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부자여,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본문: 누가복음 16장 19~31절
설교자: 조정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와 그 대문 앞에 있던 거지가 서로 상반된 삶을 살다가 죽고 완전히 다른 결말(천국/지옥)을 맞이한다”는 간단하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복음을 거절하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도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표현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이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비유를 바리새인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과 율법과 전통에 대한 종교적 열심으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이 땅에서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고 즐기지 말고 영원한 세상에서 칭찬받고 더 많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지혜롭게 재물을 사용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재물로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데 재물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가르침을 비웃었습니다. 돈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자는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자,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 재물을 충분히 누리면서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렇게 해도 지옥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책망하기 위해 예수님은 정교하고 지혜롭게 이야기를 구성하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보다는 “어떻게 하면 지옥에 들어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놀라운 비유를 통해 부자의 삶이 가져온 영원한 결과, 그 심각성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재물을 사용하는 모습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두 사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삶을 세 부분으로(살았을 때, 죽었을 때, 죽음 이후) 나눠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1. 이 땅에서의 삶(19~21절)

부자는 아주 호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자색 옷으로, 바다에 사는 뿔고동처럼 희귀한 생물에서 염료를 얻어야 만들 수 있는 고가의 옷이었습니다. 속옷은 맨살에 부드럽게 착용할 수 있는 고운 베옷이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들 만큼 호기롭게 돈을 쓰는 삶이었습니다. 날마다 배가 터질 만큼 많은 음식을 풍족하게 먹고, 높은 관직에 있는 친구들이나 부유한 계층들과 어울리며 잔치를 즐겼을 것입니다.

이런 삶 자체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뒤이어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삶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고발합니다.

나사로는 거지였습니다. 그는 버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건강이 좋지 못하거나 장애가 있어 가족이나 친척이 버렸을 것입니다. 그의 몸은 헌데 투성이었습니다. 염증이나 상처에 의해 고름이 생기고 몸이 상하는 궤양이 온 몸에 가득했습니다. 그런 그를 버린 이유, 그리고 다른 곳이 아닌 정확하게 부자의 대문 앞에 버린 이유는 그것이 거지 나사로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부자에게 은혜를 입고 살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부자는 집을 드나들 때마다 자기 문 앞에 있는 거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신다’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자였다면 대문 앞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 거지에게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1절을 보면 부자는 음식을 따로 챙겨 거지에게 챙겨주거나 거지의 필요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 했습니다. 부자가 다 먹고 남긴 것, 버리려고 모아둔 것 등이라도 먹어서 생명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부자가 음식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거지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옷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들이 와서 거지의 몸을 핥았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개는 오늘날 쥐와 같은 존재입니다. 야생동물에 불결하고 아무 쓸데없는 동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 개가 거지의 온 몸을 핥은 것입니다. 비참하고 안타까운 광경입니다.

그런 모습을 매일 대문을 드나들며 본 부자의 완악함이 보이십니까? 자기는 배가 터지도록 먹었지만 배가 쪼그라드는 배고픔을 겪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온 몸을 고운 옷과 최고가의 겉옷으로 둘렀지만 온 몸을 욕창으로 두른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 29:7)

부자는 하나님 앞에 “악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반드시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모습으로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하는데 부자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문 바로 앞에 개나 고양이가 굶고 있어도 그 사정을 돌아보게 되는데, 부자는 자기 형제(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의 사정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삶을 계속해서 살다가 어느 날 부자도 거지도 죽게 됩니다.

2. 죽음(22절)

두 사람의 죽음은 아주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절에 “죽어”라는 짧은 표현으로 두 사람의 죽음을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 비유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두 사람의 죽음이 어땠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지는 어떻게 장례를 치르고 부자는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 같이 돌보는 사람이 없는 극빈층의 경우 그 시체를 거두어 힌놈의 골짜기로 가서 버렸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 성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로 십자가형을 받은 시체들을 여기에 버려 함께 태워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골짜기를 “게헨나”(한글 번역; 지옥)라고 불렀는데 예수님은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곳을 “게헨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33).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다른 우주 쓰레기와 함께 불태워지는 장소가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죽었을 때 이런 비참한 장례를 치렀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는 반대로 아주 성대하고 엄숙한 장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섯 형제가 상복을 입고 가족과 친구 동료를 초대하여 전문적으로 곡하는 사람들과 함께 정식적으로 품격 있는 예식을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을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예수님의 시신을 받은 부자 요셉의 가족묘처럼 넓고 쾌적한 동굴 속에 삼베 수의와 향료로 감싸 안치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 그들의 삶은 마감되었습니다. 만일 삶이 이것이 전부라면, 여기서 끝난다면 부자의 삶이 아무리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이기적이고 악한 삶이었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죽음은 또 다른 삶, 영원한 삶을 통과하는 문에 불과하다는 데 있습니다.

3. 죽음 이후의 삶(23~31절)

죽음의 관문을 넘었을 때 거지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천사들”입니다. 천사는 거지를 보위하여 아브라함의 품에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넣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이 자부하는 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묘실에 묻히고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의 품 안에 들어간 것은 거지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 땅에서 저주를 받은 자가 말입니다. 그것도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재물을 조금도 누리지 못한 거지가 이 정도 대우를 받는다면,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인 재물을 넘치도록 받은 부자는 어떤 대우를 받을까요? 바리새인들은 당장 천사장이 달려와서 나사로를 물리치고 그 자리에 부자를 앉히시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23절은 부자가 눈을 뜬 곳이 충격적이게도 음부라고 말합니다. 음부는 지옥과 동의어로 악인이 죽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부자가 고통 중에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병원에 가면 환자에게 지금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0-10까지 중에 어느 정도인지 말해보라고 합니다. 이 부자의 고통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고통”으로 번역된 헬라어 바사노스는 ‘고문에 의한 극심한 고통’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동전 검사관에서 유래했는데 동전의 진위를 검사하는 사람이 동전을 구부리고 깨물고 자르고 녹이는 것처럼 사람을 그렇게 고문할 때 느끼는 극심한 고통입니다. 동전 검사관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사람을 자르고 구부리고 녹이는 고통이 그것입니다.

부자는 자기가 겪는 고통이 마치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는”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부자의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 경고하면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48).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 죽지 않는 몸으로 극심한 고통을 영원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구합니다. 눈을 들어 아브라함과 그 품에 있는 나사로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불 가운데 있는 자기를 위로할 사람은 그들뿐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매달립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24절)

자기에게 은혜를 내려달라고 구합니다. 자신의 사정을 불쌍하게 봐달라고 호소합니다. 물 한 잔, 한 병도 아닌 손가락 끝에 찍은 물 한 방울만이라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정도로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가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될 만큼 냉정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25절)

“얘”라는 말은 탕자 아버지가 큰 아들을 부를 때 썼던 말로, 애처롭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포함된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냉정하게 말합니다.

“네가 죽기 전에 누렸던 좋은 것을 기억하느냐? 그 때 너의 집 대문 밖에서 고난을 받은 나사로를 기억하느냐? 너는 그때 나사로를 어떻게 대했느냐? 문 밖으로 나와 그 불꽃 가운데서 당하는 고통 같은 배고픔으로 너를 바라보고 있는 거지의 입에 너는 빵 한 조각이라도 넣어주었느냐? 나사로가 기도하지 않았겠느냐?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저 부자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빵 한 조각을 묻혀 내 배를 불리게 하소서 내가 이 배고픔 가운데 괴로워하나이다” 너는 그 때 무엇을 하였느냐? 내가 너에게 허락한 재물을 너는 어떻게 사용하였느냐? 매일 아침마다 집에서 나올 때, 매일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마다 너는 그의 간절한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였느냐? 대문 앞에서 배고파 죽어가는 상처 입은 거지를 개가 핥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면서 너를 위해서만 살 수 있느냐? 그러니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아브라함은 중대한 사실 하나를 알려줍니다. 이 땅에서는 언제는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지만(문 하나를 지나면 되지만), 죽음 그 이후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서로에게 오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 그 이후에 맞이하는 영원한 결말에는 더 이상의 호의나 은혜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은 없습니다. 두 번째 기회도 없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영원을 결정짓는 모든 기회와 요소가 여기에서 주어집니다. 이 땅에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긍휼과 자비를 어떻게 내 재물로 나타냈는지가 영원히 우리가 받을 긍휼과 자비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제 그 중대한 진리를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구하지 않고 자기처럼 살고 있는 형제들을 걱정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7-28절)

재물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고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는 데 쓰지 않는 삶. 그것은 부자의 형제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을 부자는 지금 직접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주 고통스럽고 소망 없는 삶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를 멸망이라고 합니다.

부자 생각에는 나사로가 다시 부활하여 자기 집에 가서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면 형제들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그들만큼은 이곳에 오지 않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지금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모든 영혼이 울부짖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든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자기 대문 앞에 있던 나사로를 알아본 형제들은 틀림없이 나사로의 증언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부자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도 만일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경고했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이러한 청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부자가 형제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그 내용이 이미 구약성경인 모세오경과 나머지 선지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에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거둬 고아나 과부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신 14:28-29). 선지자 이사야는 가난한 자의 물건을 탈취하는 죄를 꾸짖고(사 10:1-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사 58:6-7). 예레미야도 이방인, 고아, 과부를 압제하지 말라고 가르치고(렘 7:5-6), 에스겔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겔 18:12-18). 아모스, 미가, 스가랴, 말라기 등 계속해서 성경은 부자가 잘 몰랐다고 생각한 그 사실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가지 않아도 이미 성경은 그 사실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면 다르게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절)

기록된 성경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다 확실한 표적,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실이라고 믿어질 만한 증거가 있으면 제대로 경고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의 모습은 여기서도 마치 바리새인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확실한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그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절)

기록된 성경의 경고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라면 아무리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권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록된 성경의 충분성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 성경을 거절하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하고 돌처럼 단단한지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말해준다 해도 이를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그만큼 높고 교만합니다.

참 흥미롭게도 이 비유를 만들어 이야기 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거부하고 그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은 정말 비유 속 아브라함이 말한 것처럼 성경을 무시한 것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이의 증언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인데 또 다른 “나사로”가 성경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리아, 마르다의 오라비로 정말 이 땅에서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살아났습니다.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지만, 많은 바리새인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나사로의 말도 거절하고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완악합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이렇게 끝났습니다. 바리새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성경은 이에 관해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고스란히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에게로 넘어옵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를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어떤 분들은 긍휼이 없는 부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다”라고 안심했을지도 모릅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집 대문 앞에 거지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자는 자기가 한 일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지옥에 갔다.’

하지 않은 일, 바로 재물로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 일을 잘 하고 계십니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부자처럼 삽니다. 부드러운 속옷을 사 입고 좋은 양말과 겉옷을 계절에 따라 구입합니다. 외식도 자주하고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식사, 선물을 합니다. 각자 형편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가 즐기고 누리고 싶은 만큼 날마다 즐기고 있습니다. 부자의 삶처럼 이것 자체의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거지 나사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을 위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하지만 “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까?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제가 사는 마을에 90세가 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습니다. 예전에 그 두 분이 사는 집에 가 보았는데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힌놈 골짜기처럼 쓰레기가 가득 차고 곰팡이와 거미줄, 온갖 더러움이 그 집에 가득했습니다. 정말 쥐들이 그 집에 살고 있을 것 같았고 사람과 한 공간에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정말 더러운 시멘트 바닥에 담요를 두르고 맨몸으로 누워계시고, 변을 보면 씻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분 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언제든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서면서 제 마음 속에 계속해서 떠오른 질문 하나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선포한 복음이 이 분들의 삶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도움이 될까?’

내가 입술로 복음만 전하고 내 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의 입에 넣어주지 않는다면, 욕창이 생긴 그들의 맨 몸을 감싸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나님의 긍휼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왜 거절했냐고 하나님이 물으신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좋은 옷과 좋은 차와 좋은 집을 구하느라고, 더 나은 삶을 누리느라고 대문 밖에 하나님의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그래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내 이웃이 안 보였다고 말할 것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누가 시원하게 경고해 준 적이 없어서 몰랐다고 말할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이 비유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이 부자처럼 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이 부자처럼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자입니다. 재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진짜 예수님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용하는 것에 따라 영원한 보상과 칭찬을 받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부자여,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십니까? 어떻게 재물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재물을 사용하고 있는지 계산해보십시오. 이웃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기 위해 어느 정도를 사용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거지에게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만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3)

당신의 보물이 영원한 처소에 있다는 것을 지금 재물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 보여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이 비유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교훈을 기억하십시오. 아직까지 다가올 영원한 세상을 믿지 않고 그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께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 천국은 진짜입니다. 그리고 지옥도 진짜입니다. 이 땅에서 기록된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면 영원한 세상에서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영원히 고통스럽고 소망이 없는 그곳에서 땅에 있는 가족들만이라도 이곳에 오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도 이 사실이 크게 와 닿지 않는다면 그만큼 완악하고 단단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겔 11:19; 36:26).

하나님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분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찾을 수 있을 때 만나고 찾으십시오. 오늘은 은혜의 날이지만 내일은 심판의 날입니다. 오늘 그 은혜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