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

본문: 갈라디아서 3장 7절-14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운전을 하실 때 어떤 경우에 긴장을 많이 하십니까? 처음 가보는 잘 모르는 길을 가거나 차가 많고 복잡한 길을 갈 때 더 긴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는 고속도로를 진입할 때나 고속도로 분기점에서 다른 고속도로로 진입할 때에 긴장을 많이 하는데 실수로 잘못 진입하면 내가 가려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진입했을 때 그 시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울과 부산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가는 길이 정반대로 달라집니다. 그런데 만약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도 내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고 계속 그 길을 간다면 어떨까요? 내가 가려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목적지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일이 단순히 고속도로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길에서 영원한 운명을 두고 일어나는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거짓 형제들에게 속아서 다른 복음에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길을 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아닙니다. 틀린 길이었습니다.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난 길이었고 하나님을 떠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길이 아니라고 그들을 책망하면서 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합니다.

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잘못된 길을 가겠습니까? 누구나 잘못된 길이 아닌 바른 길, 복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잘 몰라서 혹은 속임에 넘어가서 그 길을 떠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갔는데 가다보니 아닌 경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실 때, 그 때는 얼른 그 길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그들은 다른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이 복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다른 복음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에게 복의 길인지 그리고 그들이 따른 다른 복음이 왜 저주의 길인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에 살펴봤었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책망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며 스스로 돌아볼 수 있도록 질문했습니다. 먼저는 구원의 경험을 증거로 돌아보도록 했고 다음으로 구약의 증거를 가지고 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6절부터 시작된 구약의 증거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구약의 증거를 주제로 묶으면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복과 저주입니다. 그래서 복과 저주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먼저 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바울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가지고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온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이어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7)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 유대인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서 오는 자부심과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라는 특권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언급합니다. 아브라함과 혈통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새로운 관계를 말합니다.

무엇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습니다. 혈통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는 국적이나 출신이나 신분이나 성별이나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두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이야기일까요? 한국 사람인 우리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입장을 좀 바꾸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아프리카 사람이 여기 있는데 ‘이제부터 이 사람은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다!’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우리와 같이 김치 정도를 먹어야 되고 양반다리를 하고 한국말을 좀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두고 단지 믿음으로 그렇게 된다고 하면 어떨까요? 조상의 유업을 함께 이을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거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8)

바울은 창세기에 있는 말씀을 추가로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을 통해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유대인이 있기 전부터 이방인을 말씀하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는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되어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그 근거는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의롭다하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이를 수 있는 복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 얼마나 어려웠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개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원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잠시 시간이 있는지 물으며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으려 할 것입니다. 그럼 옆에 있는 개는 어떻게 합니까? 개에게도 복음을 전합니까? 개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복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이 그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그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유대인처럼 모양을 내고 유대인이 하는 것을 따라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획하셨습니다. 차별 없이 오직 믿음으로 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

복은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수고가 아니라 우리가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시고 믿음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을 받습니까?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믿음이 모든 것을 답해줍니다. 복은 믿음으로 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가 복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럼 이와 반대로 복과 대조되는 저주는 어떠합니까?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다음으로 저주로 가는 길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0)

바울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저주 아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대해서 모든 일을 항상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모든”과 “항상”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명령에 대해서 항상 행하도록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에서 600가지가 넘는 항목을 가지고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 모든 명령을 체크하면서 언제나 지키도록 잔소리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남편이 아내에게 그렇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라도 빠뜨리거나 지키지 못할 때가 있으면 그 때마다 바로바로 처벌을 한다면 어떨까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겁니다. 저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항상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11)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고 율법을 항상 지킬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하박국 말씀을 인용하면서 또 다시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도 믿음으로 살 것을 말씀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의에 이룰 수 없습니다. 구약의 증거가 모두 그러합니다.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모두 지킬 없고 항상 지킬 수 없습니다. 언제나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행위를 붙들고 율법에 속한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교만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기준에 이르겠다는 교만입니다. 착각에 빠져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정말로 무지하거나, 정말로 교만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의 말씀처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믿음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둘은 다릅니다. 섞을 수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따르면서 거기에 믿음을 추가할 수 없고, 믿음으로 살면서 율법의 행위를 추가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믿음도 율법도 다 하나님께로 왔는데 둘 다 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 ‘믿음에다 율법의 행위를 더하면 더 좋아지는 것 아닌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둘은 다른 길입니다. 믿음은 복으로 가는 길이지만 율법은 저주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거짓 형제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주장할 때 그들은 실제로 모든 율법의 행위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모든 행위를 지켜야 한다면 논리적으로는 더 맞을 수 있는데, 사실 그들은 모든 율법의 행위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킬 수 있는 몇몇 율법의 행위들을 가지고 믿음뿐만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명령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갈라디아 교회가 넘어가도록 유혹했던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하고, 음식을 구별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율법의 일부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뿐만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다른 율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너희가 할례는 따르면서 왜 동물 제사는 따르지 않느냐? 무엇을 근거로 어떤 율법은 지키고 어떤 율법은 지키지 않느냐? 누가 그것을 정한 거냐? 결국 너희가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냐?’

율법은 모든 것을 항상 명령합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가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음을 자처할 뿐입니다. 모든 일을 항상 해야 하는 율법 아래에서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고 율법을 따르는 자의 저주이고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복과 저주가 만나는 곳, 그곳에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

우리가 저주가 아니라 복을 받게 된 것,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셨고 율법의 저주에게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그냥 없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그 아들에게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직접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려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의 약속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복을 누리도록 하시려고, 믿음으로 우리가 성령의 약속을 받아 소망 가운데 살도록 하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신이 복의 길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율법에 대해서 철저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저주의 길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없애야 하는 방해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바울의 생각대로 예수는 나무에 달려 죽었습니다. 바울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예수가 가는 길은 저주의 길이었습니다.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신명기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거야, 그가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이 분명한 증거가 되는 거야’ 바울의 생각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길이 옳다는 확신 가운데 남아있는 ‘나사렛 이단’을 박멸하러 나섰습니다. 그렇게 살기등등했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확신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그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다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확신의 근거가 말씀이었는데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분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그 저주가 ‘나를 위한 거’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나를 대신해서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그동안 잘못된 길, 저주의 길을 가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돌이킵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겁니다. 율법이 줄 수 없는, 나의 노력과 수고가 줄 수 없는 참된 만족이 있는 길, 그 복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그 공로를 힘입어서 믿음으로 갈 수 있는 복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은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같은 고백을 하시겠습니까?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이 길을 갈 수 있게 되셨습니까? 그 갈림길에서 누가 복의 길로 인도하셨습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그분이 자신을 희생하셔서, 우리를 복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길을 갈 때, 어떤 마음으로 가야할까요? 우리의 걸음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길을 가면서 이루려는 목표와 이 길을 걸어가는 동기가 달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저주가 마땅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어울리는 자였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에 대한,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한 마땅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에 대한 저주와 진노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죄의 노예 되었던 우리를 예수님의 피 값으로 해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율법의 속박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그 자유를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용합니다. 율법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저주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분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렇게 합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격하여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이제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과 저주의 갈림길에서어떻게 복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그 은혜로 힘을 얻어서 끝까지 믿음으로 이 복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