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믿고 순종하겠는가?
본문 : 누가복음 4장 1~13절
설교자 : 최종혁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학생회를 맡고 있다 보니 학생들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제가 그 나이 때 고민했던 것을 물어볼 때도 있고 때로는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것들을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해 얘기하다보면, 특별히 구원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이제 막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학생들의 경우에,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있는 것을 봅니다. 삶의 여러 상황들, 문제들 중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동시에 구원자와 아버지가 되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기본이 되는 원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따르는 순종하는 삶’입니다.

매 순간이 그러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할 순간입니다. 매 순간 어떤 결정 앞에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인가’, ‘내 아버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사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방향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 번 사탄에게 직접적인 시험을 받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의 유혹의 장면을 통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는 것 같아도 믿고 순종하겠는가?

더 쉬운 길이 있어 보여도 믿고 순종하겠는가?

경험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믿고 순종하겠는가?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와 족보에 대해 들었습니다. 우리가 배운 사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시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면적인 삶을 보고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말씀을 전했을 때 사람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들이 평소 알고 있었던 모습과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이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권리를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능력과 권리를 행사하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사시면서 온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살펴볼, 예수님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인성과 신성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목적과도 관련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성령이 임재하셨고 이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이 몇 번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계속해서 시험을 받으셨고 여기 기록된 부분이 그 시험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데 마귀의 시험을 받을 수 있을까요? 모순된 상황 같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삶 속에서 만나는 상황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마귀의 시험이 함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진정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모든 유혹을 이기고 의로운 삶을 사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 의를 주실 수 있는 분임이 입증됩니다.

시험과 의, 죄를 생각할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담’입니다. 그는 시험을 받았고 그 시험에 무너져 세상에 죄가 들어왔으며 우리 역시 죄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인간으로써 의로운 삶을 사셨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40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예수님의 상황을 비교해보십시오. 누가 더 시험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상황입니까? 물론 아담입니다. 죄가 유입되지 않은 완벽한 세상에서 살았던 아담은 실패했고, 죄로 물들어 있는 세상 속에서 굶주림으로 육신이 지쳐 있던 예수님은 그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시험에서의 승패는 환경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승리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는 것 같아도 믿고 순종하겠는가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3)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탄이 모를 리 없습니다. 잘 모르겠으니 이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이후에 예수님께선 이적을 베풀어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을 만드는 것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죄로의 유혹이었을까요? 그 사탄의 의도를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4). 마태복음에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신명기 8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어떻게 공급하셨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셨고 그들이 걸어 다닐 때 의복이 헤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광야라는 곳에서도 그렇게 하셨는데 약속의 땅에서 너희를 버리시겠냐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신실하실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있으면서 배워야 할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사람에게 최우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부족했었던 것은 먹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습니다.

출애굽 했던 세대는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먹는 것조차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이것이 모든 인간의 삶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우리와 동일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육체의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도 하셨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적을 통해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배고프실 때는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통해 배고픔을 채우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셨을 때 허기를 달래기 위해 무화과나무 열매를 드시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탄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먹으라는 그 말 뒤에 교묘하게 자신의 계략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네가 이렇게 굶주리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 돌을 변하게 해서 떡을 만들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해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40일을 광야에서 굶주리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금식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실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돌을 명해 떡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 또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필요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딱 한 번만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인간으로서 이 땅에 살아서 인간이 느끼는 것들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며,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이 땅에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처하셨던 인간으로서 어려운 상황,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는 것 같지 않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하며 차라리 애굽이 나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순종하기를 택하셨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는 것 같아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시겠습니까?

더 쉬운 길이 있어 보여도 믿고 순종하겠는가?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5)” 사탄은 지극히 높은 산에 올라가서 온 천하만국을 보여줍니다.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6)” 사탄은 예수님에게 아주 솔깃한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세상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통치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사탄에게 이렇게 할 만한 권세가 있는가 싶습니다. 사탄의 말은 부분적으로 맞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 3차례에 걸쳐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메시아의 나라, 메시아의 지상통치가 예언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도 그 영원한 나라로 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을 것을 분명히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정말 놀라운 제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은 필요 없다, 네가 나에게 절하면 내가 스스로 물러 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방법보다 훨씬 더 쉬운 길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은 메시아가 고난을 통과해서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더 쉬운 길을 보여줍니다. 사탄이 제시한 길은 무지한 제자들을 거느리고 고생할 필요도 없고, 사람들에게 배신당할 필요도 없으며 피조물들에게 조롱당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필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아버지의 진노를 감당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모든 힘겨운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절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단지 권력을 손에 넣고 안 넣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나의 방법’을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이 세상이 아니냐, 결국 이 세상을 아버지께 돌려 드려 아버지를 높이는 것이 너의 목적이 아니냐, 내가 보여주는 방법이 더 쉽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정말 솔깃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8)” 신명기에 6장 1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성경말씀에서 하나님만을 섬겨야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만이 우리가 예배할 분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의 제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얻는 것이니 나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사탄이 원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는 것, 그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두어야 할 최우선의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포기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니라 멸망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아버지의 방법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괴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비슷한 유혹이 있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길보다 조금 더 쉬운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마치 그것이 지름길인 것처럼, 그래도 괜찮은 것처럼 말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최선을 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그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쉽지는 않아도 언제나 최선을 길입니다. 여러분 눈에 더 쉬운 길이 보여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시겠습니까?

경험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믿고 순종하겠는가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9). 이 장소가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높은 곳이라는 점에서입니다.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9)” 사탄은 예수님에게 능력을 보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정말 가까이 계시는 곳입니다. 바로 거기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실지 여부를 시험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을 보고 이제는 사탄도 말씀을 이용합니다.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10)”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시편 91편 11-12절 말씀입니다. 사탄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선 두 번의 시험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에 대항하여 사탄은 네가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네가 믿는 하나님이 그런 분인지 증명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해가 되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나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12)” 신명기 6장 16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며 물을 달라고 하나님을 시험했었던 때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지 여부를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히 지키신다는 것,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해야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도, 나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은혜이지 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면 믿겠다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 아니라 불신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면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음에 직면한 순간이 다가왔을 때,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때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만약 사탄의 성경해석대로라면 천사는 예수님이 죽지 않도록 보호해야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길을 가실 수 있도록 힘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 길을 가실 수 있게 도왔습니다. 그것이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피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도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실까, 한 번 쯤은 시험해보고 싶고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믿음의 경험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시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험을 위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나의 경험으로 증명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시겠습니까?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13)” 마태복음에는 “사탄아 물러가라”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이 시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을 이기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탄은 얼마 동안 떠났지만 곧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을 계속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 순종하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순종의 삶으로 우리를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놀라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탄의 시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고 또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사탄이 말하는 것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경우도,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굳이 힘들게 이 길을 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동일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냐,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싸우고 있는 영적인 전쟁의 양상입니다.

사탄은 여러 말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탄과의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우리가 싸움에 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성령의 도우심 없이도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전술을 펼치지만, 그 속에서 사탄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고 행복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길이 행복하고 편안한 길이다, 그것이 너에게 좋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나를 믿고 나를 따라와라 거기에 너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맹목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께서 믿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분을 믿고 순종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모두 그분께 순종하는 자녀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