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가?

본문 : 에베소서 1장 3-14절

설교자 : 이병권

만약 여러분에게 백조가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상상이 안 되는 돈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돈이 있다면 어떻게 살까요? 지금이랑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돈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산다면 어떨까요? 노숙자들과 함께 지내며 먹을 것이 없어서 무료 급식소를 찾아다닙니다. 식당 밖을 서성이며 식사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는지 잘 모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모르고 사는 겁니다.

모르니까 세상에 속한 것들이 더 좋게 보이고 부러워하게 되는 겁니다. 모르니까 세상의 방식을 따르고 세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모르니까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는 겁니다. 모르니까 차이가 없는 겁니다. 정말 안다면 같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안다면 다르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나 자신을 나의 마음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소원하는 것, 내 삶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무엇을 더 담으려고 수고하고 계십니까? 만약, 추구하는 것이 온통 세상의 것들로 가득하다면, 이 땅에서의 안위와 만족으로만 채우려고 한다면, 단지 그것뿐이라면 그만 멈추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면 보잘 것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정말 중요한 것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보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타락한 문화 속에서 뭔가 얻으려고 기웃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알면, 그것으로 나의 마음을 채우고 그것에 나의 만족을 두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차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차이나는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뜨거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14절까지 우리 성경은 여러 구절로 기록되어 있지만 원문으로는 한 문장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생각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쏟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라는 말로 시작해서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고 문장을 마칠 때까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생각하며 그 복에 대한 찬송을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우리를 찬송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은혜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이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시려고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각 단락이 찬송에 대한 언급으로 구분됩니다.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단락의 마지막이 이러합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바울은 하늘의 속한 신령한 복을 말하고 그 복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을 알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다르게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바울로 하여금 멈출 수 없는 찬송을 하게 만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복을 앎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차이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로 살펴볼 복은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무언가를 선택함에 있어서 선택의 근거는 일반적으로 그 대상의 어떠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더 가치 있는 것, 더 인정할 만한 것, 더 좋은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기업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지원서를 보고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고 더 좋은 인재를 선택합니다. 정부에서 공무원을 뽑을 때 그에 맞는 절차가 있습니다. 아무나 뽑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이 선거를 할 때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합니다. 대상이 어떠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하심은 다릅니다. 우리가 왜 택하심을 받았습니까? 그 근거가 우리에게 있을까요? 우리가 뛰어나서 택하심을 받았습니까? 우리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셨습니다. 어떤 것도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있기도 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있어서 우리의 어떠함은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택하심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해서, “사랑 안에서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이나 자질을 보고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보고 그런 기준으로 택하셨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라 은혜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택하심을 다른 표현으로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우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입니다. 고아와 같은 우리가 왕의 자녀로 입양되어서 왕자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들이 되어서 그 모든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택하심을 받은 우리는 아들로서 기업이 되었습니다. 기업이 되었다는 말은 상속자로서 모든 유산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기업을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기업을 받는 일은 미래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한 일이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과거형으로 기업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우리가 받은 복이 이러합니다. 받을 복이 아니라 이미 이 복을 받았습니다. 확정적으로 우리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통치하실 때 우리도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다스리며 영원한 기업을 그분과 함께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우리가 받은 복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가늠할 수 없는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택하심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뿐입니다. ‘하나님 저를 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택하심을 받은 자답게 살겠습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모든 영광을 그분께 돌리는 일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을 높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이유입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복은 성자 하나님의 속량입니다.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전 성경에는 속량을 구속이라고 번역했었습니다. 속량은 누군가를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기 위해 값을 지불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2천만 명이 넘는 많은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건을 사고 팔 듯이 노예를 사고파는 일이 일상이었고 사람들의 돈벌이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는 누군가가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가 되었을 때 내가 그 사람을 불쌍히 생각해서 그 사람에게 매겨진 값을 지불하면 그 사람은 나의 소유가 됩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것을 속량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죄의 종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죄를 지으며 삽니다.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죄에 붙잡혀 노예로 삽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결과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원래,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은 복이 아니라 사망이며 형벌이며 심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고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죄로 인한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죄의 사슬을 끊으셨고 사망의 늪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속량하셨습니다. 은이나 금으로 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하셨습니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값으로 지불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대신했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을 위해 희생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희생은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심판이 마땅한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하신 일입니다. 속량을 통해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이 그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으로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신비를 계획하셨고 이루셨고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9)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의 비밀을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게 스스로를 낮추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비밀을 열어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깨닫게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감추어있던 진리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그리스도를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해줄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은 단순히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은 더 크고도 넓은 것이고, 더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와 민족을 온 우주를 하나 되게 하시고 통치하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빌립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비밀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신 일을 성자 하나님이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이루셨고 우리가 이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구원의 계획에 내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이고 나의 영원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복으로 인해 나의 영원한 운명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다르게 만들 수 없을까요?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바꿀 수 없을까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을까요? 부족한 것이 있을까요? 만약 부족한 것이 있다면, 가진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아는 것이 부족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살펴볼 복은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입니다.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인을 치는 것은 편지나 계약서와 같은 중요한 문서에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밀랍을 녹여서 문서에 붓고 그 위에 인장 반지를 눌러 인봉을 하는데, 이 문서가 진짜임을 증거하고 주인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을 친 문서는 그 주인의 권위를 갖게 됩니다. 지금으로 하면 인감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본인임을 증명하고 법적인 효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신 일이 그러합니다. 인을 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것’ 성령님이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치심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이 차이가 없기에, 이 사람이 정말 믿는 사람인지 알 수 없기에 그런 안타까움에서 생기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고 역사하시는데, 차이가 없을 수 있을까?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변화가 없을 수 있을까? 성령의 능력은 나의 삶을 다르게 할 수 없는 걸까? 무한하신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성령님이 없는 것처럼 살 수 있을까요? 숨길 수 있을까요?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았다면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두려운 것은 우리 가운데 그 안에 성령님이 없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그것을 아는 분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착각 속에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분이 있을까하여 두려운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마시고 정직하게 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이 나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알 수 없는 분들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생각하고 그 복에 대해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성령님이 없는 분들은 받을 복이 없습니다.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된 사람의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이 모든 복에 대해서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것은 복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단순히 행위가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순종하고 있냐는 단편적인 모습으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을 두고 봤을 때 성령의 역사하심과 열매가 있냐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함께하심과 그분의 역사하심이 있다면 달라집니다. 물론,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나의 한계를 경험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은혜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을 겪으며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는 분들은 성령님의 인치심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에 경험할 완전한 구원을 조금 아주 조금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미래에 그 온전한 것을 경험하기 전에 지극히 적은 분량을 성령님을 통해서 미리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증”(14)이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물건을 구매할 때 미리 지불하는 계약금이나 선금을 의미합니다. 보증을 통해 머지않아 받게 될 그 전부를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그날을 확신할 수 있는 보증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 성령님을 통해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입니다.

갈수록 더 타락해가는 세상에서 혼란스럽고 어수선하고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그 모든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지금 내 안에 계셔서 역사하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책망하시고 때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가 죄를 이기며 살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그날,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을 온전히 경험하게 될 그날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날을 기다리는 우리가 그때까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을 받은 자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을 생각해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알기에 찬송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갇힌 몸이 되었지만, 가택연금으로 자유를 빼앗긴 몸이지만 자신의 그런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받은 복을 생각하며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을 알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바울이 알고 있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다면, 바울이 믿고 있는 것을 우리도 믿고 있다면, 바울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하기에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알고 있는 것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알고 계십니까? 바울이 믿었던 것처럼 그 복이 나의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실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 갈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피 값으로 나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차이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