현을 사용했다. 결단코 사랑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사랑이 떨어질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럼, 사랑이 떨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떨어진다”는 단어는 맥락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앞의 맥락의 결론이라면 ‘사랑은 결코 굴하지 않는다’ 혹은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필요 없을 일은 없다는 식의 의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앞 문맥의 결론보다는 뒷 문맥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미 7절이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괄적으로 정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말씀이 앞 문맥의 결론이라면 뒤에 이어지는 은사의 종말에 대한 말씀은 갑작스러운 면이 있다. ‘사랑은 결코 포기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언은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할 것입니다’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왜 이런 은사들의 종말에 대해 언급을 하는지가 어색한 것이다. 사랑과 그것들이 대조될 때 가장 자연스럽다.

조금 다른 면에서 ‘사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단어의 의미상 가능하지만 이 역시 문맥에 잘 맞지 않는다. 바울은 지금 사랑이 이렇게 어렵지만 어쨌든 사랑이 이길 것이니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까지 바울은 계속해서 사랑 때문에 져야할 것에 대해서 말해왔는데, 여기서 갑자기 사랑은 “끝내 이깁니다”도 아니고 “결코 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현실에서 사랑은 질 때가 많다. 믿음은 배신 당하기 일쑤이고 소망도 무너질 때가 많다. 끝까지 사랑으로 믿음과 소망 가운데 기도했지만 결국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배우자를 둔 남편이나 아내도 많고, 자녀가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한 부모들도 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회복되지 않는 관계도 있다. 사랑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확률을 높일 수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랑은 그런 기대를 버리지 않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사랑은 항상 이기지는 못한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는 이어지는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사랑과 대조되는 예언, 방언, 지식에 대해서 그것들이 폐할 것이고 그칠 것이라고 말한다. 즉 “끝날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끝나지 않는다”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본래 이 단어가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고려해 봐도 그 의미가 가장 자연스럽다.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그 필요가 다하거나 존재의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다.

앞선 말씀에서 사랑은 죄가 가져온 결과를 뒤집는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럼 더 이상 죄가 없는 상태가 되면 사랑도 필요 없을까? 그렇지 않다. 죄가 없는 상태 자체가 사랑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에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 사랑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들 사라질 것이다. 4-7절에서 묘사한 사랑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죄로 인한 ‘어려움’이 전제되어 있는데(인내), 그 어려움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쉬운 일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사랑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상처를 주지 않아도 된다.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 중 주님을 만나는 것 다음으로 기대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끝나지 않고 계속 남는다. 끝까지, 영원까지 남는다.

주님께서 이 땅의 교회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 사랑으로 하나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저 부모가 자녀들에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죄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세상은 그 결과를 보고 있다. 다툼과 분열을 보고 있다. 누구도 그것이 좋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구원 받은 자들, 교회다. 그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6:12–14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 죄의 결과를 뒤집는 일을 한다. 사랑으로 그렇게 한다. 공산주의식 획일화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됨을 세상 속에 나타낸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그것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더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죄가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이 땅 가운데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선포하셨고, 실제로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해 죄가 없고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아픔과 고통, 슬픔이 없는 나라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셨다. 그냥 해야할 일이어서 하셨던 것이 아니다. 자기를 더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칭송 받고 인정 받고 싶어서 하셨던 일도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사랑으로 하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그냥 좋은 말을 듣고 병 고침을 받은 것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셨기에, 사람들은 천국을 맛볼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영원한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할 때 교회로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원한 사랑이지 일시적인 은사가 아니다.

8절에서 바울은 다시 예언, 방언, 지식을 사랑과 대조한다. 영원히 남을 사랑과 대조적으로 은사는 끝나게 될 것이다. 이미 1-2절에서 이 모든 은사를 최고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었다. 거기서도 그렇지만, 바울은 꼭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은사들은 사랑 없이 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절에서도 구제와 헌신이 언급했던 것처럼, 사실 모든 은사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은사든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은사는 끝나게 된다. 아무리 고린도 성도들이 높이 평가했던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라도 해도 다르지 않다. 은사는 일시적인 목적으로 주어졌고 그것은 끝을 맞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어지는 9-12절에서 왜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끝나는지, 끝나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영원한 상태와 지금을 대조하며 그 당위성을 강조한다. 다른 은사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이런 대조를 할 수 있겠지만, 고린도 교회가 원하던 특별한 은사인 예언과 방언과 지식을 예로 은사는 이 땅의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한다.

이유(9-12절)

부분 vs 온전(9-10절)

고전 13:9–10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말이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은 자연스럽게 폐해진다. 필요 없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수학을 배우면서 이런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금은 다 잊어 버렸지만, 어렸을 때는 도형의 넓이 구하는 공식, 부피 구하는 공식 등을 열심히 외웠다. 그런데 나중에 미적분을 배우고 보니 그런 공식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모양의 도형들의 넓이와 부피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그런 공식들을 굳이 외우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온전한 것을 알게 되자 부분적으로 하던 것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른 과목도 비슷한 경험들을 했다. 어렸을 때는 단편적으로 배우던 것들이 보다 큰 원리 안에서 이해될 때, 더 이상 그 단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교회에서 은사를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앞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마치 성경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약 나보다 훨씬 말씀을 잘 알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교회에 온다면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회에 훨씬 유익이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이치다.

부분적인 것 사이에도 이런 이치가 있다. 따라서, 온전한 것이 온다면 당연히 부분적인 것은 폐하여 진다. 필요가 없어진다. 부분적인 것은 온전한 것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영원한 나라에 가서 최종혁의 <성경 해석>을 찾아볼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의 전쟁 시편>이든 <십계명>이든 필요없을 것이다. 먼저 천국에 간 성도 중 누군가가 뭘 알고 싶어서 이 땅의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온전한 것을 가졌는데 동시에 부분적인 것이 필요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확실히 할 것은, 부분적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부가 아닐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부가 아니어서 틀린 경우도 있다. 어떤 사실을 전달하면서 의도적으로 일부만 전달해서 상대를 속일 때가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앞서 수학의 예를 생각해 보면, 공식을 외워서 도형의 넓이를 구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보다 더 깊고 넓은 수학이 있는 것 뿐이다. 우리가 지금 성경을 통해 얻는 지식도 마찬가지다. 바르게 해석한다면 틀린 것을 얻게 되진 않는다. 다만 부분적일 뿐이다.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고, 그 때는 더 이상 부분적으로 알게 하는 은사들은 필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방언은 이미 그쳤다고 믿는다. 8절에서 방언에 대해서는 “그쳤다”는 다른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아마 먼저 그 필요가 다해서 그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성경이 완성될 쯤에는 이미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고, 그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통해 방언이 그쳤다고 증언했다. 그 방언이 부활한(?) 것은 꽤나 최근의 일이고,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 그 방언이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라고 볼 수 없다. 방언은 이미 그쳤고, 지식과 예언도 아직은 아니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는 폐하여질 것이다. 이 은사들은 부분적인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폐하여질 것이다.

어린 아이 vs 장성한 사람(11절)

다음으로 바울은 어린 아이와 장성한 사람을 대조하여, 은사들은 때가 있고, 따라서 때가 되면 폐해져야함을 말한다.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 아이와 같은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빨리 어린 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함의는 없다. 다만 어린 아이의 시절이 있고 장성한 사람의 시절이 있다는 말을 할 뿐이다. 그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은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뿐이다.

어린 아이였을 때, 어린 아이같이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정상적인 일이다. 오히려 어린 아이가 어른 같이 말하고 깨닫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어른이 어린 아이처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어른처럼 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의 일은 버려야 한다.

바울은 지금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그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은사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랑과 대조하면서 마치 은사 자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모든 은사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고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온다. 은사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반드시 버려야할 날은 온다.

셋째로 바울은 은사가 존재의 이유를 잃을 것이기 때문에 폐하여 질 것이라고 말한다.

희미 vs 분명(12절)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여기 거울이 잘 보이는 거울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잘 안보이는 거울이면 ‘희미한’이 맞고, 만약 잘 보이는 거울이면 희미하다기 보다는 ‘간접적으로’가 맞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바울의 논지는 동일하다. 지금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보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확실히 ‘지금’과 ‘그 때’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여러모로 불확실함 가운데 있다. 앞에 말한 것처럼 이 말씀 자체에도 그런 불확실함이 있다. 여러 해석의 여지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셨고 이 말씀으로 이 땅을 사는데 충분하게 하셨지만, 여전히 우리 입장에서는 불확실함이 있고 동시에 답답함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를 가진 사람도 많이 다르진 않다. 조금 더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겠지만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할 수는 없다. 지금 아무리 카메라가 발달하고 통신 기술이 발달해도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을 대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수 있는데, 굳이 다른 방법을 사용할 이유는 없다. 구름 하나 없는 여름 한낮에 밖에 나가면서 스마트폰으로 손전등을 킬 이유는 없다.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은사도 그렇다. 주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면, 굳이 주님이 어떤 분인지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는데, 굳이 그 말씀을 해석해서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정리하면 이렇다. 은사는 주어진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다. 그에 따라 이 땅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명확해 진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에 가치를 둬야 한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시간에 따라 가치를 다르게 부여한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캠프에서 며칠을 함께 할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 잠깐 만날 사람이면 굳이 이름도 몰라도 상관 없을 때가 있다. 이름을 물어봐도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3박 4일 혹은 그 이상을 같이 생활할 사람이라면 다르다. 만약 군대처럼 2년 정도를 같이 생활할 사람이라면, 이름 이상으로 그 사람의 성격, 특징 등도 알아야 할 것이다. 계속 회사 생활을 같이 하는 사람, 결혼해서 평생을 살 사람이라면 그 이상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함께할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중요도, 그에 따르는 관심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하루 어디에 가서 자고 오려고 집을 사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텐트에서 몇 년을 생활하는 사람도 없다. 시간에 따라 가치를 다르게 부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은사가 있고 영원한 사랑이 있다면, 둘 중 당연히 우리는 영원한 사랑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영원을 살지 않는다면 또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사랑이 영원하더라도 내가 영원히 살지 않으면,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둘 필요가 없다. 그냥 이 땅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투자하며 살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을 산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영원의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고, 그때까지 남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사랑이 남기 때문에, 사랑이 끝까지 남기 때문에, 사랑이 영원히 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진다.

결론(13절)

13절은 최종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제 사랑 없는 은사의 무의미함을 모두 말했다. 아마도 ‘사랑’에 대해서 얘기할 때 자연스럽게 성도들이 생각해볼 만한 다른 중요한 덕목이 ‘믿음’과 ‘소망’이기 때문에 이 마지막 절에서 믿음과 소망을 함께 언급하는 것같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어야할 것들이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아니다. 봉사와 구제와 헌신도 아니다. 심지어 전도도 아니다.

1:4–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이 땅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해야한다. 그런데, 바울은 굳이 그 중에 제일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왜일까? 여러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본문의 맥락에서 보면 사랑이 남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끝까지 남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믿음과 소망은 앞서 언급한 은사들처럼 그 목적을 다하고 더 이상 필요없어지게 되는 날이 온다.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이것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날이 온다. 그러면 더 이상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다. 보는 것으로 행하게 될 것이다. 소망도 마찬가지다.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가 소망하던 그 모든 것을 보게되면 더 이상 소망할 필요가 없다. 즉, 믿음과 소망이 필요없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은 하늘의 관점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 도착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집을 가기 위해 반드시 신발이 필요하지만, 집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 놓고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믿음과 소망은 그 할 일을 다 마치는 날이 온다. 하지만 그때도 여전히 사랑은 필요하다. 사랑은 남는 것이다. 사랑만이 끝까지 남는다. 영원까지 남는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다. 사랑이 가장 좋은 길이고 위대한 길이다. 사랑이 유일한 길이다.

도전

바울은 신령한 것(은사) 자체만을 경쟁적으로 추구하고 있던 고린도 성도들을 깨우치기 위해 이 말씀을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로 앞인 12:31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대한 은사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말했고, 그 가장 좋은 길이 사랑임을 13장에서 밝혔다. 그리고 14:1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힘있게 말한다.

그래서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우리의 결론이기도 하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는 것이다.

먼저는 지금까지 강조했던 것처럼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사랑이 모든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나도 아무 것도 아니고 내가 하는 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일의 효율이나 효과를 생각하기 전에 사랑을 생각해야 한다. 나의 평판이나 명예를 생각하기 전에 사랑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손해를 볼지, 반대로 이익을 볼지를 생각하기 전에 사랑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 그것이 사랑이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영원하다.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사랑이 남는다. 그러니 끊임없이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영원을 사는 사람의 자세다. 이 땅에서만 살고 끝날 것이라면 굳이 힘들게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것만 사랑하면 된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 사랑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영원을 바라보고 있다면, 영원한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신령한 것들, 즉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어쩌면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은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일시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것이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며 실제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수 있도록 은사를 주셨다.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사랑 타령만 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사랑이 최고야라고만 말하고 있으면 그것도 역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것이다. 그건 가수들이 하는 일이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은사를 통해 성도를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기회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지금이 유일하다. 하나님은 지금을 위해 나에게 은사를 주셨다. 지금을 위해 나에게 이런 재능을 주셨고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다. 그것들을 썩혀 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자기를 높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섬기라고 주신 것이다.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늘 나라를 이 땅에 보여주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니,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한다. 각자가 성령님께서 나에게는 어떤 역할을 맡기셨는지를 고민하며 교회 안에서 그 일을 해야 한다. 다같은 일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하면서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사랑이 모든 일시적인 일, 순간으로 지나는 일에 영원한 가치를 더한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뛰어난 은사를 가졌느냐를 가지고 평가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은사를 통해 얼마나 큰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가지고 평가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것이 결국 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으로 한 것만이 남는다.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사랑으로 하려고 하라. 놀라운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사랑으로 하려고 하라.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사랑으로 하려고 하라. 무엇이든 하고, 무엇이든 사랑으로 하라. 그럼, 그 모든 일이 영원한 가치를 갖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시리즈 설교를 통해 가장 많이 받은 피드백은 “너무 내 얘기 같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맞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사랑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고, 사랑하고 싶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실 것을 소망한다. 그 하나님을 믿고 순종으로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을 사모하자.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신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믿음과 소망이 그 임무를 다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알고 온전히 깨닫고 온전히 생각하며 온전히 사랑할 때가 올 것이다. 그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오늘 사랑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