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은 한다(Love does)5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설교자: 최종혁

구원 받은 여러분들에게 성령님은 은사를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그의 뜻대로 주시는 이 은사를 통해 각 성도가 주님을 섬기고 또한 서로를 섬기고 세워줄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은사는 더 눈에 띄고 어떤 은사는 그렇지 않지만, 우리 몸의 각 지체가 그러한 것처럼 어떤 은사도 다른 은사보다 더 특별하거나 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 은사를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되어 일할 뿐입니다. 역할이 다를 뿐, 그 자체로서 더 존귀하거나 특별한 은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마치 어떤 은사들을 더 특별하고 위대한 은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은사들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다 사도가 되고 싶어하고 선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교사가 되려고 하고 능력 행하는 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병 고치고, 방언하고, 방언을 통역하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그 은사만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이것이 옳지 않습니다. 아니,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는 온 몸을 파괴하는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이 몸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그 일, 주님을 위한다고 하는 그 일들이 오히려 주님의 몸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무너져도 나는 아무 상관 없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은 자라면 여러분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큰 은사를 원한다면 이제 제가 무엇이 큰 은사를 만드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큰 은사와 작은 은사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은사든 큰 은사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길이며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만약 제가 사람의 방언을 다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사람의 방언이 아니라 천사의 말까지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교회를 튼튼히 세울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악기일 뿐입니다. 누구도 내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소리 나지 않고 울리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말입니다.

방언은 못알아듣는 사람이 많으니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럼, 예언은 어떨까요? 제가 예언을 잘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심지어 그동안 누구도 알지 못했던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제가 예언한다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세워지지 않을까요?

아, 지식 만으로는 안될 것 같습니까? 그럼, 저에게 모든 믿음이 있다고도 가정해 봅시다. 그 믿음으로 산도 옮길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말하는 것을 능력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 정도면 충분히 대단한 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 영향력은 그야 말로 엄청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사랑 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 없이 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금은 괜찮고, 어느 정도는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없이도 우리는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 수도 있습니다. 나의 가진 모든 것, 나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을 사랑없이 할 수 있습니다. 아무 유익도 없는 그 일을 모든 것을 바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금씩 이해가 되실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의미있게 만듭니다. 모든 은사를 위대한 은사로 만듭니다. 사랑이 그렇게 합니다. 그럼, 그 사랑이 뭘까요?

어쩌면 사랑에 대해서 여러분도 충분히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은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행하는지를 알고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참 사랑이신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하는 사랑’의 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로 주님을 닮아 사랑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할 때, 우리는 그것을 참기 어렵습니다.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이 있고 나를 위해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순간의 감정에 따라 행하지 않고, 되받아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오히려 상대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세상에 살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은 사랑과 정반대에 있는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과 성취를 시기하고, 나의 능력과 성취를 자랑하는 것, 둘 다 사랑이 아닙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시기 대신 그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랑 대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누가 무엇을 하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유익을 얻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핵심에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사랑은 이기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무례하게 함부로 행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운 일을 하거나 남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나의 결정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주든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궁극적인 유익을 구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죄에 쉽게 반응해서 동요하고 분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서하고 잊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불의 자체를 기뻐하지는 않고 오히려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죄를 그냥 괜찮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남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불의를 지적하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도 않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에 사랑은 진리와 함께 일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합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사랑에 대해서 쓴 편지의 내용이다. 이것이 사랑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고린도 교회에 결핍되어 있는, 그래서 꼭 필요한 사랑의 모습을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사랑이 보이는 마지막 모습을 4가지 포괄적인 표현을 써서 묘사한다.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모든 것”

이 말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든 것”일 것이다. 바울은 단순하고 비슷한 표현을 빠르게 반복한다. 사랑은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는 것이다. 이 동사들은 의미상 구별되는 부분보다 겹치는 부분이 더 많다. 지금까지 말했던 사랑의 모습을 좀 더 포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 앞에 “모든 것을”이라는 같은 단어를 4번 반복하여 강조했다. 포괄적인 의미의 동사들을 더 포괄적으로 만든 것이다. 마치 테이프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붙여서 물 샐 틈을 막는 것과 비슷하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어쩌면 과장법이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사랑의 모습, 특히 6절을 생각해 보면, 사랑은 불의를 그냥 용납하거나 못본 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불합리함을 그냥 참기만 하는 것도 사랑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만 있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 “모든 것”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따지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앞서 말한 그 “물 샐 틈”을 막기 위한 표현이다. 즉,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상황을 배제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을 때만 사랑하려고 하는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을 배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준으로 정해놓은 한계를 배제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려 하지 않을 때,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을 때를 배제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너무 쉽게 또한 너무 빨리, 너무 자주 마주하는 자신의 한계일 수 있다. 누군가는 고군분투 끝에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되는 한계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혹은 어떤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그럴 수 있다. 어떤 경우든 7절 말씀은 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랑은 한계가 없다.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을 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듯이, 사랑은 그렇게 한다. 그래서 많은 성경 학자들은 7절을 부정형의 문장으로 바꾸면 그 뉘앙스를 더 잘 드러낸다는데 동의한다. ‘사랑은 참지 못할 것이 없고 믿지 못할 것이 없고 바라지 못할 것이 없고 견디지 못할 것이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수동적인 반응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사랑을 능동적인 힘으로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서 사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사람이나 상황을 달라지게 만든다. 우리는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할만한 상황에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하지 못할 상황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강력한 힘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듯, 우리의 사랑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이제 이 4개의 동사들을 살펴보자.

모든 것을 참으며

사랑의 모습을 나열하면서 ‘참는 것’이 계속해서 언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언급된 모습도 “오래 참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언급된 모습도 “견디는 것”이다. 중간에 언급된 여러 모습들도 기본적으로는 ‘참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래서 ‘오래 참음’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라는 말도 했었다.

여기서 말하는 ‘참는 것’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사실 같은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는 단어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만한 특별한 측면이 있다.

여기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스테고’인데, ‘스테고사우르스(지붕 도마뱀)’의 ‘스테고’가 같은 헬라어 어원에서 유래되었다. 명사로는 지붕이나 덮개를 의미하고, 동사로는 ‘덮다. 보호하다. 지지하다. 견디다’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단어다. 그래서 개역 개정은 “참으며”로 번역했지만, 다른 번역들(새번역, 현대어, 우리말, 쉬운 성경 등)은 종종 “덮어 주며”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다른 말씀을 보면 그런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고전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위 구절은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면서 한 말이다. 바울은 먹고 마실 권리도 있고, 결혼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따로 직업을 가지고 일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한 합당한 댓가를 받으면서 살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권리가 있다는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범사에 참았는데, 그 이유는 복음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손해 보는 결정을 한 것이다.

지붕 혹은 덮개의 이미지가 여기에 있다. 만약 지붕이 없는 집에 산다면 외부의 혹독한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아야 한다. 추위와 더위에도 그대로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그 모든 것과 싸워야 한다.

이 말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지붕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 모든 싸움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대신 비를 맞고 대신 눈을 맞는다.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고 차가운 바람도 막아준다. 지붕은 그렇게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그 혹독한 환경을 참고 견딘다. 이것이 이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자신이 가진 권리를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도 분명히 밝힌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죄도 아니다. 먹고 마시는 것, 결혼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교회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받는 것도 죄가 아니다. 오히려 당연히 그렇게 해야한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고린도의 상황에서,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로 인한 손해를 감수했다. 유혹과 싸웠다. 그렇게 복음을 보호하고 지켰던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참는다는 7절의 표현은 이런 면에서 강조점이 있다. 그냥 참고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내가 희 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사랑 없이 행하고 있었는지를 반복해서 살펴 봤었다. 이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를 보호하지 않았고 참아주지 않았다. 죄의 영향에서 다른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죄를 드러내고 대면해야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반대로 허물을 감싸주고 양보해야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싸우며 그 죄를 더 드러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를 지켜주기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도리어 자기 권리를  내세우고 자기 욕심에 따라 행했다.

어쩌면 그 중 누군가는 “나도 참을만큼 참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어쩌면 실제로 그 상황을 지켜본 누군가도 그 말에 동의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 한계가 없다. 따라서 “참을만큼”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형제(자매)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참는 것이 사랑이다. 그를 위해 내가 대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사랑이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 이사야 53장이 잘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다. 암탉이 자기 새끼를 자기 날개로 덮어 그들을 보호하듯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셨다. 하지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기위해 그렇게 하셨다. 그 죄의 무게를 대신 감당하셨다. 중간에 힘들다고 멈추지 않으셨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이고,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의 모습이다. 서로가 서로의 지붕이 되어 주는 것이다.

전에 한 청년이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교제하면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정말로 아들을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답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여서 말했다. 근데 아들 뿐 아니라 이 앞에 있는 청년을 위해서도 죽을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아마 모든 성도들이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느냐 아니냐는 차치하고, 그런 심각한 상황에 있을 때는 나를 희생해서라도 남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사랑이 있다. 형제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작은 결점을 덮어주는 것이다. 자매를 지키기 위해 그의 연약함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 더 나아가서 나에게 악하게 대했던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그런 기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남편이 혹은 아내가 상대의 단점을 다른 사람에게 계속해서 말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그렇게 배우자를 유머의 소재로 삼는 경우가 있다. 상대가 사랑으로 그런 일들을 덮어 주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을 계속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몸의 지체가 서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 몸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지체가 있다면, 그 지체는 최대한 빨리 몸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 전체를 죽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지체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에게 죄의 문제가 있더라도, 그가 아니라 내가 몸을 죽이는 지체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남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혹도 있고 답답함도 있다. 오해를 받아야할 수도 있고, 그가 당할 고난을 내가 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참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언제나 끝까지 참아주는 것이 사랑이 하는 일이다. 누구를 위해 대신 죽어주는 사랑보다, 사실 이런 사랑이 우리가 매일 해야하는 사랑이다.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이렇게 모든 것을 참는 사랑을 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그 사람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다. 언젠가부터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사람은 믿을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할 존재다”라는 말이었다. 어떤 의도인지 알고 충분히 공감하지만, 사실 이 말씀에 따르면 그렇게 구별해서 말할 수 없다. 믿고 소망을 놓지 않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모든 것”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그 맥락에서 이 말씀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믿기를 그치지 않고 바라기를 그치지 않는다.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이제는 어떤 기대도 없어. 이게 끝이야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의심하려하기보다 먼저 믿어 주는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때로는 그 믿음이 배신을 당할 수 있고 그래서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런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럴 수 있음을 알지만 그것을 먼저 생각하면서 거리를 두거나 하기 보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믿음이 계속해서 배신을 당하면 우리는 더 이상 믿지 않으려고 한다. 어차피 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희망을 버린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기대해봐야 실망만 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럴 때조차도 그것을 최종 결론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에게 정확히 이렇게 한다. 자녀가 아무리 엇나가도 부모는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부모의 믿음을 저버려도, 부모는 여전히 자녀에 대한 희망를 놓지 않는다. 옆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모는 그렇게 한다. 다른 이유가 있지 않다. 그 아이가 과거에 어땠고 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똑같은 사실을 두고 옆에 있는 사람은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같은 반의 친구를 괴롭혀도 우리 애는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모인 것이다. 그 정도로 부모는 자녀를 말도 안되게 믿고 바란다. 다른 이유가 없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런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결과를 마주한다. 교회를 떠났던 자녀가 부모의 오랜 기도 끝에 교회로 돌아온다. 결코 구원 받지 못할 것 같았던 남편이 아내의 사랑 때문에 구원을 받기도 한다. 그 반대의 일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포기해도 사랑하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원래 사랑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징계를 받고 교회에서 출교되었던 성도가 다른 성도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회복되기도 한다. 예전에 한 성도가 자신이 교회를 떠나 방황할 때, 자신을 여전히 구원 받은 성도로 대해줬던 성도들의 사랑 때문에 자신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간증했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성도가 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됐나보다 했던 성도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했던 성도들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 한 영혼이 돌아왔던 것이다.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인 것이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행하셨다.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성도들 중에 그런 간증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사실 구원 받은 자라면 모두가 다 동일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구원 뿐 아니라 그후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도대체 왜 구원하셨을까 싶을 때가 있다.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신다.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라고 하신다. 성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끝까지 믿음과 소망을 버리지 말라고 하신다. 사랑은 그렇게 한다. 부부가 서로에게 그렇게 한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그렇게 한다. 세상에서도 우리는 그런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교회에서 우리는 서로 그렇게 사랑한다.

앞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준 몇 성도들로 인해 한 영혼이 회복되었다는 말을 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어떨까. 의심하고 정죄하기 보다 서로 믿어 준다면 어떨까. 다 끝났다고 포기하기 보다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기대한다면 어떨까. 그 사랑이 우리를 바꿀 것이다. 그 사랑이 다른 성도를 변화시킬 것이고 나를 변화시킬 것이다.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다. 사람이 믿을만하고 사람이 소망을 둘만해서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혹시 어떤 사람 자체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버려야 한다. 그것만큼 위험한 생각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믿을 존재가 아니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결론은 아니다. 사람은 믿을만하지 못하고 소망을 둘만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고든 피,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절대로 멈추지 않으며, 그래서 판단을 그분의 손에 맡긴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절대 소망을 잃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하나님의 판단은 터무니없는 인간의 타락한 현장에서도 여전히 우세하다. 이것이 신자가 견딜 수 있는 이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참고, 롬 8:39)으로 감동된 삶은 결국 성령에 의해 같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끝까지 바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성도에 대한 믿음과 소망도 그치지 않고 계속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잃지 않으시는 한, 하나님께서 그 주권을 내려놓지 않으시는 한,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소망할 수 있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믿고 소망할 수 있다. 사랑은 그렇게 한다.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제 마지막 15번째 사랑의 모습이다. 결국은 이 모든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다.

더 이상 참지 않고 폭발하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한다. 나를 자랑하고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남에게 하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한다. 분노와 싸워야 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한다.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에 잠잠하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한다.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싸워야 한다. 더 이상은 희망을 가질 어떤 이유도 없고 오히려 희망을 버려야할 모든 이유가 있다고 생각될 때, 여전히 희망을 가지기 위해 싸워야 한다. 사랑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싸워야 한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가 바로 그 ‘싸움’ 중에 견뎌내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식장 같은 곳에서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사랑의 모습은 지금까지 말한 모든 사랑의 모습이 결혼식장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보여야 하는 모습임을 강조한다. 내 마음이 내 배우자의 어떤 모습을, 내 자녀의 어떤 모습을, 성도의 어떤 모습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그때 보여야 하는 모습인 것이다. 사랑하기 어려울 때,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모습이다.

뒤의 말씀에서 보게 되겠지만, 사랑은 그 자체로서 영원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영원한 사랑이 우리 중에 항상 거하고 있느냐다.

결혼 서약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서로 다짐한다. 우리는 구원 받은 형제 자매들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서로에게 이렇게 서약해야 한다.

사랑하고 싶을 때나,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나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때나, 이해할 수 없을 때나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오래 참지 않고 온유하지 않아도 사랑하겠습니다. 나를 시기하고 당신을 자랑하고 교만할지라도 사랑하겠습니다. 나에게 무례하고 자기 유익만을 구해도 사랑하겠습니다. 나에게 성내고 복수하기 위해 내가 행한 악한 일을 기록하고 있어도 사랑하겠습니다. 불의를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않아도 사랑하겠습니다. 나에 대하여 참지 않고 믿지 않고 바라지 않고 견디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준다면 어떨까? 기분 나쁠까? 아니다. 너무 좋을 것이다. 나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날 것이다. 말 뿐 아니라 실제로 나에게 누가 이렇게 해준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면 아무도 이 사랑을 경험할 수 없다. 내가 먼저 하면 모두가 이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먼저하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할 사랑의 마지막 모습이다.

도전

사랑은 한다.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아니어서 하지 못한다. 이런 사랑은 누구든 그냥 마음만 굳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없고, 사실 누구도 이런 사랑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손해보는 일은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런 사랑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바꾸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고 역사하셨을 때, 우리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최소한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은 주셨다. 이것을 아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끝으로 사도 요한이 기록한 이 말씀을 함께 읽어 보자.

요일 4:10–1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9–2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에게는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그러니 이제 핑계를 내려놓고 사랑하자. 사랑은 하는 것, 해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