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삶 – 3

본문 : 시편 10편

설교자 : 최종혁

시 10 [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9]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11]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지난 시간 시편 9편 말씀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셨던 일’과 ‘하나님의 어떠하심’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 때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행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볼 10편은 9편과 이어지는 말씀으로서, 9편에서 어려운 상황을 외부에서 바라보았다면 이제 10편에서는 그 내부로 들어가서 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보는 것으로 사는 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반대로 믿음으로 사는 자가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 지를 배우게 됩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참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뭔가 좋은 일이 있거나 무슨 선한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참 많습니다. 공정한 일이나 좋은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좋지 않은 뉴스, 가령 재난이나 사회의 불합리함 등에 대해서는 한 마디씩 이런 말들을 던집니다. ‘세상이 이런데 신이 어디에 있는가’, ‘세상을 이렇게 만드는 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라면 나는 믿지 않겠다’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부조리함이나 악의 문제로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의구심을 가져야 할까요? 성경에도 그런 비슷한 질문을 던진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절). 이것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고 있지만 마치 멀리 떠나 계시거나 숨어 계신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시면 분명 무언가를 하실 텐데 그러지 않으시니 마치 보고 계시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2절)하는 상황입니다. 시편 기자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2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3절부터 자신이 보는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은 한 마디로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이 형통하게 사는 모습’입니다. 무신론자라면 단순히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은 그보다 많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있을 수 있다’, 또는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떤 종교에 귀의해서 종교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생각 속에서 그들은 무신론자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3,4절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와 같습니다. “악인은 그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를 축복하면서 여호와를 부인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악인들은 욕심을 자랑하고 자기와 같은 자자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과 관계없다고 여기며, 찾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게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지난 9편 말씀에서 다윗이 고통 중에서 건짐 받기를 원하면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9:14)라고 고백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뻐하기 위해 고통 중에 구해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자랑하고 찬양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모두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5, 6절에서 그들은 확신합니다. “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5,6절). 우리는 그들이 패망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은 그들의 성공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그저 하나님 없이 성공한 자신들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흔들리지 않고 환란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이 된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7절부터는 그들의 언어와 행위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7절). 예수님은 사람의 말이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고 하셨습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 거짓, 포악, 잔혹한 말, 죄악된 말은 그들의 마음이 죄악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8절). 이들은 죄를 매우 은밀한 곳에서 범합니다. 사냥감을 노리는 사자처럼 가련한 사람을 잡아 이용하는 것입니다(9,10절). 그들이 이와 같은 생각과 말,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11절). 이것이 그들이 내린 하나님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잊으셨고 얼굴을 가리어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4절 뒤).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일에 하나님이 계산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실체와 진리가 무엇인지 상관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실체이고 결과를 내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악한 자가 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이 형통한 것이 세상입니다. 보이는 대로 산다면 여기 시편 기자가 묘사하고 있는 악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이 괴롭힘 당하는 상황을 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12절).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무신론자들과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 여기고 그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14절).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숨어계시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은밀하게 행하는 죄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손으로 이를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14절).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가질 수 있는 확신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17절). 주님은 보고 계실 뿐 아니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듣고 계십니다.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8절). 이런 확신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시편 기자는 1절에서 “여호와여 어디계십니까”라고 물었던 사람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시편 기자는 끝내 알지 못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1장과 2장에서 벌어진 일들 이후에 욥과 그의 친구들이 여러 장에 걸쳐 토론을 합니다. 선하게 살아온 자에게 왜 이런 시련이 있는지 열띤 토론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 모든 내막을 알려주실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알려 주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욥은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확신은 하나님의 의도와 이유를 알아서가 아닙니다. 깨닫고 이해해서가 아닙니다. 그 확신은 하나님 자체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16절).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믿기에 그분이 하실 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12,13,15절). 9편에서도 이와 동일한 말씀이 있었습니다(9:19). 하나님은 일어나실 것입니다. 일어나서 권능을 드러내실 때 그분의 공의가 나타날 것입니다. 악인은 은밀하게 숨어서 죄를 범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의 죄를 더 찾을 수 없을 때까지 찾아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으로 그분의 공의 가운데 모두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그것이 나의 어려움이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든 참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믿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바로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합 1:2-4). 하박국 선지자가 보는 이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께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합 1:12-17).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이 잘 되고 있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나님께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하박국 선지자의 태도가 180도 바뀌게 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뭔가 당연한 것이 당연시 되지 않는 상황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연한 것들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라고 말합니다. 하박국 3장은 선지자의 찬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의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고 긍휼 많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알았을 때 상황에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그 하나님 앞에서 기뻐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긍휼 많으신 자비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보고 있는 현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불평하게 하고 원망하게 하는 그런 현실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선심 쓰듯 반응합니다. 마음에 불편함을 가진 채 수긍합니다.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고 전능하시며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십시오.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의 불의를 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