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십자가에 달린 왕
본문: 누가복음 23장 26절~38절
설교자: 조정의

 

빌라도는 유대 관리와 백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눅 23:23~25). 그리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빌라도 관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형의 순서에 따라 극심한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1) 주님이 당하신 고난, 2) 고난 중에 주님이 품은 심정, 그리고 3) 주님이 하신 말씀(반응)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헤아려 보기 원하고 본받을 주님의 마음과 이웃 사랑의 본을 배우기 원합니다.

1. 주님의 고난(26-27; 32-38)

십자가형 선고가 내려지고 나서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난에 관해 복음서 저자들은 극도로 표현을 아낍니다. 아마도 그들이 복음서를 기록한 주목적이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는 말씀(사 53:4)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조금은 자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했던 고통, 하지만 주님이 대신 당하신 그 고통의 크기를 함께 헤아려봅시다(채찍질-군대의 모욕-고난의 길-십자가/관정-골고다).

a. 채찍질(마 27:26; 막 15:15) @관정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먼저 잘 훈련된 고문 기술자(릭토르)에 의해 거의 초주검에 이르는 채찍질을 당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아주 간단하게 기록했는데(“채찍질했다”), 절대 감당하기 쉬운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몽둥이에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가죽끈이 달린 이 채찍 끝에는 아주 날카로운 금속, 뼛조각, 유리, 돌 등이 박혀있어 죄수의 몸에 찍혀 그 살점을 뜯어내기 알맞았습니다.

3세기 역사학자 유세비우스의 말에 따르면 로마의 이 잔인한 채찍질은 “죄수의 핏줄을 다 드러내고 근육, 힘줄, 심지어 장기들을 외부로 드러나게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채찍에 맞는 과정 중에 사망한 죄수가 종종 있을 정도로 잔인하고 극심한 고통을 예수님은 발가벗겨져 기둥에 손이 묶인 채 채찍을 맞는 내내 참아내셔야만 했습니다.

유대인의 법은 39대를 넘지 않도록 제한했고 맞는 부위도 등과 어깨로 제한했지만, 로마법은 아무 제한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등, 어깨, 목, 다리, 팔, 허리, 가슴, 엉덩이, 얼굴 가릴 것 없이 집정관이 “그만”을 외칠 때까지 계속해서 맞았습니다(사 50: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b. 군대의 모욕(마 27:27~44; 막 15:16~32) @관정

아마도 채찍질은 빌라도 총독의 온 군대가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브라이도리온(마 15:16)이라는 관정 뜰 안에 약 600명에 육박한 군사들이 예수님 앞에 모여 예수님이 채찍에 맞는 피튀기는 장면을 UFC 경기를 지켜보듯 흥미롭게 관람했을 것입니다. 

죄수에게 지속해서 채찍을 가하면 금세 쇼크가 오고 실신하기 때문에, 아마도 3~4대를 때리고 나서 능욕하고 조롱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피가 흐르는 예수님의 등에 홍포를 입히고, 갈대를 오른손에 들게 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그가 로마 군대 앞에서 얼마나 힘없고 초라한 존재인지 놀려댔습니다. 거짓으로 절하는 척하고, “평안하소서”라고 희롱하고, 손에 쥐여준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치고 침을 뱉었습니다. 

c. 비아 돌로로사-“고난의 길”(26절)

군인들의 구타와 온갖 희롱을 받은 예수님은 이어서 사형 집행인(네 명의 로마 군병)의 손에 끌려 처형장을 향해 걸어가야 했습니다. 약 30분 정도 걸렸을 이 “고난의 길” 행렬은 왕의 행렬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하는 치욕스러운 장면의 연출이었고, 수많은 사람이 좁은 길목마다 서서 죄수를 구경하고 비난과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여기 유대인의 왕이 행차하신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란 사람의 꼴을 보라” “우리 로마를 대적하는 반역자의 종말을 보라, 이스라엘은커녕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지 않는가” 이런 식의 조롱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님의 머리엔 왕관 대신 가시면류관이 박혀있었고, 온몸은 갈기갈기 찢겨 피가 흐르고, 탈수증세와 약해진 몸으로 겨우 행렬에 따라 자기가 매달려 죽을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셨습니다.

빌라도 관정에서 성문 밖 처형장까지의 거리는 약 800m에서 1km,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밤새 심문받고 극심한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약 40kg 나 되는 십자가의 가로막대기를 목에 매고 그 길을 끝까지 가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친히 얼마큼 십자가를 매고 걸어가시다가 힘에 부쳐 돌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얼굴을 쾅 하고 부딪혔을 것입니다.

로마 군병은 죄수가 쓸데없이 동정받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매고 갈 사람을 찾았는데, 마침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와 있던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리비아, 당시엔 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로마 군병에 의해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26절).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그가 이런 모욕을 당하신 것은 자기 백성, 곧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d. 십자가(32~33절) @골고다

마침내 그들이 이른 곳은 아람어로는 “골고다”, 라틴어로는 “갈보리”라 불리는 곳인데, 그 의미는 모두 “해골”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죽은 수많은 죄수의 해골이 쌓여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수도 있지만, 땅에서 솟아오른 언덕의 모양이 해골 모양이라서 그렇게 불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 두 행악자가 사형을 받게 되어 함께 끌려 왔는데, 이들이야말로 정말 십자가형을 받기 합당한 “흉악범”이었습니다. 무죄한 예수님이 그들과 같은 범죄자 취급을 받으셨습니다(사 53:12).

갈보리 오르막길에 다다라 시몬이 지고 온 가로막대기를 이미 그곳에 준비되어 있던 세로막대기에 부착하고 나서, 예수님은 발가벗겨져 그 십자가 형틀에 양팔을 벌리고 누워 양 손목에 못이 박혔습니다. 아마 양 발목에도 못이 박혔을 것이고, 그 발아래 작은 발 받침대 같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받침대는 죄수의 체중이 손목에만 쏠려 몸이 찢겨 십자가 아래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동시에 죄수가 발에 힘을 실어 상체를 들어 올려 숨을 쉬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오래 경험하게 만드는 잔인한 장치였습니다(시 22:16).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 병사 중 하나가 예수님께 쓸개(몰약)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일종의 진통제로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 과정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막 15:23). 십자가의 고통을 맑은 정신으로 모두 다 받기 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으로 단단하게 고정된 예수님의 몸은 지상에서 약 60cm~1m 정도 떨어진 높이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 발 앞에 선다면 서로 얼굴을 제법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였습니다. 두 행악자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망에 이르는 가장 큰 이유는 질식이었는데, 양 손목에 체중이 실리면서 팔이 늘어나고 어깨가 탈골되며 폐와 횡격막을 압박하게 됩니다. 그러면 죄수는 살기 위해 몸을 들어 올려 숨을 쉬려고 발에 힘을 주는데, 그러면 발목에 고정된 상처와 다리 근육에 극심한 고통이 더해집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팔, 가슴, 등, 다리의 통증을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한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에 방치된 채 며칠을 쉬지 않고 고통받다가 탈수와 영양실조 증세를 보이고 기력을 완전히 잃어 결국 다음 숨을 들이쉴 수 없어 질식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e. 십자가에서 받은 모욕

예수님이 바로 이런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경험하셨습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에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코앞에서는 모욕과 조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관리들과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했는데, 관리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예수님을 비웃으며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35절)라고 모욕했고, 군인들은 그들이 마시는 싸구려 신 포도주를(시 69:21) 예수님께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고 비웃었습니다(37절). 그리고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 신발, 터번, 속옷 등을 각각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시 22:18).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는데, 격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중 몇몇은 예수님 앞에 지나가면서 그 앞에서 머리를 흔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막 15:29~30).

유대 종교 지도자들, 군인들, 백성들 모두가 예외 없이 예수님을 비웃고 모욕했습니다. 그들의 아비 사탄과 똑같은 말투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 4:3, 6).

그들이 비난한 내용은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한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먼!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려오지 않으심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기 백성을 살리신 것입니다.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5, 18).

주님이 받으신 고통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사 53:5-6).

2. 주님의 심정(시 22:1~21)

빌라도 관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이 받으신 잔인하고 극심한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 모든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이 과연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품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이에 대해 별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이 이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는 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고 말했고, 베드로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3)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의 기쁨을 바라보셨다는 것, 그리고 공의로운 아버지께 모든 심판을 맡기시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이기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예수님이 품으신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22편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더 생생하게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호소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조상)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받으신 고난에 대한 토로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자신)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받으신 고난에 대한 토로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시 22:1~21) 구원의 요청 그리고 신뢰

22~31절 – 구원의 확신, 고난 너머의 기쁨을 바라봄 

우리는 예수님이 고통 중에 어떤 심정이었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 중 하나가 시편 22편이었고(마 27:46), 이 시편이 확실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표 하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예수님은 이 시편이 노래하는 것처럼 1) 자기의 고통을 아버지께 토로하고, 2) 아버지의 구원을 요청하며, 3) 거룩하신 아버지의 공의와 구원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고난을 감당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수치스러운 모욕 앞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 8)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이 마음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3. 주님의 말씀(반응)(28-31; 34)

주님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육체적 고통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모든 고통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뢰와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 중에 또 한 가지 가장 놀라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이상하리만치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하게 맞아 고통스러울 때 또는 수많은 희롱과 욕설을 받는 순간에 참으로 놀랍게도 거의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욕으로 되갚지도 않으시고, 고통 중에 짜증 섞인 호통을 치거나, 경고하지도 않으시고, 원망이나 두려움에 터져 나온 외마디 말도 없으셨습니다. 

흔히 우리 몸이 심히 아프거나 많은 정신적 상처를 입었을 때 가까운 사람들이나 원수들을 향해 우리 입에서 아주 쉽게 나올만한 말들을 예수님의 입술에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하지만 주님은 입을 열어 몇 마디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의 기록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주님의 반응 즉 주님이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하신 두 가지 말씀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입을 닫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고통 중에 주님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준 반응입니다.

1. 나 말고 너희를 걱정하거라(28~31절)

첫 번째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28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통과하여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자기를 따라오며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많은 여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슬퍼했다기보다 로마 군병에 의해 죽임당하는 유대인 죄수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고 슬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딱하고 안됐다고 느껴서 슬피 울며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 흘리고 모욕받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보다 앞으로 징벌의 날을 맞이할 예루살렘 백성을 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더욱 구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29절부터 30절까지 하신 말씀은 예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보며 경고하신 임박한 심판에 대한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21장). 

곧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된 징벌의 날이 닥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록된 말씀대로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29절; 사 54:1). 한마디로 심판을 피해 목숨을 겨우 부지하려면 애가 없는 상태가 훨씬 유리한 심각한 상황이 예루살렘에 닥칠 것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그 고통이 심각한지 사람들은 산들을 보며 차라리 지금 우리를 덮어 우리 목숨이 단번에 끊어져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30절; 호 10:8; 사 2:19,20).

예수님은 “푸른 나무에게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물으셨습니다(31절). 생명력 있고 열매 맺는 푸른 나무 같은 예수님께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셨다면, 죽어서 말라버린 그래서 열매가 없는 마른 나무 같은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더 극심한 심판을 내리겠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약 40년 후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포위되어 식량이 없어 자기 아기를 잡아먹고 굶어 죽고 군대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등 약 110만 명이 죽임을 당하고 그중 약 만 명의 백성이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성은 완전히 파괴되고 10만에 가까운 백성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딸린 식구(특별히 아기)가 있는 사람은 그날을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극심한 고통 중에 빨리 죽기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성안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그 무서운 징벌의 날을 생각하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며 통곡하시기도 했습니다(눅 13:3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극심한 고통 중에 죽음으로 가는 길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아닌 자기 백성의 안위를 돌아보셨습니다. 너희가 당할 고난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돌이키라. 나를 위해 울지 말아라. 너희를 위해,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 

2.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34절)

주님의 이타적인 사랑의 마음은 자기 백성을 향해서만 표현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두 번째 말씀이자 십자가 위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가상칠언) 바로 이것입니다(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모욕하는 군병들과 관리들, 서서 구경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하신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죽인 원수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손에 대못을 박은 군병, 자기 속옷을 벗기고 겉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경비들, 욕하고 비웃은 백성들, 자기를 이 죽음까지 오게 한 교만하고 완악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아무런 분노의 말도 쏟지 않으셨습니다.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너희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하신 말씀, 그들을 위해 아버지께 대신 아뢴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죄를 범하며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반역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죄가 사해진 것은 죄가 그만큼 덜 심각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우리 대신 그 죄의 징벌을 다 지시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44). 예수님은 친히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본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서로 용서하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골 3:13)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기 힘든 원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하기 힘든지, 용서하기 어려운지 계산하고 따지지 마십시오. 다만 주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주님이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셨는지 깊이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도리어 백성의 안위를 돌보신 이타적인 사랑,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고 조롱하는 원수를 위해 도리어 용서를 빌어주는 한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우리가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깊이 묵상해볼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아무런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골고다까지 옮겨간 시몬을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며 이 시몬의 아들 루포를 가리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라고 부릅니다(롬 16:13). 이로 봤을 때, 시몬은 아마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아들 루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까지 숨차게 십자가를 들어 나르고 그 무거운 통나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시몬은 어쩌면 두손을 털고 유유히 내려가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휴~ 다행이다. 내가 이 십자가를 옮기기만 했지, 실제로 여기 못 박혀 죽을 저주받은 사람은 아니라서…”

하지만 시몬은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뒤에 피 흘리며 온갖 조롱을 받고 따라오던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이것이 우리가 주를 영원히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아버지의 뜻을 붙잡고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어떤 원망이나 불평, 염려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굳건한 신뢰 그리고 철저한 순종의 마음입니다. 어떤 힘든 환경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품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고통의 행렬 가운데 철저한 침묵을 유지하셨지만, 그중에 입을 열어서 하신 말씀을 통해 백성과 원수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베풀어야 할 형제 사랑이며 원수 사랑입니다. 주가 사랑한 것처럼 사랑합시다. 주가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