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은 한다(Love does)4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설교자: 최종혁

예수님은 쉬운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었다.

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여기 세리나 이방인은 유대인들의 기준에서 죄인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남들과 똑같이 사랑 받기만 원하고, 사랑 받을 때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냥 쉽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경우는 최소한 나도 사랑을 하긴 해야한다고 생각은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쉬운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 즉 나를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생각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더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사랑이다. 여기서 원수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이 집안이 서로 원수인 경우가 아니다. 실제로 나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를 “박해하는 자”로 바꿔서 말씀하기도 하셨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절대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할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그런 사랑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 무엇인지를 살펴봤다. 무례하게 행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이타심을 말하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에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이타심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할 때 우리의 좁아진 세상은 비로소 넓어지게 된다. 그때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이게 된다.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남에게 무례하게 행하는 것은 내가 중심인 나만의 좁은 세상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중심인 참된 세상은 그렇지 않다. 바로 그런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랑의 모습은 그런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 나 중심의 세계관과 충돌할 때, 사랑이 보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사랑이 악을 만났을 때 보이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어려운 사랑을 직접적으로 실천해야하는 상황이다.

오늘 말씀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사랑은 악한 일을 당할 때 성내지 않는다. 또한 그 악한 일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악한 일을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리를 기뻐한다.

성내지 아니하며

“성내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동사의 물리적인 의미는 ‘날카롭게 하다, 뾰족하게 하다’인데, 여기서는 사람에게 사용되어서 그런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예민하다”가 본래의 뉘앙스를 가장 잘 전달하는 번역일 것이다. 예민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떤 자극에 쉽게 반응한다. 쉽게 동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과잉반응한다. 짜증낸다.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민함’에서 먼저 생각해볼 만한 특징은 ‘쉽게’ 혹은 ‘빨리’ 반응한다는 점이다. 이과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분노에 대한 역치가 낮다. 사소한 자극에도 쉽게 분노한다는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사람마다 분노에 대한 역치 혹은 예민함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쉽게 분노하는 상황이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더 쉽게 분노하기도 한다. 다른 모든 차를 비판하면서 분노 중에 운전하는 사람이 있다. 너무 빨리 간다고 뭐라고 하고 너무 천천히 간다고 뭐라고 한다. 조금만 자기 주행에 방해가 되면 연신 클락션을 울린다. 빔을 쏜다. 재빨리 옆으로 따라 붙어서 한번 노려봐 준다.

물론 사고의 위험 때문에 그런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분노의 감정이 먼저 있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 남이 나에게 ‘잘못’했다고 여겨질 때, 쉽게 분노해서 행동한 것을 ‘안전’ 때문에 그런거라고 포장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이다. 과잉대응하는 경우도 분노가 먼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하다.

잘못을 한 차종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하는 것도 그렇다. 트럭이나 비싼 외제차는 그냥 넘어가면서 경차면 그렇게 하는 것도 안전 운전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분노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실 무례함과 마찬가지로 분노도 상대적으로 더 강하거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서 더 많이 보인다. 분노를 표현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도로에서 남이 나에게 잘못을 한 경우 나는 상대적으로 강자가 되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분노를 표출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잘못을 한 상대가 다른 면에서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면 자연스럽게 분노 조절이 되는 것이다.

운전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상황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조금만 귀찮게 굴어도 쉽게 화를 내서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려는 부모들도 있다. 부모가 뭐를 하라고 할 때마다 그것을 잔소리로 듣고 짜증내는 자녀들도 있다. 남편이 집안일은 자기에게만 다 맡긴다고 쉽게 신경질내는 아내도 있고, 아내에게 집에서 뭐했냐고 퇴근만하면 화를 내는 남편도 있다. 다 그 입장을 들어보면 일리가 있다. 그 사이에 문제가 있다면 해결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쉽게 분노한다면, 그것은 내가 사랑 없이 행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이런 분노의 문제가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기록된 말씀은 찾기 어렵지만 분명 그런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특히 서로의 재능과 성취를 자랑하면서 서로를 자극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은 고려하지 않고 무례하게 행하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있었던 다툼과 분쟁은 오래참음의 결과가 아니라 쉽게 분노한 것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더 사랑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사랑으로 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린도 교회 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를 자극할 수 있다. 정말로 어떤 나쁜 의도도 없이 했던 말이나 행동이 어떤 성도를 자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랜만이야”라는 반가운 인사가 “넌 그동안 교회 안나오고 뭐했어”라는 비판으로 들리기도 한다. “머리 하셨네요?”라고 했는데 “3주 됐는데요?”라는 차가운 답변이 돌아올 때도 있다. 강대상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내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쁠 때도 있다. 나에 대한 말투나 태도가 항상 마음에 들지 않는 성도가 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로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나에게 악하게 대하는 성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분노에 대한 역치가 낮으면, 쉽게 분노하게 된다. 반드시 그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속으로 분노를 쌓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분노하고 있는 것은 맞다.

사랑으로 행한다면 무례하지 않기 위해서 서로에 대해서 더 조심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모두가 나를 잘 알고 나에게 맞춰주기를 바랄 수는 없다. 아무리 교회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서로 예민하지 않다면, 쉽게 성내지 않는다면,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교회 안의 많은 오해와 다툼이 사라질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 ‘분노’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일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분노한 이야기도 자주 볼 수 있지만, 하나님만큼은 아니다. 복음에 대해서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있는 말씀은 로마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울은 그 시작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면 사실 복음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분노)는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한다.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은 진노의 비를 땅에 내리셔서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을 진멸하셨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죄가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불과 유황을 비같이 내리셔서 그 성의 사람들을 멸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사 시대에도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백성들을 다른 민족의 손에 넘기셨다.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결국 마주하게 될 것도 하나님의 진노다. 요한계시록은 그런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진노하는 하나님이셔서 결코 우리가 가까이하면 안되는 존재인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드러내셨다.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실제로는 쉽게 분노하지만 말만 이렇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시다. 쉽게 분노하지 않으신다. 만약 하나님이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 심지어 하나님을 부정할 뿐아니라 적대적인 사람이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현실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한 무신론자가 강연 중에 하나님께 5분의 시간을 줄테니 자신이 했던 이 모든 말들로 인해 자신을 쳐서 죽여 보라고 했다고 한다. 5분이 지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신론자는 그것이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것이 증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쉽게 분노하지 않으시는 분,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앞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했지만, 사실 그 전에 하나님은 엄청난 인내를 먼저 보여주셨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신다.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할 때도 심판 받아 마땅한 것 같은 사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회개할 때 기쁘게 그를 받아 주신다. 아합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었다. 니느웨가 회개했을 때도 그렇게 하셨었다. 하나님은 진노하고 심판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신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고 분노하고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신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기다리신다. 기회를 주신다. 이런 하나님을 중심에 둔 우리는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예민함’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예민함은 그 자체로서 죄는 아니라는 점이다. ‘무례’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상황이나 관심, 입장을 잘 헤아려야 한다는 얘기도 했었는데, 그것도 예민함(세심함)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무엇’에 예민하냐에 따라 예민함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죄가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변화가 하나님의 중심에서 나 중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여기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에 대하여 예민한 것은 긍정적인 것이지만 나에 대하여 예민한 것은 부정적인 것이 된다.

예수님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당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셨을 때다. 그때 예수님은 분노하셨다. 과격해 보일 정도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예민하셨고, 그것이 그렇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의로운 분노이며 필요한 분노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의 모습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는 전혀 분노하지 않으셨다.

벧전 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우리 기준에서 볼 때 분노할 만한 모든 이유가 있으셨다. 예수님에 대한 고소가 불법적이었고 판결이 불법적이었다. 예수님에 대한 조롱과 비난은 예수님께 전혀 합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노하지 않으셨다. 싸우지 않으셨다.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래서 성냄으로 혹은 반대로 성내지 않음으로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결국 내가 쉽게 성내는 이유, 쉽게 짜증내고, 쉽게 신경질을 내고, 쉽게 마음이 동요하고 분노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악하게 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에 예민하지 않고 나에게 예민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에게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는지가 아니라 나에게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이 분노하라고 할 때는 오래 참고 오래 참으라고 할 때는 분노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공격당할 때는 오래 참지 않는 것이 어렵고, 나의 영광, 나의 자존심, 나의 평판, 나의 유익, 나의 기쁨, 나의 만족 등이 공격당할 때는 오래 참는 것이 어렵다. 하나님이 아닌 나에게 민감한 것, 이것이 진짜 문제다.

예민한만큼 더 쉽게 성내고 더 크게 성낸다. 또한 그것이 결국 사랑의 크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의로운 분노를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만큼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를 향하는 예수님처럼 나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예민한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쉽게 성내는 것은 교회를 쉽게 무너뜨린다. 성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닌 나를 위해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를 위해 싸워주지 않는 한 그 싸움으로 하나될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 싸울 때 우리는 하나될 수 있다. 사랑은 그렇게 한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다음으로 언급된 사랑의 모습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 표현은 여러모로 이해될 수 있긴 하지만, 상대가 행한 악한 것(일)을 잊지 않고 계속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악한 것’은 그냥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특별히 나에게 행해진 악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되돌려줄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표현은 마치 장부에 빚을 적어 두는 것처럼 자신에게 행해진 악을 기록해두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랑은 상처를 받았더라도 그 상처를 계속해서 바라보면서 상대에게 상처 입힐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악을 잊는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악에 대해서 성내는 것이 즉각적인 반응이라면 그 악을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은 지속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는 것(소인배?)보다 화를 내고 푸는 것(대인배?)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경은 둘 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쨌든 둘 다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는 쉽게 파괴된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우리는 서로에게 악을 행하게 되는데, 그 모든 악을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의 끈은 약해지고 결국은 끊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이런 일들은 생각할수록 더 악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악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생각해보니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상대의 입장이 이해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혼자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계속해서 내 입장에서만 그 상황을 반복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워지기가 쉽고, 그만큼 더 악한 일로 여기기 쉽다. 그러다 보면 그 일이 악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넘어서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했던 다른 행동들도 악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이 바로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잊는 것이다. 그냥 잊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하고 기억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기억에서 지우실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은 그 죄를 다시 끄집어 내서 우리에게 해가 되는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모습이다. 내가 해를 당했더라도 용서하고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법적 소송이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였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행한 악한 일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바울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물었다(고전 6:7). 그들이 불의를 기억하고 불의를 돌려주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2장을 보면 바울은 자신을 근심하게 했던 사람들을 용서한 내용을 기록했다.

고후 2:5–8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나에게 이런 악을 행했고 내가 이 정도 해를 입었으니, 적어도 그 사람도 어느 정도의 벌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도들에게 그를 용서할 뿐 아니라 위로해줄 것을 당부한다. 그것이 회개한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분노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기억에 대해서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은 잘 잊고 ‘잊어야할 것’은 정말 잘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어떤 성도를 볼 때, 그 성도가 나에게 행했던 악한 것이 떠오른다면, 이 말씀을 함께 떠올려야 할 것이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내 생각을 매어두는 것은 다른 얘기다. 용서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그렇게 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다음 사랑의 모습은 악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중요한 균형 잡힌 태도를 말해준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악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성내지 말아야 하고 또한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한 일 자체를 용납하거나 괜찮은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된다. 사랑은 불의를 당할 수는 있지만, 불의 자체를 기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랑과 진리는 언제나 함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도 정확히 그러했다. 사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지금까지 살펴봤던 사랑의 모습만 가지고 계셨다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실 이유가 없었다. 그냥 우리 죄를 용납하고 없는 셈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유익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셨기 때문에, 직접 죄인을 찾아오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을 만드신 것이다.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하여 죄를 제거하셨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을 하셨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다.

때로 진리는 사랑과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진리를 선택하거나 사랑을 선택해야할 것만 같을 때가 있다. 하지만 진리를 벗어난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사랑 없는 진리가 파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 없는 사랑도 그렇다. 불의를 기뻐하는 사랑은 관계를 무너뜨릴 뿐이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면에서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았다. 1장에 언급된 교회 내의 분쟁을 보라. 만약 그들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았다면, 그 안에서 교회를 나누는 분파가 생겨났을 때, 사랑으로 그 죄를 지적하고 하나되어야 할 것을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자체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 어디에서도 사랑은 절대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불의를 기뻐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의 모습을 불편해 할 수 밖에 없다. 상대가 말하는 진리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내가 불의를 기뻐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가 불편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얼마나 이런 죄에 대한 사랑의 대면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또 다른 분파를 만드는 것으로 반응했다. 불의에 또 다른 불의를 행하는 것으로 반응한 것이다. 이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하나되는 것보다 나의 세력을 키우는 것을 더 기뻐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누군가 먼저 다른 성도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면서 자기들만의 분파를 만들었을 때, 기뻐했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저쪽에서 먼저 해준 것이다. 죄책감을 들어내고 나도 그렇게 불의를 행할 명분을 찾아서 기쁜 것이다. 만약 다른 분파의 성도 중 하나가 어떤 죄로 인해서 넘어졌다면, 그 사실로 인해서도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도가 죄로 넘어진 것에 가슴 아파하거나 긍휼의 마음을 품기보다, 도리어 그것으로 자신들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는 면에서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5장에 나오는 근친상간의 문제도 그렇다. 이 분명한 죄를 이들은 어떤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냥 용납했다. 어쩌면 이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 불의를 기뻐하는 것을 사랑으로 포장한 것 뿐이다.

6장에 기록된 교회내 송사의 문제에서도 고린도 교회는 불의를 행하고 속였다. 아마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법대로 하는건데 뭐가 문제냐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법대로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사랑으로 성도를 대하지 않았고, 그러면서 불의를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른 성도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원하는대로 행했던 모든 일들도 그렇다. 만찬 시간에 기다리지 않고, 예배 시간에 서로 방언과 예언을 하려고 하고,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고 하는 모든 일들이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이 더 나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한 일을 자랑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해서 다른 성도가 더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라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불의를 그렇게 포장한 것 뿐이다.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불의는 불의다. 나의 불의든 남의 불의든,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도 이런 사랑 없는 모습으로 행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불의한 일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생각보다 더 자주 그렇게 한다. 다른 사람의 불의가 나에게 유익이 될 때 그렇게 한다.

여러 방면에서 다른 사람의 불의를 나의 유익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시기의 대상이었던 성도가 어떤 죄로 인해 넘어졌을 때다. 눈엣가시같았던 전교 1등이 부정 행위를 한 것이 발각되어서 내가 전교 1등이 된 것과 같은 상황이다. 겉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지만 내심 기쁘다. 이번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사실은 내가 1등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안에 시기심이 있으면 충분히 불의를 기뻐할 수 있다. 성도들에게 나보다 더 사랑(인정) 받는 누군가가 있으면, 은근히 그 사람이 어떤 실수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도 비슷하다. 나의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의를 기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의를 기뻐하는 또 다른 경우는 그것을 나의 불의에 합당한 이유로 삼기 때문이다. 단순히 ‘교회에서 그래도 인정받는 저 사람도 저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불의를 합리화 할 수도 있다. 혹은 직접적으로 내가 불의한 일을 당한 경우라면 내가 먼저 당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불의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혹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상대가 먼저 불의하게 행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꼭 나도 불의를 행하기 위해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불의를 행했을 때,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기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불의를 기뻐하는 모습이다.

이보다 더 자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불의를 기뻐하게 만드는 나의 유익이 있다. 바로 우월감이다.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얘기할 때 최소한 나는 지금 그 죄의 문제가 없다는 생각에 우월감을 느끼고 기분이 좋다. 그래서 자꾸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한다. 마치 성도에게 관심이 많고, 그들의 죄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사랑해서 그러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상대적으로 내가 더 낫다는 우월감에 젖어서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다.

성도와 함께 교제할 때, 항상 다른 성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이 대부분 그들의 실수나 잘못, 죄와 관련된 것들이라면, 내가 정말 사랑으로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며 불의를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 잘 점검해 봐야 한다. 내가 그런 죄를 분별하는데 탁월한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직접 그 성도를 대면하여 세워주는데 사용되어야지, 다른 성도와의 교제거리(가십거리)로 삼아서는 안된다. 나 혼자 그 죄를 대면하기 어려울 때, 도움을 얻기 위해 다른 성도의 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고 있다면 멈춰야 한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불의를 지적하는 것도 그런 비슷한 측면에서 불의를 기뻐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사랑은 죄를 용납하지 않고 대면하지만, 때로 우리는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측면에서 불의를 기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성도의 죄를 알게 되었을 때 마치 죄를 지적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처럼 기뻐하는 것이다. 죄를 대면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다. 무거운 책임이다. 기쁘고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불의를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사랑으로 해야하는 그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불의를 기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다. 불의에 잠잠한 것으로 불의를 묵인하고, 그런 불의가 교회 안의 다른 지체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그냥 두는 것은 결국 불의를 기뻐하여 행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리를 기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랑과 진리는 함께 일해야 한다.

이 부분에 있어 우리는 조심스러워야 하지만 동시에 담대할 필요도 있다. 특히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좋은 그리스도인이기 위해 사랑의 이름으로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오래 참음으로 마치 그런 불의도 괘찮은 것처럼 보여지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세상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더 그럴 수도 있다. 지금은 옳고 그름보다 좋고 싫음이 더 중요한 가치로 평가 받는 세상이다. 옳고 그름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없다면 그런 것을 찾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이 없는 것이다. 진리와 불의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경이 말하는 불의를 용납하고 진리를 나타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보다는 상대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개인주의의 영향도 있지만 이런 상대주의의 영향도 교회가 진리에 바로 서는데 심각한 장애가 된다. 우리는 불의에 침묵함으로 불의를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아드리안 로저스, 오류로 하나가 되는 것보다 진리로 분열되는 것이 낫습니다. 위로하다가 죽이는 거짓보다 상처를 주고 치유하는 진리을 말하는 것이 낫습니다. 거짓을 말해서 사랑받는 것보다 진리을 말해서 미움을 받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잘못하는 것보다 홀로 진리에 서는 것이 낫습니다. 거짓으로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진리로 궁극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낫습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 없는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은 이렇게 행한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이렇게 행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참 모습이다.

도움

정리하면 이렇다. 사랑은 누군가 나에게 악한 일을 행할 때 쉽게 성내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싸우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 일을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용서하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악한 일을 묵인하고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그렇기에 같은 불의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하고 다른 성도도 불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다. 이것이 악한 일을 당할 때 사랑이 보이는 모습이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쉽지 않은 사랑이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해서 든 생각은 나에게는 이 반대의 모습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하나님께 악을 행하면 분노 조절이 잘되고 나에게 악을 행하면 분노 조절이 안된다. 속에서 끓어 오르는 감정을 삭히는 것이 쉽지 않다. 나를 위해서 싸우고 싶다. 그런 일은 잘 잊혀지지도 않는다. 용서한 일도 다시 떠오른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 싶을 정도로 과거의 일이 다시 다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상대를 더욱 몰아 붙인다. 절대로 그 사람이 더 성장하기를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불편한 진리보다 편안한 불의가 낫다. 나만 괜찮다면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좋은게 좋은거다. 서로의 불의를 조금씩만 눈감아주면, 관계는 훨씬 수월해진다. 진리를 지키고 선포하는 것보다 내가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것이 더 좋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을 사랑으로 포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성내고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포장할 수 있다. 내가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는 것도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포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포장 안에 정말로 무엇이 들어있는지, 나는 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다. 사랑의 포장으로 나를 보호하고 나의 유익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과는 다른 사랑, 차이나는 사랑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모든 악에 사랑으로 반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도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위로하고 힘을 더하신다. 우리 사이에 ‘악’이 없을 순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을 한다면, 우리는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과 우리의 차이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이 사랑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 하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랑으로 해야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